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는 난해하다. 추상화 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이 다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운데다 이 작품이 수 십억 많게는 수 백억, 수 천억원에 거래된다는 사실은 현대 미술 작품을 마주하는 나를 심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세간에 알려진 작품 가격 때문에 작품에 압도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작품 그 자체가 나에게 주는 에너지와 느낌이 아닌 외부에서 부여한 가치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전시회장에서 추상화를 만날 때 나의 주관적인 느낌보다는 다른 사람의 해석과 부여한 가치에 우선시되곤 했다.
그런데 그저께 뮤지엄 산에 전시된 김환기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드넓고 탁트인 벽에 작품이 하나씩 걸려있었는데 그 공간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
뮤지엄 산이 위치한 원주라는 특성상 서울의 미술관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조용하게 나 혼자 작품들과 마주할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김환기 작품에 둘러쌓여 멍 때리면서 그 공간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벽면에 걸린 그림을 고민하면서 그려내고 있는 김환기 화백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 앞에 한참 서있으면서 심지어 눈물까지 흘린 사람이 있었다고 했는데...
난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김환기 화백이 구현한 넒은 우주와 환상을 잠시나마 상상했던 것 같다.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보다 내가 느끼고 해석하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그날 난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단 그 공간의 공기를 느끼는 것이 집중했던 것 같다.
전시회장에서
무조건 작품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까?
작품보다는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넓은 공간에 나 홀로 있을 때 그 비싼 작품이 나를 압도한다기보다는 내가 그 공간을 소유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공기, 그 순간은 오로지 나의 것이었고 그 작품을 바라보는 존재는 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진이 좋았다.
이 순간만큼은 김환기가 아닌 엄마와 아빠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