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코로나
첫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쏠쏠한 재미도 보고, 슈퍼 호스트로 등극도 되자
자연스럽게 ‘하나 더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 게스트하우스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행동력 넘치는 남편은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를 할 곳을 물색하였다. 그러다 사업하며 알게 된 부동산을 하시는 일본인 사장님을 통해 그분의 건물의 1층~3층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하는 대로 고쳐서 사용해도 된다는 솔깃한 제안과 관광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도, 우리 눈에는 모든 것이 좋게만 보였었다. 그런데 이번 집은 6만 5천 엔과는 쨉이 안 되는 덩치가 커도 너무 큰 집이었다. 1층부터 3층까지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크기도 컸고 월세가 자그마치 70만 엔이었다.
사장님은 시키킹이나 레이킹은 필요 없다고 하셨고 (시키킹은 보증금, 레이킹은 집주인에게 내는 감사금이다/1화 내용 참조) 이런 말도 안 되게 좋은 조건은 일본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남편은 설계도를 가지고 와서 1층은 12명이 들어가는 캡슐식 도미토리로 만들고 2층은 방 2개로 만들어 각각 2인용, 4인용으로 하자고 했다. 3층은 집 전체를 빌려주는 콘도스타일 방으로 총 12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대충 계산해 봐도 한 달 중 1/3만 손님이 차도 월세 70만 엔은 거뜬하게 낼 수 있는 구성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슈퍼 호스트라서 노출도도 높고 리뷰도 좋았기 때문에 잘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남편과 머리 빠지게 고민한 결과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도전해 보자.라는 결론을 지었고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빌려 부족한 자금을 채워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를 진행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공사에 온 가족이 출동했다. 남편은 도미토리용 이 층침대를 나무를 사 와서 직접 조립해서 만들었고 나는 페인트칠을 했다. 아이들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돕겠다고 쓰레기를 치우고 쓸고 닦았다. 온 가족이 힘을 모아 한 달 가까이 벽지를 붙이고 칠을 하고 가구를 만들고... 물론 대부분의 공사는 남편이 했지만 나와 아이들도 각자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도우면서 그렇게 우리들의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게 되었다.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는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기도 했고 규모도 꽤 컸기 때문에 나는 다른 자잘한 아르바이트를 겸행할 수 없었다. 게스트하우스 운영에 집중했다. 매일같이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로 출근을 했다.
다행히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도 오픈과 동시에 많은 예약이 들어왔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장기 여행객이 저렴하게 체류할 수 있도록 주, 월단위 할인혜택을 적용했다. 체크인 전, 후 무료로 짐을 보관해 주는 서비스, 간단한 아침식사 서비스를 제공 함으로 게스트의 만족도는 높았고 좋은 후기와 평점은 더 많은 예약을 불러왔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매일같이 바빴지만 바쁜 만큼 신이 났다. 내가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도 물론 신이 났었지만 숙소에 오시는 여러 나라의 손님들이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기뻐하고 만족해하는 모습과 후기는 나를 신나게 했었다. 물론 항상 신나고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남의 돈을 버는 일은 절대, 결코 쉬울 수가 없다. 매일매일 넘쳐나는 빨래와 쓰레기, 진상고객도 있었다. 진상고객에 대해 얘기하자면 3박 4일은 걸릴 거다. 안타깝게도 나를 제일 힘들게 하고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진상고객의 대부분이 중국인과 한국인이었다. 나는 중국인에 대한 편견도, 색안경도 없지만 실제로 제일 호스팅 하기 힘들었던 고객들이 중국인이었고 뒤를 이어 한국인이었다. 어쨌거나, 힘든 일도 기분 좋은 일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도 하면서 나와 남편은 어엿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으로 1호, 2호를 잘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이 가까워왔다. 모든 숙소가 올림픽 전 후로 해서 숙박료를 10배 이상 올렸다. 평소 5000엔 하던 작은 일인용 방이 5만 엔씩 하는데도 예약이 꽉 찼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우리는 소심하게 5배 인상을 했는데 3층 콘도식 숙소는 평소 1박에 3만 엔이었는데 그 당시 평일은 15만 엔이었고 주말엔 18만 엔이었다. 