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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 Jan 16. 2022

풍경 너머의 사람 2

2. 밤에 걸은 거리와 잠든 사람들

밤에 걸은 거리와 잠든 사람들


밀라노에서 묵을 숙소는 센트럴 역 인근에 위치한 한 호스텔이었다. 일박 이일의 짧은 일정인 데다가 예산이 아주 넉넉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위치가 좋고 가격이 합리적인 호스텔을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미리 예약해두었다. 문제는 공항에서 행방불명이 된 캐리어를 찾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지하철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오니 이미 해가 다 져버려 거리가 어두웠다는 것이다. 숙소가 센트럴 역과 멀지 않은 곳이라 가는 길에 인적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나는 처음 와 보는 나라의 밤거리를 걸으며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외국에서 또 다른 외국으로 이동했을 뿐, 어느 곳도 내가 나고 자란 나라가 아닌 것은 매한가지인데도, 런던의 밤거리를 걸을 때와는 또 달랐다. 건물의 생김새도, 가로등 불빛에서 나오는 빛의 색깔도, 밤에 살짝 들떠서 저들끼리 떠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이나 옷차림, 쓰는 언어와 말의 높낮이도 전부 낯설어서 모든 감각이 팽팽한 현처럼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작은 캐리어를 한 손에 끌며 빠른 걸음으로 지도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이동했다. 어두웠기 때문에 건물에 쓰여 있는 간판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발을 옮기다, 마침내 찾고 있던 초록색 간판에 쓰여있는 <Best Milan Hostel>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뒤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위 층으로 올라갔다. 밤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호스텔의 복도는 불이 다 꺼져있었고 아주 조용했다. 유일하게 노란 스탠드 불이 켜진 프런트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인사하자, 그는 자신을 마르코라고 소개한 뒤 내게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젊은 남자였고 처음 들어보는 억양이 강하게 남아있는 영어를 썼다.

“용... 선? 당신 이름이 용선인가요?”

“아, 제 이름은 정선이에요. 그냥 정이라고 불러도 돼요.”

“오케이. 정, 한국에서 왔군요. 여행으로 온건 가요?”

“네, 맞아요.”

“좋아요. 잠시만 기다려요.”


그는 컴퓨터로 예약 사실과 숙박비 지불 내역을 한번 더 확인한 뒤, 내게 수건 두 장과 일회용 슬리퍼를 건네주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호텔은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수많은 방들이 나란히 나 있는 구조였다. 마르코는 걸어가면서 주방이며 공동욕실을 지나칠 때마다, 그것들의 사용 시간과 방법을 낮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주방에는 조명을 하나만 켜 두었는지 빛이 은은하게 복도로 새어 나왔지만 거슬리지 않는 정도였다. 안을 슬쩍 보니 남자 셋이 오른편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앉거나 기댄 채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키 큰 남자가 빨간 사과를 손에 쥐고서 과감히 한 입을 베어 먹었고, 다른 한 명은 사과를 손 안에서 던졌다 받아 내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나를 등지고 있었다. 아마 나와 마르코가 그곳을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사과를 손에 쥔 두 명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린 뒤 그곳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계속 걸으니 사람들이 묵고 있는 방 문들이 쭉 자리 잡고 있었다. 문들은 대개 닫혀 있었는데, 개중 살짝 열려있는 것도 있었다. 누군가가 드나들다가 문을 꼭 닫지 않은 것일까. 그런데 열려 있는 틈 사이로 얼마간 실내 풍경이 보였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자고 있었다. 이층 침대가 네 개 혹은 여섯 개씩 나란히 놓인 방에서 전부 다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팔을 침대 헤드 위로 뻗거나 옆으로 누워 깊은 숙면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는 인상을 쓰고 코를 골았다. 그다음 문이 열린 방에서는 대머리를 한 남자가 엎드려서 베개에 코를 파묻고 자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생경해서 남은 복도를 걸어가며 계속 생각했다. 낯선 사람들이 저토록 잠에 깊게 빠져 있는 표정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던가. 그건, 많이 친하지 않은 친구나 연인과 놀러 가서 그들의 잠든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고작 방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작게 열려진 틈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원하지 않았던 풍경과 표정을 보게 되자 기분이 이상해져서 나는 한 발자국 앞서 걸어가는 마르코의 등으로 시선을 고정하기로 했다. 그때, 마르코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닫혀있는 하나의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여기가 당신이 묵을 방이에요. 7-A.”

아,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내가 둥글고 차가운 손잡이에 손을 대자, 그가 옆에서 나직하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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