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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Dec 03. 2022

<고복>

사랑하는 그를 그리워하며


 새들거리는 낮 사이로 뿌연 연기가 드리웠다. 절 나무 바닥에는 향냄새가 배어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성보는 뻐근한 목을 세게 주물렀다. 지난 3일 동안 딱딱한 바닥에서 쪽잠을 잤더니 온몸이 낡아빠진 농처럼 삐걱거렸다. 무릎까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좁은 사당은 얇은 다리 하나 쭉 펼 공간조차 없어 보였지만 그는 나른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벽에 기대앉았다.

  “읏차!”

고요하다 못해 삭막한 공간에 성보의 신음이 크게 울렸다. 앉는 것만으로도 온 근육을 끌어 써야 하는 나이다. 민망해진 성보는 세 뒤통수를 향해 중얼거렸다.

  “늙으니까 자세만 바꿔도 힘이 드네.”

무의미한 변명에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성보 눈앞으로 엉덩이 세 개가 들쑥날쑥 오르내렸다. 성보의 아들과 며느리, 손녀가 숨을 잘게 쪼개며 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인의 손자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108번의 반복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성보는 젊은 가족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군소리 없이 절을 이어갔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손녀만이 끙끙거렸다. 손녀가 눈에 띄게 후들거렸다. 지방 앞 촛불보다 더 애처로운 떨림에 성보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가엾은 것들. 제사상이라곤 대형마트에서 산 음식을 비닐만 벗겨 올리는 애들이다. 죽은 이들을 위해 몇십 분째 절을 하고 있자니 속으로는 분이 들끓을 게 뻔했다. 얼큰한 향냄새 사이로 땀내가 느껴졌다. 성보는 간지러운 귀를 긁어댔다. 집에 돌아가면 며느리든 손녀든 아들에게 한바탕 할 것이다. 성보는 굳이 저들의 속을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세 명이 전부 엎드리자 주저앉은 채로도 제사상이 훤히 보였다. 나무 액자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 한 액자에는 성보의 어머니 영애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 영애는 빳빳하게 다려진 보랏빛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찡그린 건지 웃고 있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 눈 초점은 흐려졌고 얼굴은 쪼글거렸다. 성보는 깜빡하고 반나절 동안 세탁기에서 꺼내지 않은 빨래를 떠올렸다. 성보는 영애의 사진에서 뽀송한 청춘의 흔적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변하는 것이 당연한 세월에도 영애를 올려다보아야 했던 그때의 얼굴이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영애의 얇아진 눈꺼풀에는 여러 겹의 줄이 생겼고 입술도 바싹 마른 것이 세월의 고초만 느껴졌다. 성보는 어머니의 봄이 언제 지나갔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죽기 전 마지막 힘으로 자신의 손을 꽉 잡던 그녀의 손을 떠올렸다. 고된 노동 후에도 먼지만 툭툭 털어내면 다시 뽀얗고 보드라워지던 손이었다. 그래, 손. 영애의 손만큼은 어릴 적 그대로였다.




 여수 관청 앞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강물이 느려져 만들어진 개울가가 나왔다. 전쟁 중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면 부드러운 흙길의 여천으로 이어진다. 여천은 보호수 대신 대나무 숲이 입구를 지키는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대나무 숲이 마을을 지켜냈다고 믿었고, 하늘님께서 직접 만든 대울타리라며 ‘울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의 은혜로 보일 만큼 거대하지 않았지만 나무 하나하나에 위엄이 느껴졌다. 대나무는 마을의 믿음에 응하듯 거센 비바람에도 점잖았다. 작은 잎사귀만 바르르 움직이며 잔뿌리를 굳건히 했다. 고상한 대나무 사이로 어린 남손아이 하나가 나풀거렸다. 양반 부모의 땅을 물려받은 정가(家) 4형제의 막내 집 유일한 아들 성보였다. 성보는 뒤통수가 등에 닿을 듯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쳐다보면 자연스레 입이 벌어지는 게 좋았다. 혀를 쭈욱 내밀기만 하면 하늘이 빚어낸 뭉게구름을 핥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보는 틈날 때마다 혀를 세게 잡아당겨 봤지만 아프기만 하고 하늘까지 닿을 만큼 길어지진 않았다. 얼굴 위로 나무 그림자들이 울렁출렁 춤을 추는 게 느껴졌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상쾌하고 향긋한 일제 비누 냄새가 났다.

  “솨아아. 쉬이이.”

