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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Jul 22. 2021

나쁜 글 짓기

소인, 뭐라도 하나 써보겠사옵니다

나쁜 시라도 짓는 것이 최고의 시를 읽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
- 헤르만 헤세



고등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창작 산문반에서 활동했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글 좀 쓰시겠어요.’ 한다. 실은 그 동아리에서 문집 안에 들어가는 삽화 담당을 했다. 그 당시 나는, 미래에 만화가가 될 줄 알았다.  글쓴이가 들인 시간만큼 나도 엇비슷하게 들여가며 한 귀퉁이 작은 그림들을 채워주었다. 글쓰기 동아리에서 글은 쓰지 않는 멤버였던 것이다. 적절한 그림을 그려 주기 위해 친구들이 써낸 글을 성심성의껏 읽기는 했다.


소설이며 시며, 하다못해 길 가다 걷어찬 돌멩이 이야기를 쓰는데도 기똥차게 기발한 아이디어와 유려한 필력을 뽐내는 친구들이 많았다. 글을 받아 읽을 때면 평소 킬킬대며 함께 수다를 떨어댔던 그 녀석들이 맞나 싶을 만큼 어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짝 마음 한구석에 흑염룡을 키우던 감성이었을 듯한데, 당시엔 내심 그 친구들이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고 느꼈다. 별 것도 아닌 그 애들의 우스갯소리는 왠지 의미심장해서 크게 웃지 못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어휘들을 그들은 글 속에 첨벙첨벙 던져 넣었다. 어디서 그런 단어들을 가져왔는지, 그 생경한 표현들을 따로 양식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저 감탄할 뿐, 나도 글을 써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친구들과 내가 아주 다르다는 것만 확인했다. 


다른 사람의 글은 왜 이리도 훌륭하고 멋진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면 추천할 만한 방법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림에 영재성을 타고난 아이가 미술 학원을 다니면서 그림을 망치는 것과 같다!... 고 말하고 싶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므로, 고개를 끄덕일 일은 또 아닌 것 같다. 고개 숙여 겸손한 자세로 배우는 것이, 소인이 해야 할 일인 것이옵니다...


글쓰기와 책 쓰기를 위한 강좌가 넘쳐나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부지런히 책을 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나도 한번?’이라는 생각으로 괜히 기웃기웃해 보았다. 하지만, 과연 글쓰기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만 커져 버렸다. 차라리 겪지 않았으면 없었을 무거운 심정은 덤으로 얻었다. 이것이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창작의 고통이라는 것인가! 단어 하나 쓰고 멍 때리기, 문장 하나 쓰고 긁적거리기. 이런 것들을 하게 되었다. 


하얀 화면에 커서를 세워 놓고 들여다보기를 한참 하다가, 에라 집어치우자 하는 손짓으로 마우스를 던지고 괜히 눈에 들어오는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헤르만 헤세의 사색 노트.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나는 빛바랜 책을 휘리릭 넘겨본다. 아마 유명인의 유명한 말을 옮겨 놓은 책이니 좋을 것이라는 논리로 샀을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 먼 옛날 표식을 붙여 놓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나쁜 시라도 일단 짓는 게 행복하지 않겠냐는 대문호의 말씀이 그 자리에 있다. 


아. 나는 그 문구에 왜 표식을 해 두었을까. 어린 나이에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을 보니, 내가 무언가를 짓는다면 그게 딱히 좋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미 그때부터 했던 걸까. 혹은 나쁜 시라도 선뜻 짓지 못하는 나를 알아차렸던 것일까. 아마도 비교하며 움츠러들어있던 나 자신을 알고 있었나 보다. 아무튼 뭐 얼마나 대단하게 하겠다고 그러고 있냐는 듯이 그냥 뭐라도 써봐라 하는 그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듣기에는 내가 너무 미천하다. 잠깐 마음에 위안을 얻는다.


이제라도 다시 깜빡이는 커서를 움직여가며, 나쁜 글 하나 끄적끄적 쓰는 행복을 가져 보자고 생각해본다. 있지도 않은 최고의 글을 찾아가며 닿지 못할 거리를 확인하는 불행보다 그게 낫겠다. 


그나저나, 그 시절 그 친구들은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계속 글을 쓰고 있을까. 문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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