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 4

먹고 걷고 이야기하라, '제임스', 태국과 제주까지- '바다'

by 서울쥐

Eat Walk Talk (먹고 걷고 이야기하라) 제임스 아저씨





190cm는 되는 장신에 노란 머리와 신체의 일부 같던 아웃도어룩. 중년의 제임스 아저씨는 약 일주일정도 우리 게하에 머물렀던 외국인 손님이었다. 처음 제임스와 인사했던 날, 내가 어디 나라분이세요?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었더니


"태어난 건 미국이지만, 전 세계를 돌며 살았기에 어디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요."

(물론 영어로 말했지만 자막 생략^^..)라는 쿨한 대답을 내놓았다.


당연히 한국어를 하나도 못할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우리나라 어느 대학의 교수님이었던 제임스.

한국살이 13년 차라 어느 정도의 한국어를 알고 있다고 했다.(고 했지만 계속 영어를 쓰셨다.) 미국에서 태어나 세계 곳곳을 다니고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살고 있는 제임스 아저씨는 경험한 것도, 아는 것도 무척 많았다. 교수님이셔서 그랬는지, 살아온 세월이 우리 부모님만큼이나 쌓여 그랬을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들려주길 즐기던 제임스 아저씨. 매일 올레길 20km를 걷고 와서는 라운지 소파에 몸을 털썩 누이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하다 가시곤 했다. 처음엔 동네 식당을 묻거나, 피자 주문 방법을 묻는 스몰토크로 시작했지만 둘 째날부터는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루틴화 되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지나 싶었지만, 내 입장에선 대학 교수님에게 공짜 영어회화를 받는 거라 생각하니 좋았다. 그리고 제임스 아저씨 역시 홀로 찾은 제주에서 약간의 적적함을 달래는데 내가 꽤나 도움이 됐을 거라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는 일주일 내내 서로의 말상대가 되어 온갖 대화를 나누게 됐다.


대화 주제는 매일 비슷한 듯 달랐다. 빠지지 않는 토픽 첫 번째는 매일 어떤 코스를 걸었는지였는데, a코스는 길이 험난하고, b코스는 유독 경관이 수려했고, c코스는 너무 길어서 다리가 아팠다 등 걷는 이야기와 중간중간 빠질 수 없는 맛집 이야기 정도 였다. 특히 맛집 이야기를 할 때면 구글과 카카오맵 어플을 열고 가게 검색을 한 다음 내가 그 식당을 저장하는 모습을 보며 만족해하셨다. (ㅎ_ㅎ)


두 번째는 이제까지 다녔던 여행지 이야기였다. 제임스 아저씨는 공부와 교수 생활을 하며 여러 나라를 살아보신 듯했다. 거의 세계지도를 두고 안 가본 나라를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내가 다녀온 나라들을 이야기했더니, 모든 나라마다 무엇이 좋았는지 묻고 본인이 좋았던 것들을 또 알려주셨다. 나는 제임스에 비해 정말 적은 곳을 다녔지만 여행을 다니며 느낀 점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사는 방식에 정답은 없다는 것, 더 넓은 곳으로- 많은 사람들로 내 지경을 넓혀 볼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본질적으로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것 다 비슷했다는 것 정도? 제임스와 마주 앉아 '맞아요 맞아!' 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어도 생김새도 나이도, 살아온 방식도 모두 다르지만 비슷한 감정으로 공감하고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특히 우리 부모님 나이와 비슷한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유쾌하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꽤나 신선한 경험이 됐다. 사실 이전에는 이런 어른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이렇게 길게 이야기 나눌 일도 별로 없었다. 또 경험해보지도 못한 세대차이를 미리 걱정하며 그런 자리를 피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거기다 외국인 아저씨라니..! 아마 제주 게스트하우스가 아니었으면 제임스도 나도 하루에 한 시간 반씩 일주일이나 서로 같은 상대를 두고, 이야기할 일이 없었을 거다. 스탭과 손님으로 만난 데다 지내는 곳도 같아 도망갈 곳도 없고, 밤의 제주는 적적했으니까.


세 번째는 제임스 아저씨의 가족과 고양이 이야기. 두 딸과 아내, 한 마리의 고양이의 가장인 제임스가 혼자 제주를 찾은 이유는 58번째 생일을 혼자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홀로 하루 종일 걷고 맛집에서 맛있는 끼니를 챙기는 이 여행이 너무 만족스럽고 했던 제임스. 집에 갈 시간을 미루고 싶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허허 웃었지만, 사실 그는 매일 가족과 고양이 이야기를 했다. 제주도 이야기와 여행지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늘 대화의 종착역은 가족이야기. 그의 고양이 라일라 사진을 30장은 넘게 본 것 같다.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제임스 아저씨의 두 딸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제임스아저씨가 떠나기 전날쯤엔 내적 친밀감까지 생겼었다. (거짓말이 아닌 게 제임스 아저씨를 보면 거의 인사처럼, "What's your plan for today? 와 "How's Jane <제임스의 딸>?"을 함께 말하곤 했다. )


매일 가족 이야기를 해서 내가 "가족 너무 보고 싶겠어요. 생일인데, 가족이랑 보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면 "내 방 침대가 조금 그립긴 하네요.ㅎㅎㅎ" 괜스레 말을 돌리던 제임스. 가족이랑 조금 멀어져 홀가분하다고 했지만 그의 모든 대화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제임스 아저씨는 이렇게 매일 고양이와 가족 이야기를 하며 올레길을 거의 다 패스했고,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나는 덕분에 영어가 조금 늘었었고, (지금은 아니다) 어른과의 대화- 특히 문화권이 다른 분과의 대화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없어졌다. 지금쯤 학교에서 열강 하며 또 캠퍼스 언덕을 오갈 제임스 아저씨와의 저녁 대화가 가끔 그립다.



