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시간 동안 제주 한달살이 짐 싸기 프로젝트
아니, 그래서 한 달이나 떠나는데 뭘 챙겨야 하나?
2017년 미국여행 당시 홈쇼핑 특가를 통해 구입했던 28인치 'N'사의 캐리어 하나, 실용적 내부 오거나이저가 맘에 꼭 드는 'I사'의 검정 배낭,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S사'의 신상 텀블러 하나. 그리고....?
한 달이 넘는 섬살이를 위해 집을 나서기까지 46시간뿐. 그 안에 필요한 것을 파악하여 없는 건 구입하고 최대한 효율적인 짐 싸기를 성공시켜야 했다.
일단 캐리어부터 열어본다. 캐리어 지퍼를 열자마자 방콕 차이나타운 근처 푸팟퐁커리집 영수증이 보란 듯 자리하고 있다. 푸팟퐁커리집 뒤로 카오산로드 마사지샵, 기념품가게의 영수증도 함께. 여즉 태국 여행의 흔적이 가득한(내가 게을러서) 캐리어를 펼쳐 드니... 앞이 막막했다. 한 달이나 되는 긴 여행의 짐을 꾸려본 건 3년 전 다녀온 유럽여행이 전부였다. 캐리어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던 영수증과 티켓 같은 것을 밖으로 건져내니 28인치 캐리어가 더 휑해 보였다. 이 캐리어와 작은 배낭이 한 달 섬생활의 전부일터. 최대한 효율적으로 짐을 싸야 하니, 목과 어깨를 한 번 풀어준다. '지난날의 내 모든 여행 노하우를 다 녹여서 후회하지 않을 짐 싸기를 성공시키리라'. 결의에 찬 다짐을 해본다.
물론 제주는 (당연하지만) 우리나라인 데다 마트도 다 잘 꾸려져 있다고 하니(하지만 바닷가 주변+뚜벅이라면 근처에 큰 마트가 없을 수 있다) 없는 건 가서 사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가져갈 수 있는 건 잘 챙겨야 쓸데없는 추가 지출을 줄이는 길이었다. 스탭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돈을 아끼는 것도 있는데, 흥청망청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왕 쓸 거면 진짜 갖고 싶은, 예쁘고 무용한 작은 물건들을 사는데 써야지. 손톱깎이 혹은 귀이개 같은 것에 자잘한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잠도 거의 자지 않고 하루 이상 꼬박 챙긴 한 달 치 살림 종류는 아래와 같다.
(*지금은 여행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니, 내가 챙긴 물건들을 중심으로
작은 팁들을 전달하고자 한다.)
1. 의류
2. 화장품
3. 생필품과 먹는 것
4. 전자기기들
5. 책, 그 외 있으면 좋은 것들
1. 의류 <겨울 외투 두 가지와 일곱 착장, 신발 하나>
옷의 중요성은 사람 바이 사람(aka. 사바사 케바케)이기 때문에 단벌신사부터 매일매일 다른 착장 30벌로 패션쇼 하기까지 가능하다.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계획한 규모로 짐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꺼운 겨울 외투는 입고 가는 것까지 총 두 벌로 제한하고, 윗옷 아래옷 포함 최대 일곱 착장정도로 정했다. 양말과 속옷도 일주일치를 챙겼다. 이렇게 정한 이유는 세탁을 고려한 것이었다. 매일매일 다른 옷을 입고 세탁해서 그다음 주에 다시 조합하여 일곱 착장을 입으면 질리지 않게 한 달을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스탭일을 고려한 편한 바지와 윗옷도 챙기고, 휴일에 예쁜 배경 앞에서 인생샷을 남길 때 입을 원피스도 함께 접어 넣었다. 그 위로 무거운 캐리어를 끌 때와 추운 날 외출 시 유용한 모직 장갑을 캐리어 사이에 낑겨넣었다. 마지막으로 자주 쓰는 알록달록 볼캡들, 귀를 덮는 따뜻한 모자, 작게 접은 장바구니와 에코백 두 개도 함께 챙기니 의류는 이걸로 끝. 신발은 신고 가는 운동화 하나로 돌려 신기로 했다.
*tip- 여정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돌아보니, 구두나 로퍼 같은 단정하고 예쁜 신발을 한 켤레쯤 챙겼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장 없는 내 사진 속 모습이 거의 같은 외투에 늘 같은 운동화차림인 게 내심 아쉽다.