성보는 조용히 나뭇잎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동생 명숙이 오줌 누일 때 내는 소리랑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만으로도 배꼽 부분이 찌릿해져 다리를 꼬았다. 성보는 어머니 영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영애가 기도하러 가는 날이 오면 성보는 숲에서 시간을 때우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점점 떨어지는 그림자로도 시간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무료했다. 그래도 어머니를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다림은 성보가 아끼는 기회였다. 잠깐의 심심함만 견디면 누나와 여동생의 질투 없이도 영애와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 하늘에 걸린 나뭇가지에 틈이 생기자 햇빛이 비집고 쏟아졌다. 눈이 쨍하게 아려오자 성보는 눈을 비비적거렸다. 성보의 아버지 준석은 ‘해만큼 공평한 것이 없다’며 찬양했지만 성보는 저 뜨겁고 따가운 것이 싫었다.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면서 달처럼 모양도 안 바뀌니 지루할 뿐이었다. 성보는 팔을 벌려 양옆의 대나무를 툭툭 치며 걸었다. 외국 물건을 들여와 파는 큰외삼촌이 알려준 미국식 인사법이었다. 팔이 저려올 때쯤 대나무로 촘촘히 갈라진 마을의 풍경이 보였다. 간지러움을 느낀 성보가 바지를 걷었다. 개미 세 마리가 종아리에 붙어있었다. 작디작은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유난히 톡 튀어나온 성보의 무릎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기특한 마음이 들어 구경하는데 푹 숙인 머리가 돌멩이가 가득 찬 것처럼 묵직해졌다. 성보는 손바닥을 쫙 펴고 허벅지를 내리쳤다. 활기 넘치고 부지런하던 생명체의 부스러기는 먼지보다도 하찮았다. 성보는 무심하게 손을 툭툭 털었다. 누이들의 설빔 치마 색 같은 석양이 펼쳐졌다. 성보는 길쭉해진 햇빛을 피해 술래잡기하듯 빠르게 걸었다. 곧게 솟은 대나무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성보!”

석양을 온몸으로 마주한 영애가 노오란 그림자를 달고 다가왔다. 성보는 보라색 나들이옷을 차려입은 어머니를 보자 엄청난 기쁨에 휩싸였다. 따분한 시간이 끝났다는 만족감보다 아주 고운 것을 봤을 때의 환희와 열락에 더 가까웠다. 아이들이 매일 걸려 넘어지는 땅바닥임에도 영애는 비틀거림 하나 없이 걸었다. 곧게 솟아오른 모양새가 이 숲에서 가장 대나무 같았다. 성보는 뛰어가 어머니의 손을 덥석 잡으려다 멈춰 섰다. 잎사귀를 짓이기며 놀아 잔뜩 파래진 손을 사폭에 문질렀다.

  “인석아, 바지 더러워지잖니.”

성보는 이를 내보이며 헤 웃고 말았다. 이렇게 하면 엉덩이 맞을 일은 꿀밤으로, 꿀밤 맞을 일은 한숨으로 끝났다. 성보는 영애의 웃음기 섞인 한숨을 흘려듣고는 손을 내밀었다. 영애의 하얀 손은 덜 자란 성보가 손바닥을 쫙 펼치지 않고도 잡을 수 있을 만큼 작았다. 아주 보드랍게 만져지는 것이 베갯잇 안 깊숙이 숨겨둔 성보의 보물 돌멩이 같았다. 여름날 여수 외갓집에 놀러 가 주워온 것인데 영애가 본다면 밖에서 가지고 놀라며 마당으로 던져버릴 게 뻔했다. 성보는 파도의 괴롭힘을 많이 견딘 몽돌만이 이렇게 보드라운 것이라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했다. 영애의 손을 조몰락거리며 어머니도 괴롭힘을 당해 이렇게 고와진 걸까 생각했다. 하나로 뭉쳐진 두 사람의 그림자는 아궁이를 다 태운 숯만큼 까매졌다.          



 성보는 어느새 나목과 같아진 자신의 손으로 바닥을 쓸어보았다. 죽을 때까지 손만은 고왔던 영애가 가여웠다. 자신의 거친 손을 애써 비비다 보니 영애의 손바닥이 거칠었던 유일한 순간이 기억났다. 손톱에 피액골의 흙이 가득 끼어있던 영애의 손. 조계산 입구에 ‘게릴라가 소탕되었으므로 안심해도 좋다'는 나무 표지판이 세워지고 통행금지까지 풀렸지만 마을 사람들은 걸쇠를 걸어 잠근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영애만이 새벽에 발소리를 죽이고 외출했다. 성보가 잠결에 대문의 나무 찢어지는 소리를 들은 다음날 아침 영애의 신발은 매번 젖어 있었고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손에는 진득한 진흙과 피로 물들어있었다.




 성보는 영정사진 너머 부처상을 마주 보았다. 부처는 불편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가 허리를 쭉 펴고 따라 앉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시근거리는 관절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 괜히 부처님이 아니시겠지. 모두를 쳐다보는 듯하면서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듯한 눈이다. 부처 앞 네모난 액자에 갇힌 영애의 눈은 그와 닮아있었다. 세 젊은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바람에 성보의 시야가 가려졌다. 그들의 몸 사이로 차곡차곡 쌓인 과일들이 눈에 띄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유리구슬처럼 반짝거렸고 둥그런 모양새도 아주 어여뻤다. 이 장례가 끝나면 알뜰한 성보의 누이들이 하나씩 챙겨갈 것이다. 누이들은 어느새 자리 잡은 주름처럼 억척스러워졌다.



