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시작한 낯선 알바, 게하 스태프의 하루
우와, 생각보다 넓고 방이 많네?
어서 와, 게스트하우스는 처음이지?
제주공항에서 앞으로 40일간 머물게 될 게스트하우스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우리 게스트하우스는 공항과 멀지 않은 곳으로 꽤 너른 공간을 가진 n층 단일 건물이다. 교통도 편리한 편이고, 한라산 등산하시는 분들도 많고 무료 세탁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게스트들이 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오픈 키친이 있고, 24시간 이용 가능한 라운지를 제공한다. 건물이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가격 대비 쾌적한 게스트하우스였다.
처음 이틀간은 물건도 정리하고 적응(?)할 시간을 주셨다. 같은 방을 쓰게 된 룸메이트 스태프분들과 안면을 트고 첫 만남에 으레 나눌 이야기들을 나눴다. (어디 사세요? 전공이 어떤 거예요? 무슨 일 하셨어요? 등등) 몇 번의 대화가 오간 후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안도감이 들자, 게스트하우스 안팎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게스트하우스 주변 줄 서는 맛집들과 예쁜 강아지가 있는 에그타르트 맛집, 길 건너 24시간 대형마트를 둘러보며 '갑자기 온 것 치고는 위치선정이 기가 막혔어!' 스스로 기세등등 행복하기만 했었다. 그리고 이틀 후, 본격적으로 게하 업무를 인계받기 시작했다. 제주 게스트하우스 스탭에 대해 아는 거라곤 효리네 민박, 그리고 아이유뿐이었지만 인계를 받으며 여러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깨닫게 된 사실>
공항과 멀지 않은 곳이면 외국인들이 많이 찾고, 세탁이 용이하면 한라산 등산객들이 많이 찾아서 조식을 드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 게스트들이 편히 조리할 수 있으려면 조리대 청소와 정리를 자주 해야 한다는 것과 음식물 쓰레기 또한 자주 버려야 한다는 것, 24시간 오픈된 라운지가 있으면 여러 이슈들이 발생한다는 것. 효리네 민박은 TV속 예능에 지나지 않고, 실제 게스트하우스 스탭 업무에서 아이유가 쓴 예쁜 밀짚모자는 쓸 일이 없다는 것. 아, 정확히 말하면 의미도 힘도 없다.
여기가 제주의 LA 맞나요?
새벽/ 오전/ 오후로 나뉘는 주요 업무에 대해 소개해드리기 전에,
잠시 전화 면접 당시 대화 일부를 복기해보려 한다.
<D-2 전화면접>
사장님: 우리 게하가 외국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어플에 등록되어 있어서인지 외국인 손님이 더러 있어요. 영어... 괜찮으세요?
나: (가끔 오시는 거겠지?) 네^^ 영어를 잘하진 않지만, 외국인들을 두려워하진 않아요.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고 싶어서 오히려 좋을 것 같아요!
사장님: 그거면 됐죠! 외국인들 두려워만 하지 않음 돼요. 그냥 웃으면서 단어로 대답만 잘해주시면 됩니다.
막상 오셔도 영어 오래 쓸 일 별로 없을 거예요.
나: (내가 갔던 게하들은 외국인 잘 없던데.. 많이 오시진 않겠지?) 네네! 대답은 잘할 수 있습니다.
..
(중략)
..