2. 화장품 <스킨케어, 색조 등 나한테 맞는 화장품은 부족하지 않게!>
이 시대의 뷰티업계는 피부톤 하나만 해도 쿨톤 웜톤이 다르고, 같은 톤 안에서도 사계절이 존재하는 복잡 다난한(=섬세한)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거기다 다섯 걸음마다 하나씩 있는 듯한 올리브영의 수해 속에 언제든 '여름 쿨톤 라이트 페일'에 맞는 화장품을 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육지와 달리 제주는 섬이고, 아무리 인프라가 좋아졌다한들 육지에 비해 원하는 화장품을 빠르게 구하기 어렵다. 갑자기 떨어진 '속건조 복합성 피부를 위한 동물실험프리 촉촉 스킨'을 구하려 1시간이 넘는 대 장정을 떠나야 할 수 있다는 말. 특히 매일 써야 하는 화장품일수록 이왕이면 넉넉히 챙겨가길 추천한다.
*tip- 화장품도 그렇지만 면봉이나 화장솜도 생각보다 귀하다. 이것 또한 떨어지면 은근 골치 아프니, 질 좋은 면봉과 화장솜은 넉넉히 챙길 것! 아, 그리고 혹시 해서 덧붙인다. 화장품 용기를 기내용 수화물에 넣을 거라면, 용기 자체가 100ml 이하인 제품을 챙겨야 한다. 꼭 기억하자.(물론 모두 아시겠지만) 김포공항에서 100ml 이하로 남은 스킨을 200ml 용기에 넣었더니 수화물 검사에 걸려 폐기를 해야 했다. 아까운 내 알로에젤..!
3. 생필품과 먹는 것 <공산품이 귀한 제주. 여자분들은 생리대 많이!>
위의 화장품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육지에 비해 마트가 흔치 않으니 공산품을 잘 챙겨가는 게 좋다. 먹는 것은 일단 인근에 다 맛집일 테고, 스탭이라면 직접 만들어 먹을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해결된다. 하지만 갑자기 머리 고무줄이 필요하거나 챙겨 온 생리대가 부족하다면 조금 복잡해진다. 주변 편의점에 급하게 가본다 한들 내가 원하는 '그 제품'이 없을 가능성이 있다. 공산품이 귀한 곳이니 애용하는 제품이 있다면 이 것 역시 넉넉하게 챙겨가야 한다. 나도 내가 주로 쓰는 생리대와 고무줄, 귀이개, 손톱깎이, 머리빗을 모두 챙겼다. 사람마다 없으면 더없이 불편한 물건들이 있을 것이다. (남자분들은 얼굴 굴곡에 잘 맞는 면도기 정도가 떠오른다.) 공산품일 경우 '가서 사야지'가 힘들 수 있으니 지금 챙겨가자.
*tip- 여행하면서 느낀 건데 얇은 세탁소 옷걸이 두어 개 정도 챙겨 다니면 이곳저곳 쓸모가 많다.
ex. 손빨래한 속옷을 널어둔다거나 자잘한 목도리와 에코백 같은 것을 걸어 정리하는데 유용!
캐리어에 여력이 된다면 지퍼를 닫기 전 작은 옷걸이 두어 개 챙겨가길 추천해 본다.
4. 전자기기들 <노트북, 아이패드, 카메라, 각종 충전기, 보조배터리 등>
이것도 역시 각자 필요에 의한 전자기기를 챙기면 된다. 나의 경우 스탭일을 하며 글을 쓰고, 영상 편집도 하고 촬영도 해야 하고, 그 모든 기계들을 충분히 충전해야 했기에 많은 전자기기가 필요했다. 전자기기는 비행기 수화물 검사 시 모두 꺼내야 하니 편의상 백팩에 담았다. 특히 배터리가 들어있는 작은 기기가 수화물 캐리어에 들어가진 않았는지 두세 번 체크를 했다.
*tip- 이번에 챙겨간 아이템 중 가장 '잘했다 템'을 꼽자면 단연 C타입과 USB포트가 함께 있는 멀티탭이다.
C타입과 USB충전, 220V가 모두 필요하다면 이런 류의 멀티탭이 삶과 정신을 더욱 편-안 하게 한다.
