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의 힘으로 버틴 제주 40일
낭만적이리라 꿈꿨던 제주에서 그리 낭만적이지 않은 나날을 보내게 되자 내 몸과 마음은 조금씩 허름해졌다. 2% 부족한 것만 같은 일상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나름의 자맥질은 국을 끓이는 것이었다. '여행 같진 않은' 여행의 하루를 마치고 맞이한 어제 같은 오늘이 되면, 나는 여지없이 부엌으로 갔다. 되직한 된장을 풀고, 두부와 파를 썰고, 국간장을 넣은 된장국을 국자로 휘휘 저으면- 구수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메웠다. 어느 때는 매콤한 순두부찌개, 또 어떤 날은 칼칼한 콩나물 김칫국 등 따뜻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냄비 밖을 나와 라운지를 채우면 어느새 내 허름한 마음도 다시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공기가 차가워지거나, 몸이 힘든 날엔 여지없이 국물요리를 찾아서, '어린애가 입맛이 할머니야'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이른바 '할머니 입맛'을 지녔다는 나뿐 아니라, 국물요리는 누구든 마음이 힘들 때 응당 찾는 요리 아닐까? 따뜻한 국에 하얀 밥을 말고 김치를 얹어 한 끼를 잘 끝내고 나면 허전한 위장은 물론이고 웬만한 구멍 숭숭 마음도 보글보글 차오른다. <내 영혼의 닭고기수프> 같은 책도 있는 걸 보니, 국물요리가 마음을 채우는 건 만국 공통인 것 같다.
그래서 제주 40일 동안 내 위장과 영혼을 고루 찰지게 채워준 국물 몇 가지와 그날의 기억들을 풀어보려 한다.
제주 웰컴 푸드였던 김치 콩나물국, 오겹살이 먹고 싶었던 어느 날의 순두부찌개, 파뿌리를 잔뜩 넣어 예술 육수를 우려낸 된장찌개까지 :)
제주 게스트하우스에 처음 도착한 날, 한 밤에 도착한 게스트하우스는 모든 게 낯설었다. 한 달을 넘게 지내게 될 공간을 처음 마주했고, 역시 머무는 내내 같은 방을 쓰게 될 스태프분들도 처음이었다. 어색한 맘을 애써 숨기며 방에 들어가 두 개의 캐리어를 주섬주섬 정리하고 나오니, 뜨끈한 국물이 당겼다. 어색하고 건조한 마음에 훈기가 필요했던 것.
냉장고를 여니, 스탭용으로 냉장고에 있던 김치 한 포기가 보였다. 집에서 가져온 다시팩을 꺼내놓고, 파와 콩나물을 사 왔다. 시원한 김치를 숭덩숭덩 썰고, 김치국물 반 컵정도 꺼내뒀다. 냄비에 넣어둔 다시팩이 끓어오기 시작하면 준비해 놨던 김치를 조심스레 넣었다. 간이 부족할까 하여 국간장도 두 스푼 넣는다. 콩나물, 파를 넣고 한소끔 더 끓여내면 끝.
재료도 준비도 과정도 모두 이렇게 간단할 수 없다. 쉬워도 너무 쉬워서 이게 맛이 있을까...? 생각하며 한 입 맛을 보면 김혜자 선생님의 '그래, 이 맛이야!'가 띵 하고 떠오르는 맛!
얼른 찬 밥을 꺼내 국 한 그릇을 퍼내어 급히 말았다. 어떤 반찬도 없이 갓 끓여낸 국과 밥 딱 하나. 그렇지만 그거 하나로 너무 완벽한 저녁을 완성했었다. 낯선 환경에서 부스스한 마음을 얼큰한 국물에 기대어 제주의 첫날을 따뜻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따뜻한 국물을 다른 룸메이트 분들과 나누며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쓸쓸했던 어느 날 돼지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다. 여긴 제주도. 흑돼지가 유명한 곳 아닌가. 쫀득쫀득 비계살에 말캉하고 고소한 살코기가 섞인 오겹살이 너무 먹고 싶은 날이었다. 슬프게도 우리 게스트하우스는 고기나 생선은 구워 먹을 수 없어서 고기를 사 와도 먹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근고기를 판매하는 식당을 찾자니, 혼자 고깃집에 가서 먹는 것도 조금 머쓱하고 5만 원 돈을 내는 근고기 가격도 부담됐다. 그. 래. 도 너무 고기가 먹고 싶었다. 마음이 저기압이니, 고기 앞으로 가고 싶을 수밖에.
흑돼지 오겹살은 아니지만, 흑돼지 앞다리살을 넉넉히 넣은 순두부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국거리 고기와 순두부, 양파, 청양고추를 사서 오는 길이 어찌나 즐겁던지. 돌아오는 내내 길에서 혼자 온갖 노래를 흥얼거렸다.