사장님: 그럼 제주에서 뵙죠^^
나는 이때 사장님의 이 말씀을 좀 더 유심히 듣고 생각했어야 했다. 별로 없을 줄 알았던 외국인 손님이 막상 업무를 시작하니 열에 일곱이었다. 얼마나 오겠냐 했던 외국인 손님이 주 고객이라니... 나는 정말 '그냥 <여행 회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 수준의 회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능력이라고 격상시켜 말하기도 죄송스러울 정도의 소통 능력을 가진 내가 여기에 와버리다니, '환장하겠네 정말.'이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국적도 어찌나 다양하신지- 프랑스, 미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등. 정말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내가 (여행자로 이전에) 다녔던 제주 게스트하우스는 다 한국인 뿐이었는데... 이런(외국인들만 오는) 곳도 있다니! 어디 외국인 버전 '유랑(우리나라 유럽여행 정보 카페)'같은 사이트나 카페에서 여기가 게하 맛집이라고 소문난 걸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외국인 손님들과의 에피소드는 이후 차차 풀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영어를 많이 - 말하게 됐다. 아무 걱정 없이 들어온 게스트하우스가 LA 한인타운보다 영어를 많이 쓰는 곳이라니!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셋째 날, 서울 강서구출신(룸메이트이자 동료) 스태프분의 유창한 영어 스피킹을 보고, 큰 좌절 및 두려움이 생겨났다. 없던 영어 울렁증이 발병하여 시름시름 앓다 방에 돌아와 조용히 '스카이 스캐너(비행기표열람어플)'를 열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3일이나 무전취식 해버린 곳에서 도망칠 수 없지 않나. 몇 시간 정도를 몸져누워 있다 몸을 일으켜, 동료 스태프분께 영어 대본을 부탁드렸다. 게스트 하우스 체크인 시 꼭 말씀드려야 하는 안내 사항이 열 가지 정도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한 영어대본이었다. 먼저 다녀간 영어능력자 스태프분이 작성해 두신 대본이었는데, 무려 네 페이지 분량의 대본이었다. 내용이 많긴 했지만 대본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업무 전 반나절을 꼬박 연습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준비된 스탭이다! 외국인 문제없지!' 영어 울렁증 게 섰거라! 를 외칠 때쯤, 게스트하우스 업무의 꽃 '베딩'을 비롯한 다양한 업무들을 마주하게 됐다.
실전 게하 업무 소개
<*앞으로 나열하는 업무 내용은 내가 경험한 한 게스트하우스의 업무이다. 게스트 하우스 업무는 주변 환경, 건물 규모, 조식 유무, 파티 유무에 따라 상이하니 지금 적혀있는 내용과 다를 수 있다.>
우리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들은 스케줄 근무로 일주일에 협의한 요일에 일을 한다.
업무 시간은 아침, 오전, 오후 세 파트로 나눠져 있다.
1. 아침 (오전 7-11시)<난이도★>
개인적으로 가장 수월한 파트다. '무사히 일어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새벽 6시 50분, 알람을 들으면 몸을 일으켜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게 가장 어렵다. 이렇게 쓰고 보니, 가장 수월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파트 같기도 하다. 사실 회사 출근이나 운동 또한 '몸을 일으켜 나가는 것'이 가장 어렵지 않은가. 막상 나가 닥치면 다 어떻게든 흘러가는 것이 우리네 삶. 거기다 게하 아침 파트는 기상 후, 같은 건물 1층에 내려가 앉기만 하면 거의 모든 업무의 8할은 한 것이니, 육지의 외출 및 노동보다 매우 수월하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어려운 업무 내용을 마쳤으니 남은 2할 정도를 짧게 덧붙여 본다. 1층에 도착하면 로비의 전등불을 켠다. 그리고 겨울일 경우 히터를 켜서 라운지 공기를 데워야 한다. 그리고 소소한 중요 업무, 카카오 스피커를 부른다.
"카카오야, 재즈 음악 틀어줘!" 피곤한 아침, 드립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재즈 음악을 고르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갓 엘라 피츠제럴드 여사님) 적절한 노래가 흘러나오면 비로소 숙박스케줄을 확인할 수 있는 컴퓨터를 열어본다. 관리화면 창을 띄어두고, 그날 체크 아웃 하는 방을 파악한 다음 종이에 적어둔다. 그럼 이제부턴 오전 10시까지 조식을 드시는 분들을 안내하고 라운지 이용이 원활하게 돌아가는지 지켜보는 것밖에 할 게 없다. 우리 게하 조식은 셀프였기 때문에 사실 상 할 일이 없어서 보고 싶던 책을 보거나, 아침밥을 같이 해 먹기도 했다. 이렇게 세 시간 정도를 보낸 후, 오전 11시가 되면 당일 체크아웃 방의 이불 커버를 벗기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온다. 벗겨낸 이불커버를 세탁실로 가져가 세탁기에 넣어 세제를 넣고 돌려 둔다. 그럼 끝.
