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가 궁금한 수험생 '지수', 합법적 고액알바 N잡러 '사장님'
지수 씨는 40일간 머물렀던 제주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했던 룸메이트이자, 동료였다. 처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큰 눈의 지수 씨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인사를 하며 내게 다가왔다. '작고 마른 몸, 악의 없는 딱딱한 말투와 몇 없는 표정, 귀여운 이목구비를 가진 어린 여자애'가 첫인상이었다. 지수 씨는 붙임성 있고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10대를 갓 넘긴 앳된 얼굴에 가끔 미소가 번질 때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묻어 나왔다. 사람과 좋아하고 가까워지고 싶은 말랑한 마음을 다소 건조한 표정아래 감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에 온 지 3일이나 됐었나? 아직 어린 어른인 지수 씨가 어느새 다가와 내 머리칼을 만지작 거렸다. 다른 사람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건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또 내가 노트북으로 무얼 하는지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종종 내 노트북 화면을 불쑥 쳐다보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꽤나 어른 집단속에서 어른인 채 하던 나는 이런 사소한 제스처에 조금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도 지수 씨를 절대 미워할 수 없었던 건 예전의 나와 어딘가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저는 집에서 나와서 이렇게 혼자 있는 게 좋아요. 워낙 개인주의성향이 강해서
좀 이렇게 살아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말하고서 내가 다른 지역에서 여행을 하느라 다른 곳에서 자고 오면,
사실 어젯밤 혼자 있던 방이 무서웠다고 넌지시 말하거나
"저는 다른 친구들이 애늙은이 같다고 해요. 좀 어른스러운 편이랄까?
그래서 언니들이랑 더 이야기가 편한 거 같아요."
라고 빨래 개는 내 앞에 갑자기 앉아 대화를 시작할 때라든지. (쿠키를 오물거리며, 지수 씨는 정기적으로 쿠키 대량구매를 했었다)
나도 지수 씨 나이 때, 내가 퍽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의 내 나이정도 되는 언니들 앞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 앞에 앉았던 언니 오빠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어떤 존재든지 성장하고 있는 존재들이라면 큼직한 과정의 어느 한 부분이 일면 닮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어른 지수 씨를 보면서 십 년 전의 미숙하고 허름하고, 또 어느 정도 지금보단 맑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닌 척 혹은 그런 척의 순간들이 많았던 나. 그리고 '척'에도 짬이 없어서 늘 들켰을 내 모습이 떠올라 그때의 내가 짠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지수 씨를 볼 때도 조금은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지수 씨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10살 많은 나와 지낸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지수 씨 역시 늘 좋진 않았을 것이다. 불편하고 힘든 점들도 많았을 텐데, 서로의 존재를 견디고 잘 지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하면 실제로 지수 씨는 예전의 나보다는 훨씬 어른스러운 어른일 수도)
언젠가 지수 씨를 또 만날 수 있을지, 혹은 이 글을 보게 될지 모르지만 지수 씨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 10년이 지나도 생각보다는 '어른'이기 어렵다는 내 개인적인 고백도 해본다. 더 어른스럽게 모든 걸 포용하고, 더 모른척해주지 못해 부끄럽다. 이렇게 너른 어른 사람으로 자라는 게 어렵습니다. 예전의 나보다 더 어른 같은 어린 어른, 지수 씨가 10년 뒤 또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사장님은 늘 바빠 보였다. 첫 만남(?)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 전화면접부터 내가 육지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전화기를 통한 연락을 이어갔었다. 늘 곧 오신다 했지만 매번 건너 건너 소식을 들을 뿐, 언제나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모드. 출퇴근 때마다 문자로만 소통했는데, 어떤 날은 문자가 5시간이 지나도 보지 못하시는 때가 더러 있었다. 잠시 머무는 내 딴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 , 미안해요! 제가 알바를 뛰고 오느라 답이 늦었네요!>로 시작하는 답장 문자가 오곤 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시면서 투잡을 하신다고 하길래, 육지에서도 종종 부지런한 사람들이 에어비앤비 부업을 한다는 말을 들었어서 그런 분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언젠가 '알바 중'이라는 사장님이 보낸 한 문자로 인해 사장님의 다른 일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새벽 파트를 담당하던 내가 사장님께 출근 알림 문자를 보냈다.
[사장님, 7시 출근했습니다 :)]
(TMI: 정 없어 보이니, 매일 조금씩 웃음 이모티콘을 바꿔 달았다. 나름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포인트라고 생각하며 요상스레 뿌듯해했다.]