사온 야채를 손질하고, 냉장고에 있던 남은 버섯이나 햄 등 냉장고를 탈탈 털어 함께 둔다. 고춧가루, 간장, 다진 마늘, 설탕 등을 넣어 다진 양념을 만들고 고기는 참기름과 콩기름을 섞어 슬슬 볶았다. 점점 고소한 참기름과 돼지고기 기름이 섞여 나와 온 부엌을 채우기 시작한다. 고기 겉면이 하얗게 변하면 만들어둔 다대기 양념을 넣어 고기를 들들 볶는다. 붉은 기름이 나오며 고소한 고기 볶음이 반쯤 익으면 적정량의 물을 붓는다. 순두부를 넣어야 하니 물을 조금 덜 넣는 게 포인트. 보글보글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리면 순두부를 쏟아 넣는다. 그리고 다시 한소끔. 후추를 뿌리고 냄비 한편에 계란을 깨뜨려 넣는다.(절대 젓지 않는다)
고춧가루를 한 스푼 더 넣고, 빨간 국물 사이 익은 돼지고기를 건져 먹어본다. 구운 돼지고기 저리 가라! 꼬숩고 구수한 돼지고기가 살캉살캉- 아, 이거지. 하얀 밥 위로 반숙이 된 계란을 건져 톡 깨뜨린다. 노른자가 밥 사이에 스며들면 짭짤하고 빨간 국물을 몇 스푼 넣어 비벼 입에 넣는다. 마침내 쌀쌀한 온도와 쓸쓸한 마음도 온전해진다.
참고로 이 메뉴는 모든 게하 스태프분들이 인정하는 베스트 국물 요리! 모두의 밥도둑 역할을 톡톡히 했던 국물이라, 자부심이 있는 메뉴다. 요즘도 마트에서 순두부를 보면 얼른 돼지고기와 함께 장바구니에 넣어 보고는 한다.
“이게 다 뭐야?”
전 날 이마트 몰에 파를 주문했는데 ‘대형 흙대파 두 단’이 왔다. 놀란 맘에 주문내역을 확인하니, 내가 두 단을 주문한 것이다. 캄캄한 방에서 졸린 눈으로 자기 전 주문을 해서 그랬을까? 주문 개수를 잘못 보고 두 단을 사버렸다. 많아봤자 두어 개의 파가 올 거라 생각했었는데... 눈앞에 놓인 파는 슬쩍 봐도 20개는 넘어 보였다. 정말 두 팔을 합친 것처럼 거대한 파 두 단! '당장 이걸 어쩐다' 당황한 마음으로 일단 파를 개수대 쪽으로 가져갔다. (으쌰. 정말 무겁다)
흙을 덜어내고, 노끈을 풀었더니 파가 우르르- 두 개의 개수대가 모두 가득 찰만큼 풍성하다. (당황을 넘어 황당) 급식실 느낌이 낭랑한 대용량 파를 보며 한숨을 내쉬다, 결국 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나는 가위를 들었다. 파뿌리부터 잘라내자. 뿌리를 자르는데, 양이 많아 그런지 파뿌리도 한가득이었다. 모두 버릴까 하다 어린아이 머리통만큼(파뿌리를 모아두니 진짜 머리 같았다.) 수북한 파뿌리가 아까워서 국물을 내어 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먹을 국도 다 떨어졌는데 잘 됐다! 파뿌리 가득 육수로 된장찌개 끓여봐야지!'
흙 한 톨도 들어갈까 물로 열 번은 넘게 씻고, 하얗게 변한 풍성한 파뿌리를 다시팩 하나와 함께 넣어 국물을 내기 시작한다. 물이 끓자 부글부글 국물이 우러나면서 진한 육수로 변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노르스름한 육수 빛을 띠며 끓자, 파뿌리와 다시팩을 건졌다. 이제야 모든 소임을 다 한 파뿌리는 쓰레기통으로 보내진다. 이제 본격적으로 찌개를 끓일 차례! 냉장고에 들어있던 사제 된장을 크게 두 스푼 퍼내어 작은 국물용 채에 슬슬 풀었다. 된장은 한 번에 확 풀어지지 않으니, 달래듯 살살 풀어내야 한다. 된장이 뽀얗게 퍼져가면 국간장도 넣고, 두부와 청양고추, 양파도 입맛대로 넣는다. 국물과 야채에 맛이 들만큼 끓여내면 끝. 고춧가루와 청양고추로 인해 매콤해진 된장찌개에 푹 익은 애호박을 으깨 한 입 넣었더니 눈이 질끈 감기는 맛. 너무 맛있었다. 확실히 두 주먹 파뿌리의 힘이 느껴지는 맛이다. 잘못된 주문으로 우르르 파무덤에 둘러싸여 순간 눈앞이 아찔했었지만, 이렇게 국물 맛이 끝내주는 된장찌개라니!
오히려 좋아. 사실 지금 돌아보니, 제주의 일상들도 다 이 된장찌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