5. 책, 그 외 있으면 좋은 것들
여기서부턴 온전히 취향과 애정의 영역이다. 한달살이를 조금 더 풍요롭고 진하게 만들어줄 양념 같은 아이템을 꼽아보자. 나는 '책 사는 것'을 좋아한다. 독서를 좋아한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책 사는 것과 독서를 저울에 달면 여지없이 책 구입 쪽에 기울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기에, 양심에 기대어 적은 것이다. 마음에 드는 서점에 들어가 알록달록 아름답게 정리된 책을 보면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계산된 책을 두 손 가득 무겁게 건네받으면 마법처럼 제정신이 돌아온다. 그렇게 홀리듯 사온 책을 한 권도 빠짐없이 모두 읽었다 말하면 거짓말이다. 이렇게 살아오길 3n년째이니 모를 수가. 방안 가득 둘 곳 없이 쌓여버린 책을 보면 자책을 하다가도 서점에 가면 다시 발병하는 사재기병. 이런 나의 '책 사재기 충동'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 들일 책들을 염두하여 판형이 작고 가벼운 책을 선별, 세 권 정도 챙겼다. (실제로 세 권의 책으로 입도하여 열 권이 넘는 책을 이고 지고 출도할 예정이다.)
책이 있다면 빠질 수 없는 연필 및 필기구와 일기장 겸 메모장도 배낭 앞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여행 중 드는 감상과 느낌들, 공중에 흩어질 마음을 주워 담아 부지런히 적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여행 끝자락인 지금 메모장을 살펴보니, 이때 계획했던 것에 한참 못 미치는 다 여섯 장의 기록이 전부) 메모장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슬비가 내리던 날 서귀포 카페 베케에서 하루 계획을 세우며 정원을 바라보던 어떤 날, 알 수 없는 이상한 현타에 한숨과 함께 우울한 맘을 풀어놓던 다른 날의 새벽 두 시, 교통사고를 겪고 이만하길 다행이야 감사하다는 생각에 일기를 썼던 며칠 전 어느 날까지-
삶과 여행의 경계에서 젤리처럼 무르게 뒤엉켰던 감정들을 발굴하여 기록하고,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단정한 하루를 다짐했던 시간들 모두 소중하다. 소중했다.
그리고 감성 있는 음악 감상을 위해 생일 때 선물 받았던 CDP와 김동율, 성시경 CD 또한 배낭에 넣었.. 었지만 마지막에 덜어냈다. 짐이 많은 제주 한달살이 살림에서 감성보단 편의를 고려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tip- 마음 가는 아이템을 챙겨보자. 기록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 좋을듯하다. 필름 카메라나 녹음기 예쁜 독서등 etc!
이렇게 모든 항목을 지워가며 이틀 동안 짐을 싸다 보니 가져가야 할 살림이 점점 불어났다. 뭘 더 빼야 할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28인치 캐리어에 배낭 하나, 그리고 20인치 기내용 캐리어가 추가됐다. 아무래도 겨울 옷의 부피를 무시할 수 없었다. 여름에 가면 캐리어 하나면 될 것인데, 짐이 더 늘어 아쉬웠지만 점점 감기는 눈꺼풀을 어쩔 도리가 없어 이대로 가기로 한다. 부족한 것보단 낫겠지 하는 마음에 기대어 짐 싸기 대장정을 끝냈다.
이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며 모든 살림들을 챙기느라,
정작 설레고 불안했을 내 마음 한 구석은 돌아볼 틈도 없이 그냥 집을 나선다.
"가보자고- 제주도!!"
두 개나 되는 캐리어를 끌고, 각종 전자기기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 공항철도에 몸을 실었다. 잠도 거의 못 자고 짐을 챙기느라 온몸이 물을 먹은 듯 피곤한 상태였다. 그런데 뜻밖의 행운! 일찍 공항에 도착해서일까? 평생 처음 비상구 자리를 배정받았다. 그렇지만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고꾸라지듯 잠에 들어 한 시간여의 비상구 자리 비행이 어땠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인생 첫 무료 비상구 체험인데 이런 심심한 후기라니, 면구스럽다.
그래도 어쨌든 제주! 진짜 와버렸다. 이제야 덜컥 겁이 난다.
제주에서의 40일은 이렇게 무작정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