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찌백도 팔린 김에 제주나 갈까?

입도 이틀 전 갑자기 결정된 제주 한달살이

by 서울쥐
제주 한 달 D-2일

때는 제주 입도 이틀 전. 태국에서 돌아온 지는 6일 차가 되던 저녁이었다. 낮과 밤의 구분이 자유분방한 프리랜서의 삶을 산 지 어언 4년 차, 여느 날과 같이 잠이 오지 않는 밤하늘의 시작을 잡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3년 만에 다녀온 해외여행의 여운이 어찌나 컸던지, 눈을 감으면 짭조름하고 뜨듯했던 태국 공기가 얼굴을 감싸는 듯했다. 매일 밤 재즈 공연을 즐기고, 값싼 물가에 취해 하루하루 젊음을 탕진했었던 여행이었다. 한국에서 가졌던 스트레스와 불안도 잊은 채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있자니, 찬란했던 청춘 한 조각도 깨진 느낌이었다. 그 공허함을 채우고자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여행기를 정리해서 올리고는 했다. 올해 다시 꼭 #치앙마이 #치앙마이한달살기 하고 말 거야! 하며 한 달 살기 해시태그에 울렁이는 마음을 실어 두둥실 떠 다니는 던 중, 운명처럼 #제주한달살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한국에도 있다! 한 달 정도 기꺼이 나의 소중한 청춘을 내던질 곳, 제주였다.




제주 한 달살이? 지금이 딱이잖아!

한국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무언가 묶인 곳이 없었고, 일 년을 끙끙대며 안고 있던 (사용하지 않는데, 당근 할지 말지 고민만 100번) 구찌백도 처분하여 한 달 정도는 그냥 있어도 되는 여윳돈도 있었다. 올해는 다양한 SNS계정(인스타그램, 유튜브, 블로그, 브런치 등)을 키워서 퍼스널 브랜딩을 해보자는 욕심으로 거금을 들여 구입한 고프로도 있겠다. 제주 생활을 콘텐츠로 쓰면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몇 해전 한 달 살이 콘텐츠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 우연히 접했던 '제주 게스트하우스 스탭'이란 단어가 번뜩이며 머리 위를 스쳤다. 제주 N달 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방식인데,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주일에 2-4일 정도 2-4시간 일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제도(?)이다. 게스트하우스는 저렴한 인적 자원을 쓸 수 있어 좋고, 여행자는 잠잘 곳이 해결되어 좋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그런 제도. 당장 할 일도 없겠다 포털사이트 카페에서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스탭을 모집하는 공고를 검색해 봤다. 10분 정도 공고글을 살펴보니, 내가 원하는 게스트하우스 스탭 조건이 추려졌다.


내가 원하는 게스트하우스 조건

내 이상형 게하를 말해보자면 이렇다.


1) 파티가 없을 것

바닷가 근처 게스트하우스는 매일 밤 파티를 여는 곳이 많다. 언제부터 제주에 파티 문화가 성행했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도미토리를 운영하는 바다 주변 게스트하우스는 파티 없는 곳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다. 밤이 긴 제주. 식당과 카페도 7시 정도면 문을 닫는 곳이 정말 많고 (제주에 한 번이라도 가셨다면 이미 아시겠지만, 저녁장사를 포기하는 식당이 꽤 많다.) 도시만큼 밤길이 밝지 않아서 밤길은 꽤 무섭다. 아름답던 제주에 밤이 찾아오면 야행성인 도시 관광객들이 쌩쌩한 정신으로 숙소로 모여들게 된다. 밤이 너무 길고 심심한 사람이라면 이런 파티가 반갑고 유용할 것이다. 게하 파티는 게하와 손님 모두에게 일정 부분 장점으로 작용한다. 청춘 남녀가 한 곳에 모여 제주 밤바다소리를 배경 삼아 맥주파티를 하면, 낭만과 판타지로 얼큰하게 취할 수 있고, 저가형 게하 입장에서도 객단가를 높이는데 파티만 한 것이 없기 때문 아닐까 싶다. (개인적 견해다.) 하지만 스탭 입장에선 어떨까? 스탭에겐 이 모든 낭만이 그저 '일'이다. 밤 시간, 깨지기 쉬운 술병과 컵, 기름진 음식과 어질러진 상과 바닥. 낭만에 취한 사람들이 벌이는 취객 모먼트까지 통제해야 한다. 파티가 있는 게하는 사실 호프집 알바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파티가 있는 게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PASS.



