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 3

매일 찾아오는 다른 얼굴의 게스트들 1

by 서울쥐

게스트하우스에는 구면을 찾기가 힘들다. 보통은 하루 이틀, 길어야 일주일정도 보낸 후 돌아가시는 여행객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은 두 번 이상 찾아주는 손님도 있고 재밌는 추억거리를 여러 번 떠올릴 손님들이 있다. 제주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 이번 편은 구면인 듯 구면 아닌 게스트들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매일 얼굴이 붉은 사람 '미스터 김'


'미스터 김'은 한 달에 절반은 우리 게스트하우스에 묵던 단골손님이었다. 단골이고 자주 본 얼굴이니 기억에 남는 게 당연했지만, 유독 인상에 깊게 남는 건 그의 '붉은 얼굴' 때문이다. 미스터김은 매일 밤 편의점에서 소주와 막걸리 맥주 등 종류별로 한아름 들고 우리의 냉장고를 점령했다. 그리고 붉은 얼굴로 밤마다 술을 마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주변을 둘러보며 술동무를 물색하곤 했다. 로비에는 손님들도 있지만 가장 많이 머무는 사람들이 누구겠는가. 바로 나 같은 스태프들. 카운터에 앉아있거나 빨래를 개거나 혹은 개인적인 용무로 노트북을 보고 있으면 여지없이 말을 걸던 미스터김.


"한 잔 하실래요? 무슨 맥주 좋아하세요?"

"아 제가 술을 안 해서요..! 괜찮습니다."

"에이- 어차피 맥주 네 캔인데, 그러지 말고 하나 들어요~"

"괜찮아요^^~지금 근무 중이기도 해서! 죄송합니다~!"

(제발 그냥 가주세요...)


미스터김은 슬렁슬렁한 말투와 느슨한 표정으로 몇 번 더 술을 권하다 이내 유튜브 화면에 집중했다. 그의 무안한 눈빛을 느낀 나도 개키고 있던 빨랫감을 급히 개어 세탁실로 얼른 내려갔다. 그다음 날부터는 서로 간단한 안부 인사만 할 뿐.. 솔직히 처음에는 매번 붉은 얼굴로 술을 종용하는 듯하여 꺼려졌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누구든 시간이 허락한 상황에서 가까이에 있다 보면 다양한 면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원하든 원치 않 든 습기가 스미듯 어느샌가 스며든다.


매일 밤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스탭과 손님들에게 말을 걸던 그는 일로 제주를 자주 오는 사람이었다. (아주 긴 시간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무언가를 거래하는 듯했는데, 그게 무엇인진 미궁 속에 있다.) 어느 날 밤, 내가 오후에 돌려둔 이불 빨래를 개러 라운지에 앉아 있었는데, 그날도 미스터 김은 또 홀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몇 번 거절을 한 탓에 내게 부러 말을 걸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딱히 시선을 두진 않았다. (사실 말을 걸까 두려웠던 것 같다.)


조금은 숨 막히는 느낌이 들었던 고요한 밤의 라운지, 그때 미스터 김에게 전화가 왔다.


"어어- 아빠 지금 밥 먹고 숙소 들어와서 쉬고 있어~ 엄마는?

어- 아니, 오늘 밥 잘 먹고- 좋은 데서 잘 쉬는 중이야! 딸내미는 밥 먹었는가?

그래 핰하흐- 아빠 내일모레 저녁쯤 들어갈 거 같네. 응 ~!"


그의 전화 내용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다.

1) 그날따라 저녁 라운지에 손님이 없었다는 것과 2) 음악을 틀지 않았던 밤이었다는 것, 3) 마지막으로 내가 알던 그의 모습 말고도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이자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물론 원치 않은 술을 여러 번 권한 그도 그의 일부였지만 사실 그 일도 내가 본 며칠이 전부이니, 매번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맥주타임을 갖기 전 편의점 레토르트 덮밥으로 끼니를 해결한 상태였다. 조용한 로비 안, 본인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스탭 한 명을 앞에 두고 혼밥과 혼술을 끝낸 그는 꽤나 적적해 보였음에도 딸과의 전화 속 목소리는 밝게 유지했다. 나는 그가 딸에게 말하고 있던 '꽤나 멋진 저녁'을 함께한 유일하고 무심한 목격자로서, 듣지 않았어야 할 이야기를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화 내용이 내게는 좀 부대꼈기 때문이다, 미스터김이 아니라 나 때문에. 나는 미스터김을 처음 본 날, 그가 원치 않은 술을 세네 번 권했다는 이유로 그를 차단했다. (물론 손님과 스태프의 선안에서 보여야 할 역할을 최선을 다했다) 그는 언제나 다른 손님에 비해 내 맘속에서 한 뼘 정도 멀었다. 단 한 번의 좋지 않은 첫인상 때문에 너무 이른 빗장을 친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미스터김 쪽을 보지 않은 채 빠른 속도로 빨래를 개어 숨어 버렸다. 이런 생각이 든다 한들, 그는 또 떠날 손님이고 나 역시 40일 남짓 있는 스탭이니 달리 어쩔 도리는 없긴 하지만..

