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 서리를 알려준 제주도민 '다정 씨'와 매일 걷는 올레꾼 '주연'
내 여행은 언제나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 공항에서 만난 그 나라의 직원 분들, 공항 택시에서 만난 기사님 등 여행의 시작은 그 나라에서 만난 사람에서 시작한다. 본격적인 여행지안에서도 마찬가지! 이색적인 건물과 날씨, 특색 있는 음식만으로는 25% 정도 아쉽다. 혼자 찾은 여행지에서 갑작스레 마음 한쪽을 나눌 사람을 만나면 낯설었던 여행지가 내 구역이 된 기분이 든다. 우연히 찾은 식당에서 대화를 하게 된 친구 A, 버스정류장에서 인사와 대화를 나눈 할머니 B... 등. 그렇게 여행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그 여행지는 언제나 '그 사람'을 만난 곳으로 변해 버린다. 시간이 더 흘러 그 여행지를 떠올리면 늘 '사람'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여행지를 사람으로 기억하게 된다. 이번 제주 40일 살이에서도 내게 남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게스트하우스의 스태프 친구들, 매일 찾아오는 손님들, 게스트 하우스 밖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제주를 떠올리면 생각하게 될 사람들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 *미리 알림- 시리즈로 나오게 될 '사람들' 시리즈는 모두 가명으로 말씀드리며, 구체적인 신상 이야기가 나올 시에도 역시 정보를 조금씩 바꿔 적습니다. 사람들을 특정할 수 없게 적는 점 양해 바랍니다 :) ]
다정 씨를 만난 건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늦은 아침을 먹으러 라운지에 내려왔다. 졸린 눈으로 '오늘 뭐 먹지?'에 대한 내적 갈등을 이어가는데, 낭창낭창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핫하하하- 진짜요?"
"네~ 그래 가지고~~..(중략).."
슬쩍 라운지 안 쪽을 보는데, 내 룸메이트 1인 지수 씨와 처음 보는 여자분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분이 등장하자, 약간의 어색함을 가지고 그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조금 가까이서 본 '처음 본 분'은 하얀 달님 같이 따습고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묘하게 마음이 풀어지는 웃음과 인상을 지닌 다정 씨는 정말 밝은 분이었다.
"서울쥐씨라고요? 꺄항항(정말 이런 웃음소리였다) 저는 다정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다정 씨는 주변 사람들을 밝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상주 스태프분들처럼 자주 보진 않았지만, 다정 씨를 볼 때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에 다정 씨 출근날이 되면 라운지를 내려가는 발걸음이 조금 더 신났던 것 같다. 존재만으로 주변 사람이 밝아진다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재능이다. 일생을 제주도에서 보냈다는 제주도 성골인 다정 씨는 가끔 두 손 가득 귤을 챙겨 오곤 했다.
다정: "귤 좀 드세요~!"
나: "우와 사 오신 거예요?"
다정: (잠시간 정적, 입꼬리에 미소를 띠며) "제주도에선 귤 사 먹음 바보라는 말도 있어요.
지인의 지인이 다 귤 농사를 지어서 ㅎㅎㅎ.. 이것도 누가 주셨어요!"
나와 스태프 모두: "우와~~ 역시 귤국!!"
다정: "그리고 집 주변에 죄다 귤 밭이라 지나다 하나 두 개씩 따먹음 되고, 거의 안 사 먹어요!"
나: (????) "어? 그럼 안되지 않아요?"
다정: "수확 다 끝내고 남아 있는 못난이 귤들이 있어요. 그런 건 따먹어도 괜찮아요. 상품이 아니라서!"
나와 스태프: "ㅋㅋㅋ합법적 서리인가요?"
다정: "합법적 서리라 할 수 있죠! 그리고 다 동네 이모님들 밭이라...ㅎㅎ"
도시 촌것인 우리에게 농가의 정과 '합법적 서리'를 알려주던 따뜻한 다정 씨. 오며 가며 제주 방언과 제주 생활을 알려주기도 했고, 어쩔 때는 서울 이야기를 묻기도 했다. 마지막에 과일 가게로 일자리를 옮기며 이른 안녕을 하게 됐지만 게스트하우스를 떠올리면 늘 생각이 날 것 같다.
제주도에는 올레길이 있다. 제주도 올레길은 총 완주거리 437km의 도보길로, 스페인 산티아고를 다녀왔던 어떤 분이 제주에서도 산티아고 길을 재현해 보자는 뜻으로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벌써 15년이 넘은 올레길은 2022년, 스페인 산티아고와 올레길 공동완주제를 도입하여 올레꾼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아, 물론 나는 올레꾼이 아니다. 그럼 어쩌다 올레길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됐냐 하면 바로 주연 씨와의 만남덕이다.