2) 이동이 쉬울 것

제주도 게하 스태프들은 아르바이트생과 여행자 그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스탭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여행자 쪽에 방점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난 그렇다) 그래서 숙식을 해결함과 동시에 위치적으로 지역 간 이동이 그나마 수월한 곳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터미널과 가까운 곳이거나 적어도 주로 있고 싶은 동네로 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차를 가져오거나 렌트한다면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스태프로 오는 분들 중 차를 이용하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거의 없다. 나는 장롱면허 소유자로 뚜벅이 확정이기 때문에 이 점이 매우 중요했다.



3) 그 외: 조금이라도 급여가 있을 것, 예쁜 인테리어, 바다 근처

보통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스태프의 근무 조건은 70% 이상이 숙박+식사 제공, 무급이다. 하지만 아무리 구찌백을 팔았다한들 조금의 용돈 정도는 받고 싶은 거... 사람이면 다 같은 마음 아닐까? 그리고 어쨌든 일이기 때문에 적은 돈이라도 받는 게 있어야 조금 더 책임감 있게 임할 것 같았다. 예쁜 인테리어야 머물면서 쓸고 닦는 공간이 아름답다면 더 좋겠다 싶었지만 이게 그리 큰 조건은 아니었으며, 바다 근처 또한 필수는 아니었다.



예쁜 인테리어, 바다 앞도 아니었지만 나머지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곳이 있었다. 딱 한 곳.



그냥 문자 한 번 보내봐? 안될 수도 있으니까 그냥.



나이도 있고 (20대를 주로 구인한다고 들었어서) 안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방파제 삼아, 문자를 보내버렸다. 저녁 8시 23분, 마음속에 설렘과 충동의 파도가 해일처럼 일고 있었다.








꽤 장문으로 소개글을 써서 보냈던 첫 문자에 (왼쪽사진) 대한 답장을 받은 건 다음날 점심즈음이었다. 사실 점심시간이 되어도 문자 답이 없길래 역시 나이가 문제일까 싶어서 마음을 내려놓고 있던 중이었다. 답장은 다행히도(?) 긍정적이었다. 대면 면접이 불가능한 대신 사진 몇 장 첨부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그날 저녁 이십 분 정도 전화 면접을 보았다. 문자로 보내드린 나의 지난 여러 일들, 왜 이 게스트하우스를 선택했는지 등을 물으셨고, 게하 선택에 대한 요인은 위의 조건을 기반으로 차분히 대답했다.


...

(중략)

"다 좋고, 혹시 언제쯤 입도 가능하세요?"

"아... 저 채용 ㅎㅎ된 걸까요?"

"네! <서울쥐>님만 괜찮으시면 함께 일하고 싶어요."

"저는 내일 당장도 가능해요. 2일 뒤가 2월의 시작이니, 그럼 그때 입도할게요."

"좋습니다! 그럼 제주에서 봬요 :)"

".. 오.. 네!"


잠깐만, 진짜 제주도 한 달을 가는 거 맞아? 만 하루도 안되어 '제주 한달살이에 대한 흥미-검색-입도 결정'까지 원스톱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게 맞나 고민할 틈도 없이 결정된 어쩌다 제주, 그리고 서른 넘어 게하 아르바이트생 확정.


까짓 거 구찌백도 팔렸는데 가보자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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