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꿈은 다정한 사람 되기입니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다정함에 대하여.

by 서울쥐


누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묻는다면

나는 늘 '다정한 사람'이라 답했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냐고 물어도

다정한 사람이라 답한다.


다정을 좋아하는 건 타고난 마음과 함께 쉽지 않은 노력을 동시에 요하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아무나 가질 수 없어 희귀하다.


(주변에 있는 사람 중 다정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려보면 알게 된다.

다정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셋 이상

말하기 어렵다. 사실 두 명만 되어도

괜찮은 인간관계망이라 할 수 있다.

다섯 이상 떠올릴 수 있다면, 부럽다 진심으로.)


'다정'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정이 많음. 또는 정분이 두터움'이라는 정의가 나온다.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고 실제로 '정이 많고, 정분이 두텁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떻게 전달되나. 삶에서 스쳐간 사람 중 다정하다 여겼던 사람을 떠올려봤다. (이 글을 보는 분들도 주변의 다정한 사람을 떠올려보시길) 나의 경우엔 스물세 살 즈음 만났던 어떤 언니가 떠올랐다. 편의상 윤희 언니라고 하겠다. 윤희 언니는 내 인생이 가장 바닥을 쳤을 무렵 나를 지탱했던 동아줄 같던 사람이었다. 나의 바닥을 아주 짧게 요약하자면, 팍팍했던 형편에 준비했던 두 번의 미대 입시가 실패로 끝나고 다른 길을 알지 못해 세 번째 입시를 준비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감정적인) 바닥이었다.


당시 내 자아는 너무 높았고 높은 자아 대비 현실은 처참하여 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상처였다. 자연스레 사람 만나는 모임 자체를 피했는데, 윤희 언니는 가끔씩 내가 공부하는 학원가로 간식거리를 들고 왔다. 공부가 잘 되냐며 간식을 전해준 언니를 그냥 보내기 미안해 카페에 들어서면, 언제 말 안 하던 아이였나 싶을 만큼 두 시간은 넘게 말했다. 고해성사하듯. 어느 때는 독백하는 배우처럼 말하다 감정에 복받쳐 오열을 하기도 했다. 윤희 언니는 엄마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게 하는 힘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잘 듣는 것’이었다. 난 아직도 그렇게 잘 듣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눈을 보고 단어 하나라도 놓칠까 온 신경을 다 해 몸을 기울여 내 숨소리까지 집중하는 언니의 눈을 마주하면 내 마음속 깊은 어딘가, 말로 토해낼 수 없는 깊은 감정까지 읽히는듯했다. 언니는 내 말이 장황해져도 끝까지 다 들어주고 함께 울어주기도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윤희 언니와 대화를(사실은 나만의 고해성사) 마치고 독서실로 다시 돌아가면 텅 비었던 마음속 용기가 움트고,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던 내게 언니는 존재 자체만으로 위로였다.


상황이 힘에 부쳐 빡빡한 모래 속에 잠긴 듯해도 다정한 사람 한 명만 있다면 그 사실 하나로 오아시스가 되어 삶을 연명할 수 있다. 내가 그랬듯. 인생의 바닥에서 다행히도 멀어졌다 느낀 어느 해, 어떤 순간 깨달았다. 사람은 사람을 죽게도 하지만 살게도 한다. 다정한 사람은 늘 후자, 살리는 사람 편에 있다.


다정함은 실로 위대한 것이다.

나는 잘 들어주는 행위로 다정함의 위대한 힘을 느꼈고 배웠다. 무언가 바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다 해도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 누군가의 말을 전심으로 들어주는 것. 내게 늘 다정했던 사람, 윤희 언니를 통해 배운 것이다. 그 이후로 잘 들어주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왠지 꽤나 다정할 것 같다.’ 생각하며 경외감을 느꼈다. 언젠가부터 잘 들어주는 것이 다정함을 가리는 척도가 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다정의 정의에 비추면 잘 듣는다와 정이 많다는 게 의미상으로 완전히 합치된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다정의 반대말, '무정의 정의’를 살펴보자. 무정의 정의는 '쌀쌀맞고 인정이 없음. 남의 사정에 아랑곳없음'이다. 자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가 자신의 시간을 내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리 없다. 나는 이 정의를 보고 다정함에 대한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 (다정한 사람의 특징이 잘 듣는 것이라는 것) 나의 다정함을 느끼는 척도는 ‘잘 듣는 것’이다. 다정하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희귀하다 느끼는지 공감이 가시는지?


주변에 잘 듣는 사람이 있는가?

당신이 어딨는지 어떤 모니터 앞에서

이 글을 보는지 알 수없지만

감히 당신의 대답을 추측해보겠다.

아주 많아도 세 명이상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든 교만한 추측은 틀려야 제 맛이니,

세 명이상 열거한 당신이라면,

부럽다 다시 진심으로.)


내가 이렇게 교만한 추측을 감히 해 볼 수 있는 것은 일단 (이런 글을 적고 있는 나를 포함하여) 내 주변에도 셋은커녕 두 명을 말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잘 듣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정한 사람이 '꿈'씩이나 되고,

심지어 이런 글을 적고 있는 나지만

부끄럽게도 늘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자

주체로서 살아간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주인공들의 사회'인 것이다.

만약 모두가 주체로서의 자신만을 고집한다면 안하무인, 독재자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일련의 교육을 거친다. 사회화 과정을 거쳐 그나마 길러진 사회성을 탑재한 우리가 이렇게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본성, 그러니까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자아가 불쑥불쑥 적절치 않게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자기 말부터 늘어놓으려는 모습이다.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선 본인 위주의 대화가 이루어지길 바라고 그래야만 대화 전체가 재밌다고 느낀다. 그런데 잘 듣는 사람은 이 본성을 잘 참는다. 그건 마치 가장 맛있는 파이를 아이에게 양보하는 마음 혹은 힘들지만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자 하는 수련자의 심지와 같다. 잘 듣는 사람들은 우아하다.

파이를 양보하는 것도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도 다 후천적인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잘 듣는 이들을 존경한다.


나의 꿈은 다정한 사람이다.

그래서 잘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름답고 희귀한 그 속성을 노력해서라도

꼭 쟁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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