주연 씨는 내 룸메이트 스태프 두 명 중 한 명이었던 동료이다. 둥글둥글한 얼굴에 선한 눈매, 동글이 안경, 등산복차림을 한 주연 씨는 내향적인듯하지만 사람과 빨리 친해지는 친화력을 지닌 분이었다. 처음 본 날부터 내 킥보드를 함께 조립해 주고, 게스트하우스 일과 주변에 있는 좋은 카페들을 주르륵 알려주는 좋은 분이었다. 주연 씨 덕에 제주 생활에 금방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나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되어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공감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정말 많았다. 퇴근 후 펜던트 조명 아래 치킨을 먹거나 차와 커피를 놓고는 육지에서의 일과 사랑, 작고 큰 실패들과 성공들을 나누며 우정을 쌓았다. 육지에 온 지금도 연락하고 만나는 사이가 된 소중한 인연이다.
이제는 친구가 된 소중한 인연, 주연 씨는 걷는 것을 정말 좋아해서 올레패스를 발급받은 후, 쉬는 날이 되면 여지없이 나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온갖 올레 코스를 정복했다. 어찌나 열정적으로 걸었던지 나중엔 '족저근막염'에 걸려 매일 병원에 다니기도 했다. 이렇게 병까지 얻었지만(!) 조금만 컨디션이 괜찮아도 금세 신발끈을 조이고 밖으로 나갔던 주연 씨. 나 역시 제주 도착해서 주연 씨를 보며 올레길, 오름, 한라산 등등 많이 걸어야겠다는 도전을 받았었다. 하지만 제주 도착 이튿날 당차게 킥보드를 끌고 나갔다가 넘어지는 작은 교통사고 덕에 마음이 쪼그라들어 많이 걷질 못했다. 육지에 돌아온 지금 제주 생활을 돌아볼 때 가장 아쉬운 것이 오름과 올레길, 한라산을 가지 않은 것. 어떻게 한 군데도 못 갔지 싶게 아무 곳도 못 갔다. 걷기 위해 제주에 왔다는 주연 씨는 매일 등산복 차림이었는데, 미묘하게 크거나 독특했다.
나: "주연 씨, 등산복이 진짜 많다~ 옷을 다 산 거예요?"
주연: "아 ㅎㅎ 이거, 아빠 옷이에요. 흐흐 아빠가 안 입으시길래 제가 가져왔어요."
나: "주연 씨는 진짜 찐이에요. 찐 올레꾼. 꼭 나중에 산티아고 가봐요!"
주연: "네네! 진짜 가보고 싶어요. 저 잘 다닐 거 같은데...!"
제주에서 함께 서귀포에 놀러 갔던 날, 비 오는 날임에도 역시 등산복 차림으로 우비를 입고 나타났던 주연 씨. 옥돔 정식을 먹고 검은 모래 해변을 봤던 날에도 여지없이 올레길을 걸었다. 이 날 반가운 이야기도 들려줬다. 내가 제주에 오기 전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올레길을 걷다가 우연히 어떤 수더분한 총각(준수씨)과 이야기를 하게 됐다고 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가다 문득 너무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헤어질 때쯤 주연 씨가 지금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자 준수 씨는 마침 오늘 머무를 곳을 찾고 있다고 했다. 주연 씨가 그럼 우리 게스트 하우스 도미토리 방을 쓰라고 권유하자, 흔쾌히 우리 게스트하우스로 왔다고 했다.
그날 저녁
주연: "준수님, 한라산 가보셨어요?"
준수: "아니요. 주연 씨 한라산 가실 거예요?"
주연: "네. 근데 지금 눈도 있고, 같이 갈 사람 있으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준수님 한라산 가고 싶으시면 내일 어때요?"
준수: "내일요? 좋아요. 한라산 가요!"
이렇게 뜻이 맞은 둘은 다음날 한라산에 가게 됐고, 정상을 정복한 후 호감도 싹트게 됐다. 두 달이 넘게 제주에 있던 주연 씨와는 달리 준수 씨는 2주 정도 먼저 육지로 돌아가게 됐고, 어쩌다 보니 매일 연락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서귀포 길거리 내내 어찌나 방방 뛰었던지! '올레길 로맨스'라며 온갖 깨방정을 부리기도 했다. 주연 씨의 설렘 가득한 풋풋한 로맨스 이야기를 들으며 걷던 서귀포에서 짧은 여행도 끝났고, 그로부터 2주가 흘러 주연 씨 역시 육지로 돌아갔다. 매일 연락하던 걷는 남녀 둘은 그 주 주말에 카페에 가서 육지에서의 이야기를 또 즐겁게 나눴다. 그리고... 여전히 제주에 있던 나에게 주연 씨가 연락이 왔고, 연인이 됐다는 들뜬 소식을 전해줬다.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은 시리즈로 적어나갈 예정입니다 :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