.. 그를 떠올릴 때면 붉은 얼굴과 함께 옅은 죄책감과 부끄러움 같은 것이 함께 스멀스멀 올라온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워록'> 누구든 두 번의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 역시 누군가 단 한 번의 대화로 판단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이 내 입장에서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든 두 번의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요즘은 사람들을 대할 때, 해변가의 사람들을 멀리서 보듯 보려 한다. 어느 정도 멀리서 크게 보려 하면 조금은 귀엽고 알록달록해 보이니까. 딱 그 정도 유연하고 관대해지고 싶다. 나도 누군가 딱 그 정도로 봐주면 어떨까 해서.




혼자 온 어린 어른, 16 서현 씨



빽빽하고 윤이나는 앞머리에 밤톨 같은 작은 머리, 얼굴 위 보송보송 솜털, 언제나 조금은 수줍게 발그레한 뺨

서현 씨의 첫인상은 '어머, 너무 애기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현 씨는 이제 16살이 된 진짜 '애기'였다. 당연히 보호자분과 함께 찾았을 거라 생각하고 정보란을 열람했지만 그녀는 혼자 체크인을 한 상태였다. 혼자 일주일이나! 여기까지 알고 나자 두 번째 든 생각은 '집이 굉장히 개방적이구나!', '멋있네- 중학생이 무섭진 않나?'였다.


두 밤이 지난 후 알게 된 건 서현 씨가 곧 홀로 캐나다로 유학을 갈 예비 유학생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혼자 생활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제주에 왔다고 했다. 이를테면 '독립성 기르기 원정훈련'이랄까? 어린 나이에 혼자 숙소에 머무르는 서현 씨를 보니,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아직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니 해가 진 후 오지 않으면 공연히 입구 쪽을 바라보곤 했다. 서현 씨는 내 짧은 걱정과 오지랖이 무색하게 일주일 동안 제주의 곳곳을 잘 다니고, 누구보다 씩씩했다. 그뿐인가? 저녁이 되어 게하 라운지에 도착하면 그날 무엇을 보고 어디를 갔는지 외국인 손님과 우리에게 신난 목소리로 이야기해 줬다. 숫기 없고 말 수 없는 중학생 여자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서현 씨는 어딘가 단단하고 옹골찬 친구였다. 평소에는 말이 없었지만 즐겁고 좋았던 일 혹은 감사한 일은 잊지 않고 나눠줬다. 거의 모든 어린아이들이 그러하듯 과자와 간식을 즐겼는데, 그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꼭 먼저 권하고 나누기를 좋아했다. 나 역시 서현 씨에게 받은 초콜릿과 에너지바가 여럿이었다. 간식을 나누거나 앞장서 인사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너무 예뻤던 서현 씨. 그녀를 대할 때면 마음이 온통 싱그럽게 느껴졌다. (인류애가 차오른다는 말이 이런 걸까?) 어린 친구였지만 맑고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참 많은 친구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내 생각에 방점을 찍게 한 귀여운 일화가 또 있다. 일주일의 시간이 흐른 후, 서현 씨가 아침 비행기로 체크아웃을 한 날은 내가 근무하는 날이었다. 전 날 이미 작별인사도 하고 유학생활도 꼭 잘할 거라는 이야기를 전했지만 서현 씨가 없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방정리를 해야 해서 서현 씨가 쓰던 방에 들어갔는데... 글쎄, 서현 씨 침대에 조그만 쪽지와 과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침 등산 차 자리를 일찍 비운 옆 손님 침대 위에도 비슷한 쪽지와 과자가 놓여 있었다. 흑흑)



' 언니,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너무 재밌는 일주일이었어요. 아침에 일찍 나가느라

직접 인사 못해서 이렇게 과자랑 쪽지 두고 가요.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



이른 아침 쓸쓸한 맘으로 들어선 방에서 끝가지 따사로운 인사를 남겨준 서현 씨. 침대 커버를 벗기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와 행복하게 이불 정리를 할 수 있었다. 힘들었던 아침 베딩이 이렇게나 따뜻하다니, 역시 다정함은 이길 재간이 없다. 온기 어린 과자를 만지작 거리며 어린 어른, 서현 씨의 미래를 응원한 하루. 그날은 모든 시간이 꽤 행복하게 흘러갔던 것 같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을 머물며 비교적 많은 사람들을 스쳐갔지만, 서현 씨의 앳된 얼굴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아마 그녀 특유의 따뜻하고 단단한 마음이 지금도 내 마음에 훈기를 지피기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 이걸 못 볼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건강하게 지내고, 안전하게 공부하고 와 : ) 나중에 꼭 보면 좋겠다!

어디서든 행복해!! >






[ *알림- 시리즈로 나오게 될 '사람들' 시리즈는 모두 가명으로 말씀드리며, 구체적인 신상 이야기가 나올 시에도 역시 정보(직업, 나이, 성별 등)를 조금씩 바꿔 적습니다. 사람들을 특정할 수 없게 적는 점 양해 바랍니다 :) ]


사람들 시리즈는 두 편 정도 더 나올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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