치앙마이에서 제주까지 인연의 파도, '바다'



바다를 처음 만난 것은 새해맞이 차 떠났었던 태국 여행에서였다. 태국은 공연하는 바(Bar)가 매우 많은 데다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가격이 정말 저렴했다. 얇은 지갑으로도 좋아하는 재즈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니- 거의 천국이었다. 그렇게 매일 밤 방콕에서 재즈와 낭만에 취했던 나는 치앙마이에 온 첫날부터 또 재즈바를 찾았다. 현지인은 물론이거니와 외국인, 특히 한국인에게 유명한 것 같은 치앙마이의 재즈바가 있었는데 일찍이 한국인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블로그의 힘) 나 역시 앞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오픈 시간대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오래지 않아 사람들이 가득 차서 문 밖까지 둘러싸고 있었다. 일찍 오길 참 잘했다! 맘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바다가 나타났다. 이미 앉을자리가 없는 바 스테이지 앞에서 젊은 외국인과 함께 두리번거리던 바다. 공연이 곧 시작하는데 계속 앞에서 곤란한 듯 서성이던 바다를 지켜보다 말을 걸기로 했다. 내 자리가 벤치형이라 좁게 앉으면 셋이 앉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cuse me! Do you mind..., If you want, you guys can sit here.."

매우 소심하게 내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는데, 곧바로 "Oh-Thank you ㅠㅠ!!!, 혹시 한국인이세요?"

바다는 옆에 있던 외국인 친구를 함께 끌며 내 자리에 함께 앉았고, 바로 우리나라말로 한국인이냐 물었다.

그때부터 우리의 기묘한 인연이 시작됐다.


바다는 뭔가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알고 보니 함께 온 외국인 친구 역시 당일에 만난 프랑스 친구였다. 인싸 중 핵핵인싸. 식당에서 '어쩌다' 프랑스 친구와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재즈바에 온 것. (ㅋㅋㅋ) 프랑스 친구는 대학교 막학기 학생이었는데, 래퍼로도 활동하는 어리고 멋진 친구였다. (이 친구도 아주 재밌음) 핵인싸였던 바다 영향으로 재즈 공연을 본 하루 만에 급속도로 친해진 우리는 내가 치앙마이를 떠나는 날까지 매일 보는 사이가 됐다. 매일 따로 또 같이 일정을 보내고, 늘 같은 재즈바에 모여 공연을 보며 밤을 마무리했던 아름다운 나날. 음악 취향이나 음식 취향도 비슷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하는 일도 비슷했다. 한국으로 가던 날, 제주 사람이었던 바다와 인천 사람인 나- 우리 둘은 꼭 한국에서 보자는 말을 하며 굿바이 인사를 나눴다. 아니 그런데 이렇게 내가 제주에 빨리 올 줄이야...? 치앙마이에서 헤어지고 정확히 11일 만에 내가 제주에 온 것이다.


"바다, 저 제주에 왔어요! 한 달 넘게 있다 갈 것 같아요!"

"어머어머 웬일이야!! 만나요 만나!!"


머지않아 제주에서 상봉한 치앙마이 크루 둘. 게하에 머무는 동안 여러 일로 바쁜 바다가 시간을 내주어 네 번이나 봤다. 제주에서 태어나 모든 삶을 제주에서 보낸 제주 성골인 바다는 이곳에서도 핵인싸 중 인싸였다. 그냥 동네 식당을 가도 지인을 만나 인사하고, 핫한 식당이나 카페도 지인 사장님이 하는 곳. 그 덕에 함께 있던 나도 덩달아 제주 사람들과 알게 되고, 서비스 음식을 받아먹곤 했다.


바다가 있었기에 제주 생활이 두 세배는 풍성했다. 사실 뭘 하지 않아도 머무는 곳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위안이 됐다. 아무 연고 없는 제주의 장기 여행객 입장으로 그칠뻔했는데, 바다 한 사람덕에 친구 동네에 놀러 온 듯했으니까. 내가 제주에 내려갔을 당시 하는 일이 정말 바빴음에도 시간을 쪼개고 반갑게 맞이해 주어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하다. 환영해 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오랜 시간 머무는 일은 아무리 제주라 해도 좀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늘 든든했다. 우연히 외국 여행에서 만난 바다를 제주 살이에서까지 만나게 되고, 육지에 온 지금까지 만난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사람의 인연은 우연을 가장해 다가와 나도 모르게 뿌리를 내린다. 올해 만난 인연 중 가장 신기하고 감사한 인연. 이 우정의 뿌리를 오래오래 이어가고 싶다.


다음에 제주를 가면 여행지 제주가 아닌, '친구 바다가 사는 곳'이라 생각하고 갈 것 같다.









[ *알림- 시리즈로 나오게 될 '사람들' 시리즈는 모두 가명으로 말씀드리며, 구체적인 신상 이야기가 나올 시에도 역시 정보(직업, 나이, 성별 등)를 조금씩 바꿔 적습니다. 사람들을 특정할 수 없게 적는 점 양해 바랍니다 :) ]



제주 게하 안과 밖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는 여기까지!

다음 편에는 '제주 책방 올레' 이야기를 조금 풀어내려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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