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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 Jan 09. 2022

풍경 너머의 사람

1. 런던에서 로마까지

잃어버린 큰 가방


 재작년 초가을, 나는 이탈리아에 있었다. 런던에서 석사 논문과 졸업 전시를 무사히 마친 뒤였다. 논문이 통과되었고 전시도 끝났다는 안도감이 몇 달 동안 긴장감에 휩싸였던 몸 전체를 감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헛헛함이 마치 묵직한 추처럼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반복적으로 내 안을 왔다갔다 하는 것이 느껴졌다.

 

    "졸업 후에 너희 나라로 돌아가니?"


 졸업 전시 당일, 수많은 사람들과 취재진으로 가득 찬 전시장에서 잠시 나와 학교 계단 위에 앉아 바깥바람을 쐬고 있을 때, 나를 따라 나온 클레어가 물었다.  클레어는 나보다 두세 살이 많은 중국인이었는데, 영국에서는 스스로 지은 영어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 천천히 한 모금을 빨아들인 뒤 고개를 돌려 내뱉는 숨을 선선히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날려 보냈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반대 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코로 느껴졌다.


    "응. 아마도 그럴 것 같아. 그런데 그전에 여행을 하려고."

    "그래? 좋은 생각이네. 어디로 갈 거야?"

    "이탈리아. 한 번도 안 가봤거든."

    "이탈리아! 나도 아직 안 가봤는데. 정말 좋겠다."

    "응. 기대 중이야. 너는 어디로 가?"

    "나는 다시 중국으로. 여기서 석사 졸업을 하면 상해에서 살 수 있거든. 나는 원래 상해 출신이 아니어서, 앞으로 상해에서 취업하고 생활하려면 이렇게 해야 돼."

    "정말? 몰랐어."

    "나라에서 정한 거라서... 사실, 나도 너처럼 돌아가기 전에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아프시다고 해서 귀국을 서두르게 됐어. 병간호할 사람이 나밖에 없거든."


 클레어는 왼 손에 쥔 담배를 바닥에 톡톡 두 번 가볍게 털고는, 다시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 애의 옆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순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진심으로 어머니의 쾌차를 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맙다고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고민이 많지만 잘 해낼 거야. 취업도, 병간호도, 앞으로의 삶도."

    "응.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너도,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

 

그 애는 거의 다 타버린 담배를 손에서 툭 떨어뜨린 뒤 발로 비벼 끄더니, 나를 보며 지그시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다시 돌아가자."


 클레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전시장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문득, 유독 낮은 소리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손에 반투명한 연두색 칵테일을 한 잔씩 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간간히 웃음을 터뜨렸고, 그럴 때마다 손에 든 잔에 담긴 액체가 찰랑 흔들렸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잘 손질된 밝은 빛깔 머리카락 위로 높이 솟은 하늘은 무심하게 청명했다. 매일 드나드는 교정의 풍경이 지나치게 선명한 해상도로 눈에 들어와 나는 불현듯 낯선 감정을 느꼈다. 시선을 돌리니 친구는 어느새 저만치 앞으로 가 멀어져 있었다. 발걸음을 다시 재게 움직이는데, 공중을 이리저리 떠돌던 희미한 담배 냄새가 순간 코 끝을 스쳤다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며칠 뒤, 석사 기간 동안 세 들어 살던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남은 모든 짐을 캐리어 두 개에 나눠 싼 뒤, 비행기에 올라탔다. 런던 발 밀라노 행 비행기였다.  이 주 동안 이탈리아 북부부터 남부 쪽으로 내려오면서, <밀라노-베네치아-피렌체-아시시-로마> 순서대로 여행할 계획이었다. 일주일 동안은 앞의 세 곳을, 나머지 일주일은 온전히 로마에서 보낼 요량이었다. 평소에도 별다른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여행을 다니는 편을 선호하기 때문에, 교통편과 각 지역에서 묵을 숙소 정도만 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밀라노 공항에 도착한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런던에서부터 들고 온 캐리어 두 개 중 큰 것을 수하물로 부치고 작은 것은 비행기에 들고 탔는데, 큰 캐리어가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공항 내 고객 지원 코너의 직원은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하더니, 한 시간 반이나 지난 후에, 지금 당장은 캐리어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내 신상 정보를 적어 놓고 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기다림에 지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받아 든 서류의 빈칸을 채운 뒤 캐리어를 찾으면 꼭 연락해달라고 강조했다. 그러자 직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말한 뒤 재빠르게 다음 고객을 호명했다.

   

 애초에 일정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온갖 중요한 짐이 들어 있는 캐리어를 여행 첫날부터 분실하는 일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였다.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공항을 나서며 첫 번째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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