나는 주로 이 아침파트 일을 했었고 아주 만족스러웠다. 일이 끝나면 피곤이 휘몰아쳐서 퓨즈 꺼진 전구 신세가 되기 때문에 쪽잠이 필수인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가장 좋다.
2. 오전 (오전 10시-2시) <난이도★★★>
딱 하루 가장 힘든 타임인 오전업무파트를 했던 적이 있다. 매일 오전 10시 반쯤이면 이불 커버를 벗기고 내려오는 아침 업무자 뒤로 새 이불을 끙끙대며 오르는 오전 업무자가 있다. 오전 업무의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이 '베딩'이라 불리는 이불 커버 씌우기이다. 말로만 들으면 이게 그렇게 힘들까 싶지만, 이건 진짜 해봐야 안다. 포근 푹신 좋은 향을 내는 이 하얀 이불은 바닥으로 축축 처지기 쉽고, 어찌나 무거운지... 처음 마주한 린넨실 속 뽀송했던 이불이 미워지기까진 단 한 번의 베딩으로 충분했다. 의인화를 해보자면 '맑.눈.광' 아니면 '빙그레 **'이랄까? 물론 베딩이 오전업무의 전부가 아니다. 화장실 청소와 바닥청소도 있다. 그래도 베딩이 최고빌런임은 변하지 않는다. '화장실 청소<<베딩'.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전 업무를 끝낸 다음날부터 이틀 내내 어깨가 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3. 오후 (오후 4-10시 마감)<난이도★★>
6시간 근무. 세 파트 중 가장 길지만 노동 강도가 적어 괜찮은 시간대. 아 물론, 영어 울렁증이 있다면 이 시간에 체크인을 하니 가장 힘들 수도 있는 시간이다. 오후 업무의 시작은 당일 체크인 하는 방의 상태 확인부터 시작한다. 오전업무자의 청소가 끝난 후, 더블 체크 하는 것이다. 하얀 이불 위나 아래에 미처 보지 못한 얄궂은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개수대 주변이 깨끗한지, 개인실에 물과 수건이 잘 놓여 있는지 정도를 확인하고 내려온다. 그리고 세탁실로 가서 아침 시간대 돌려둔 세탁물을 건조기에 넣고, 모두 마르면 빨래를 갠다. 오전 업무 때 빌런이었던 이불커버는 역시나 갤 때도 가장 어렵다. 폭이 넓고 커서 몸을 일으켜 양팔을 가장 넓게 펼쳐 쭉쭉 늘이듯 달래 가며 개켜야 한다. 아아, 이 뽀송하고 향긋한 하얀 빌런.
빨래 일을 하는 중간에 체크인 손님이 오면 체크인을 받고, 소개를 한다. (긴장) 남는 시간 틈틈이 유튜브도 보고, 책을 읽으며 내 시간도 보낼 수 있다. 늦은 저녁 시간이 되면 당일 분리 수거물을 버리고, 마감 10분 전 9시 50분이 되면 다음날 조식세팅을 해둔다. 조식 세팅이라 함은 자동 커피 머신에 들어갈 커피를 미리 넣어두고, 머신에 물을 채워두는 것과 식빵과 잼을 미리 밖으로 빼두는 것이다. ea-sy! 밤 10시가 되면 라운지 간접등을 제외한 다른 불을 소등하고, 히터를 끈다. 그러면 퇴근. 시간은 길어도 일하는 내용이 그리 힘들지 않아서 나쁘지 않은 파트. 나도 일주일에 하루는 이 오후 업무에 들어가 일했다.
이렇게 써보니 게하 입성 당시, 아는 게 효리네 민박과 아이유밖에 없던 내가 그새 '짬바'라는 게 생긴 듯하여 뿌듯한 마음이 차오른다.
다음에 오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다음이 있을까?
삶은 늘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모를 일이다. 제주도에 오는 것도 출발 이틀 전까지 몰랐는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