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 not free: 몸과 마음, 지갑까지 프리하지 않은 제주
왜 여행 같지 않지?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한 후, 시간이 후루룩 - 정말 라면 먹는 듯한 속도로 시간이 흘러갔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일주일이 그냥 지나갔다. 세상에나... 7박 8일 여행이었다면 제주도의 동서남북을 돌며 정말 많은 걸 했을 텐데 내가 일주일동안 한 거라고는 주변 카페 두 군데 정도를 갔던 일과 바다 한 번 들러본 것. 이것들을 제외하고는 한 게 없는 일주일이었다.
"도대체 왜 여행을 왔는데, 여행 같지가 않지?"
짧은 일정으로 찾았던 지난 여행길에서 제주는 매일매일 새롭고, 모든 순간 각기 다른 울림을 주었었다. 어쩐지 육지의 것보다 더 푸르고 고운 하늘빛으로 느껴지던 하늘을 매일 올려다봤다. 그뿐인가? 공기, 찰나의 바람 한 가닥도 놓칠세라 하루의 기쁨을 모두 움켜쥐며 살아갔다. 봄에는 파란 하늘 아래 노란 카펫 같은 유채꽃, 여름엔 푸른 하늘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가을엔 우수수 감성 넘치는 억새풀, 겨울엔 하얀 눈이 쌓인 한라산까지. 모든 계절 언제 찾아도 아름다운 자연에 몸과 마음을 비볐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 달랐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지내 버리고 말다니, 이러려고 제주에 내려왔나 하는 현타와 조바심이 함께 밀려왔다. 머릿속으로는 현타와 조바심이 물밀듯 일었지만 마음속이 너무 고요했다. 분명 여행인데, 거기다 사람들이 다 꿈꾼다는 제주 한달살이에 왔는데... 설레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일주일이 허무하게 지났고, 나는 왜 설레지 않을까? 내 삶의 귀중한 한 달을 제주에 바치기로 작정했는데, 설렘 없는 마음으로 3주를 더 보내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마치 더없이 사랑했던 연인에 대한 열정이 사라져 남몰래 괴로운 마음 같았다.
이유를 생각해 보자, 다시 사랑에 빠져야 하니까.
나는 남은 3주를 잘 보내기 위해서라도 이 건조한 마음을 벗겨내야 했다. 굳은 각질을 벗겨 새 살이 솟는 것을 기다리듯, 무엇이 내 마음의 열정이 꺼트렸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1. 매일 나를 기다리는 삶의 현장, 일터의 존재
왜 이번 여행이 전 같지 않을까에 대한 고찰 중 드러난 첫 번째 이유는 '게스트하우스 업무의 존재'였다. 이전에 왔던 여행에서는 맛집과 커피, 서점과 문구점 탐방 및 소비의 행복 비중이 100인 여행이었다. 일이 낄 자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은 일주일에 네 번 하루 네 시간씩 정해진 일이 있었다. 업무강도도 낮고, 스트레스도 없는(거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일. 일로 약속된 시간은 나의 의지로 할 수 없으니, 알게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거기다 처음 해보는 일에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서 내 나름대로 사지에 힘을 바짝 주고 있었다. 제주 한 달 살이를 계획하며 게스트하우스를 가려고 생각했을 때는 숙식 해결의 편의성만 생각했지, 이런 지점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생각하지 못한 게 너무 많다) '내 자유로운 여행에서 약간의 시간들만 타협하면 합리적인 여행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자유로움의 일부를 내어준다고 생각해야 했다.' 일상에서 벗어나 내 모든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것. 이 것을 여행으로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게스트하우스 생활을 선택한 순간, 내 시간의 일부는 여행이 아님을 택하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여행인 듯 일상인듯한 일상을 하이브리드로 살게 된다는 뜻. 정말 몰랐다. 게스트 하우스 살이가 여행에서 오는 심리적 만족도의 순도를 낮추는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2. 숨 쉬는 것만 빼고 다 가격이 매겨지는 제주의 삶, 오늘 영업하시나요?
"아니 이건 왜 이렇게 비싸고, 문은 왜 이렇게 빨리 닫는 거지?"
A카페는 화, 수요일이 휴무. B식당은 월, 화 휴무에 3시부터 5시 반까지 브레이크타임. 문 앞까지 갔던 C서점은 예고 없던 휴무 안내글이 붙어있다. 아니 네이버에 분명 영업 중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한 시간 반을 넘어와서 보는 휴무글에 맥이 빠진다. 할 수없이 열려 있던 옆집 카페에 들어갔다. 시그니처라고 붙어있는 베스트 커피 메뉴가 9,500원. 관광의 섬, 고물가의 정점인 제주에 오신 걸 환영한다.