1시간 후,
[오 아침부터 수고하십니다. 저는 합법적 고액알바 중이에요]
합법적 고액알바라는 키워드를 본 순간부터였다. 내 머릿속 물음표가 사장님의 정체(?)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진 사장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크게 관심도 없었고, 한 번도 뵙지 못했던 분이라 더욱 별 생각이 없었다. 으레 투잡 하는 직장인정도로 생각하고 내 할 일만 열심이었는데, 저 '합법적 고액 알바'라는 단어가 내 흥미를 끌었다. 무슨 일을 하시는 걸까? 생각해 보니 시간이 자유로운 직업인 것 같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연락이 자유로운 분이었다. (앞서 말한 가끔 한나절 연락 안 될 때 빼곤) 지수 씨나 다른 스태프분들 중 몇은 아는 것 같았지만 사서 물어보기도 머쓱한 생각이 들었다. 업무 책상 이면지에 사장님이 두신 이면지 더미가 있어서 살펴보니, 알 수 없는 표와 숫자, 점들이 암호처럼 널려있었다. 사장님의 정체는 더 미궁 속으로 흘러갔다. 꽂힌 포인트가 이상하긴 하지만 '합법적'과 '고액 알바'는 왠지... 뭐랄까 너무 안 어울리는 조합이랄까? 고액 알바에 붙는 생각들은 너무 부정적이거나 혹은 범죄에 가까운 일 뿐이었다.
'고위 공무원인가? 청와대 이런데 다니는 공무원은 투잡 못하지 않나?'
'변호사 아닐까? 재판 때문에 연락이 종종 안 되나?'
'운동선수... 나이가 있으니, 코치일 수도 있어. 꽤나 일찍부터 움직이시는 듯.'
조용한 새벽, 아침 일을 하러 나오면 언제나 고요함과 한기, 그리고 무료함이 함께한다.
상상의 유희를 즐기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말이다.
고요한 라운지에 혼자 있노라면, 체크인 데스크 위에 이 상상 꾸러미를 풀어낸 후, 야금야금 혼자만의 소설을 쓰곤 했다. 사장님은 내 상상에 따라 대형로펌 변호사였다가 대기업 임원이 됐다가 다시 전직 국가대표인 펜싱 코치가 되기도 했다.
사실 별것도 아닌 작은 단어 하나에 이렇게 생각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의 내가 너무 무료했기 때문이다. 별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일상 속 미스터리 사장님의 정체는 그나마 내가 붙잡고 상상할 수 있는 작은 유희였다. (제주 일상이 이렇게나 이벤트가 없었나 싶다) 언젠가 보게 되면 꼭 여쭤봐야지 생각하며 드문드문 상상하던 사장님은 내가 육지로 가는 날이 정해지고 나서도 오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교통사고까지 당해서 사장님의 정체에 대한 생각도 잘하지 않았고, 육지로 돌아갈 준비만 하고 있던 그때.
[서울쥐님 육지 가시기 전에 봬야죠~! 내일 게스트하우스 들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때 다 같이 회식해요!]
합법적 고액알바 N잡러 사장님의 문자였다.
결말 없는 연재소설로 끝날 것 같았던 사장님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 무뎌졌던 호기심도 다시 빼꼼 솟았다. 다음 날, 늦은 밤이 돼서야 사장님이 도착하셔서 같은 동네 치킨집에서 회식을 했다. 치킨을 시킨 후, 사진과 문자로만 접했던 사장님이 익숙한 목소리로 말을 거셨다.
"저 뭐하는지 들었어요?"
"아니요! 어떤.."
침착하게 별 일 아닌 듯, 별로 궁금하지 않은 듯 꽤 자연스러웠다.
"아 저 비행기 몰아요. 비행기 운전!"
"아! 그건 한 번도 생각 못했어요!"
이걸 이렇게 진짜 크게 대답해 버리면... 아휴.
사장님은 외항사 기장님이셨다. 내 상상 속에서는 한 번도 고려해보지 못한 직업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비행기 기장님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제주라니! 그것도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으로! 신나는 마음에 질문 폭격기가 되었다. 여행을 매일 가면 무슨 기분인지, 코로나 이후 요즘 여행이 많아졌다는데 진짜 일이 많으신지, 가본 나라 중 어디가 제일 재밌었는지, 기타 등등 궁금했던 점들을 물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유쾌하고 쿨했던 사장님은 내 기나긴 질문도 다 대답해 주시고, 내 교통사고에 대한 조언도 깊게 해 주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스태프들이 모여 함께 치킨을 먹고 유쾌한 대화를 이어갔던 밤. 직접 만난 사장님은 이색적인 본업(?)(혹은 알바라 불리는) 말고도 흥미롭고 유쾌한 점이 많으신 분이었다. 못 뵙고 갔다면 아쉬웠을 유쾌한 어른이었다.
+전 직원 워크숍으로 발리에 가자고 하셨던 말을 꼭 지켜주시리라 생각한다. 사장님이 직접 운전하시는 비행기에 탈 수 있는 어느 날의 워크숍이 기대된다.
[ *알림- 시리즈로 나오게 될 '사람들' 시리즈는 모두 가명으로 말씀드리며, 구체적인 신상 이야기가 나올 시에도 역시 정보(직업, 나이, 성별 등)를 조금씩 바꿔 적습니다. 사람들을 특정할 수 없게 적는 점 양해 바랍니다 :) ]
[다음번엔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손님들 중 몇 분의 이야기를 적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