이렇게 올려도 예약이 들어올까 하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 자고 일어나니 우리 숙소는 만실, 만실, 만실!이었다. 진짜 대~~~~ 박이었다. 대충만 계산해 봐도 헉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여름에 한 2주 문 닫고 해외여행 다녀와야겠네~어디로 가나~이런 행복한 고민을 했다. 곧 닥칠 시커먼 절망의 그림자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2019년 12월 말, 뉴스를 통해 어떤 전염병이 중국에서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일은 점점 더 심각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중국인 예약자들은 하나 둘 숙소예약을 캔슬했다. 처음은 중국인들 뿐이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나라 게스트들도 예약을 취소하면서 올림픽 시기와 그전, 후로 꽉꽉 찼던 예약은 순식간에 제로가 되었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잘 운영되고 있던 1호 게스트하우스 역시 모든 예약은 캔슬되었고 여행은커녕 일상생활까지도 제한이 되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예약은 모두 캔슬이 되었지만 양쪽 게스트하우스의 월세는 지불해야 했다. 숨만 쉬고 있어도 1분 1초가 다 지출이었다. 1호 월세 6만 5천엔, 2호 월세 70만 엔, 우리 집 생활비까지...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 되기까지 두 달이 채 안 걸렸다. 남편의 사업도 올 스톱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아이들까지 있는 상황에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을 했다. 하루에 3개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집에서 잠만 자고 아침부터 밤까지 둘이 일만 해도 모든 비용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끝이 언제인지, 끝이 있기는 한 건지 알 수 없는 터널을 걸어가며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1호 게스트하우스는 월세만 받고 외국인 부부에게 장기렌트를 해 주었다. 보증금도 없고 감사금도 없는 집을 구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방글라데시인 부부에게 다달이 월세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것에 우리가 더 감사했다. 문제는 2호 게스트하우스였다. 몸과 마음이 점점 더 피폐해져 가던 어느 날..., 코로나가 터지고 3개월이 조금 넘은 어느 날이었다. 우리 부부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신의 간섭을 느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2호 게스트하우스 건물주인 마츠모토상 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모두가 힘든 시기인데, 3개월 밀린 월세는 내지 않아도 됩니다. 앞으로 두 달 월세를 받지 않고 기한을 줄 테니 집기랑 가구 등을 정리해 주세요. 같이 힘냅시다.”
믿기지가 않았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다. 돈이 많은 건물주라고 해도 자기 돈 안 아까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할부로 나눠서 내는 것에 대해 부탁해 보려고 했던 우리들이었는데, 건물주는 무려 다섯 달 치의 월세를 포기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는 것이다. 자그마치 350만 엔. 3천5백만 원이 넘는 금액이다.
마츠모토상은 평생 돈 버는데만 시간을 쓰셔서 가족들에게 소홀하셨다고 한다. 형편이 좋아진 후로는 가족들이 마츠모토상을 멀리했고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한 번도 집밥을 드셔보시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두세 번 집에서 밥을 해다가 마츠모토상과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식사를 했었다. 마츠모토상은 다섯 달 치 월세가 밥값이라고 하셨다. 본인이 먹었던 식사 중에 가장 따뜻하고 잘 대접받는 식사였다고... 그 후로도 우리는 몇 번 더 같이 식사를 했다. 지금도 여전히 가끔 안부를 묻고 명절이면 찾아가 인사도 드리는 감사한 어르신으로 계신다.
이렇게 찬란했던 우리의 게스트하우스 사업은 일단락을 맺었다. 이렇게 2화에 나누어 다 풀어놓을 수 없는 긴 시간과 사건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마무리한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나는 다시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하였다. 한번 해 봤던 일이라 처음보다는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잘 된다고 너무 좋아할 것도 아니고 또 안된다고 해서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저, 하루하루 그날의 분량만큼만 열심히 살고 그날 누릴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 것. 어차피 사람 인생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