제주는 정말 숨 쉬는 것 빼고는 다 돈이 매겨지는 곳이다. (육지도 그러하지만.) 관광지 물가의 밥과 음료는 차치하고 유채 꽃밭에 사진을 찍으려 해도 돈을 내야 한다. 거기다 제주는 자영업 워라밸의 성지로써 저녁 7시면 유명 카페도 문을 닫고 영업시간도 주인장 마음이다. 요즘 밈이 된 인스타그램 핫플 카페의 경험(인스타그램 공지 확인해 주세요~)도 감내해야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가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바닷가 뷰의 카페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7천 원은 뷰 값으로 지불해야 하고, 시그니처 메뉴는 만 원돈. 카드를 낼 때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애써 감추며 힘겹게 내드려야 했다. 여기까지 나의 푸념 섞인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아니, 제주 처음이야? 여행 왔을 때도 똑같았잖아. 여행지가 다 그렇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40일 여행자. 40일 동안 이 물가에 적응하여 꼬박꼬박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시라. 흔쾌히 모두 사 드신다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주의 푸른 바다만큼 깊고 여유로운 잔고를 가지셨네요. 치킨 한 마리만 부탁드립니다.) 나는 아니었다. 처음 3-4일은 나도 다른 여행자와 똑같이 1일 2 커피, 2-3끼 외식을 즐겼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점 카페와 식당을 가는 빈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기로 하고 마트를 자주 찾게 됐다. 이제 정말 끼니의 A-Z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미션을 수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제한된 식재료와 조리도구, 한정된 요리 실력을 가진 나의 협업으로 완성된 식사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맛의 유무와 상관없이 직접 해 먹는 밥은 '여행스럽지'않다. (남이 해준 밥 최고)
3. 기본 이동시간 1시간, 무서운 제주의 밤
뚜벅이의 제주는 서럽다. 조금만 이동하려 해도 기막힌 긴 배차간격의 버스시간 덕에 어플에도 정확한 도착정보가 뜨지 않는 경우가 잦다. 조금만 옆 동네로 나들이 가볼까 해도 한 시간은 잡아야 한다. 생각보다 크고 넓은 제주, 뚜벅이에게는 1.5배 더 넓게 느껴진다. 일주일 정도 가까이 어딘가를 가보려 계속 시도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못 다닌 것도 이런 이유다. 그리고 머무는 시간이 한 달이니, '다음에 가보지' 하는 마음이 쉽게 더 해져 더욱 안 다니게 된다. 짧은 여행은 한정된 일정 상,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달살이에서는 '기약 없는 다음'이 너무 쉽다.
이러나저러나 제주를 찾는 이유 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그림 같은 풍경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지 않을까? 사시사철 다른 아름다움으로, 머무는 것 그 자체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곳이 이곳 제주이기 때문이다. 제주는 아름답다. 밤이 되기 전까지는. 핑크빛과 붉은빛이 타오르다 이내 푸르게 일렁이는- 가슴 벅찬 일몰 시간이 지나고 난 제주는 끝도 없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밤의 제주를 걸어본 적이 있으시다면 이 말이 어떤 뜻인지 아실 것이다. 정말 끝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매일 번쩍이는 가게의 네온사인과 열 걸음에 하나씩 나오는 가로등의 보우 아래 살았던 나로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제주의 밤은 낯설고 두려웠다. 분명 주택들이 붙어 있는 동네였지만 해가 지면 사람이 사나 싶게 고요하고 어두웠다. 가로등은 5분은 걸어 나가야 하나씩 볼 수 있었고, 외부 등을 설치한 가게도 흔치 않았다.
호기롭게 걷기 시작했던 어느 밤, 5분 정도 걸었을까? 어두운 길을 걷다 만난 들개에 몸이 굳었다. 3초 정도 머리도 하얘졌는데, 두려움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러자 다행히 내 쪽을 지켜보던 들개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너무 두렵고 서러워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했다. 5분 정도 뒤에 만난 작은 슈퍼 불빛이 어찌나 반갑던지.
슈퍼 앞에 작은 외부 등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아래 아까 '그 들개'가 앉아 있었다. 놀란 맘을 뒤로하고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의 손이 닿아있는 슈퍼집 댕댕이였다. 무섭게 빛나던 눈동자도 환한 곳에서 보니 그렇게 순한 눈매가 없었다. 저렇게 착해 보이는 애를 나 혼자 오해하고 눈물까지 보였다는 게 허탈했다. 강아지 쪽으로 다가가니 꼬리를 흔든다. 다리 쪽을 한 번 쓰다듬어주니 몸을 더 가까이하는 착한 아이. 사진을 찍고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너 아까는 너무 무서웠어. 밤에 혼자 그렇게 다니지 말어."
다행히 아무 일이 없는 밤의 해프닝이었지만,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그 날카로운 두려움의 기억은 잊지 못할 것이다. 제주의 밤은 도시의 밤과 다르다. CCTV, 가로등의 수로 비교하자면 비교불가이니,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내 안전의 책임자는 나 자신이다. 어둡고 인적이 드문 길은 피하는 것이 좋다. 제주의 도심은 그나마 가로등이 있지만, 중심지에서 조금만 들어와도 새카만 밤 골목을 맞이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나 역시 이렇게 무서운 제주의 밤을 경험하고 난 이후, 해가 지는 시간에 예민해졌다. 소비의 즐거움과 먹부림의 행복만 생각하기에도 짧은 여행에 안전과 체력을 고려하기 시작하니, 열정 어린 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육지에서부터 들여온 걱정들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 [<생각보다 로맨틱하지 않은 제주 한달살이>는 말하고 싶은 내용이 여러 토픽이라 몇 개 더 시리즈로 나옵니다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