  “내 건데!”

 성보는 양팔을 벌려 영애 앞을 막아섰다. 영애는 손쉽게 성보를 피해 마저 걸었다. 영애는 꽉 찬 보따리 두 개를 들고 집을 나서는 길이었다. 보따리 안에는 삼 남매가 입었던 여름옷이 들어있었다. 민족의 조국이 일본의 속국이었을 때보다 더 살기 어려워지자 성보네 집은 마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기 시작했다. 준석은 이를 ‘허울 좋은 양반 족보를 세상에 내어주는 마지막 순서이자 조선을 바로 잡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계절마다 옷을 나누는 일은 영애가 준석의 아내로서 할 일을 고민하다 떠올린 방법이었다. 부엌데기가 밥상을 차리는 집이어서 누릴 수 있는 부인의 호사이기도 했다. 영애는 여천을 자신의 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여수 군자의 맏딸로 살다가 작은 마을의 양반가 막내며느리로 들어와 이곳에서 나고 자란 형님들은 외지인인 영애를 마땅치 않아했다. 영애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더 빠르게 마을 대소사를 접하고 더 많은 집을 챙기려 노력했다. 배가 언덕처럼 부른 막이네에는 막내 명숙이 입던 꼬까옷을 물려주었다. 솥이 쉬질 않는데도 항상 밥이 부족한 9남매 집에는 짭짤하게 간을 한 주먹밥을 챙겼다. 어린 성보에게도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허리 굽혀 인사하는 노인 집에는 두꺼운 이불이나 달달한 간식을 갖다 주었다. 성보는 매일같이 입던 바닷빛 저고리를 어떻게든 빼내고 싶어 종종걸음으로 뒤쫓았다. 영애의 뒤꿈치까지 따라잡았다가 놓치기를 반복했다. 어린 아들이 다시 자신의 길을 방해하자 영애가 결국 멈춰 섰다.

  “얘는 한동안 찾지도 않더니.”

  “이제 다시 입을 거야!”

  “너는 또 큰아버지가 사주실 거 아니니.”

성보는 억울함에 얼른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엉덩이를 흙바닥에 비비며 떼를 썼다.

  “그것도 내 거야!”

영애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보야, 노력 없이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그게 바로 탐심이 되는 거야. 농에만 묵혀둔 옷이 다른 주인을 만나 자주 밖에 나오면 더 좋지 않겠니?”

성보는 그녀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단호하게 힘을 실은 말투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영애는 쭈그려 앉으며 얘기했다.

  “업어줄게. 같이 가자.”

  “흐익!”

성보는 어깨를 흔들며 발을 굴렀다. 성보 주위로 흙먼지가 푸스스 일었다. 영애는 장난기 묻은 눈으로 엉거주춤 일어나 말했다.

  “그냥 거기 앉아 밤까지 기다릴 테야?”

성보는 제 맘대로 되지 않음에 더욱 칭얼거렸다. 답답한 마음에 찔끔 흐르는 눈물 한 줄을 닦으며 엉금엉금 영애의 등에 업혔다. 영애는 보따리에서 치마를 하나 꺼내 등에 매달린 성보를 덮고 자신의 가슴팍에 꽉 묶었다.

  “성보는 아직도 아가네. 이제 명숙이 오빠 말고 동생 해야겠다.”

  “아니야!”

  “이제 명숙이한테도 누나~ 그래. 누나~”

성보는 영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영애는 잘게 부서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성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일본 노래를 엉성하게 흥얼거렸다.



  “흐으.”

 손녀가 참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뒷목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성보는 저 어린것의 생기가 부러우면서도 불쌍했다. 에어컨이라도 틀어주려 대웅전 안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좁은지 고개를 들지 않고서도 천장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가파른 달동네 주택에 부처를 모신 이곳은 너무나 열악해 벽에 선풍기 하나 달 수 없었다. 영애가 생전에 자주 찾던 절이 아니었다면 깔끔 떠는 아들네 녀석이 절대 찾지 않을 곳이었다.

  “부처님은 더위도 안 느끼시나.”

녹슨 미닫이 창문이 열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성보의 푸념이 묻혔다. 어느새 나무의 그림자만큼 길어진 가을바람이 훅 몰려 들어왔다. 성보는 갑자기 느껴지는 찬기에 겉옷을 여몄다.

  “엄마를 얼마나 고생시켰는데!”

바람이 다툼 소리도 싣고 들어왔다. 성보는 먼지 낀 창틀을 부여잡고 고개를 죽 내밀어 마당을 내려다봤다. 마당이라기엔 대문과 절 사이의 짧은 통로나 다름없었다. 막대기인지 나무인지 모를 정도로 얇은 노목을 사이에 두고 금례와 명숙이 서 있었다. 둘은 쌀쌀한 날씨에도 소매까지 걷고선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성보는 늙을수록 쌈닭이 되어가는 누이들을 지켜보았다. 동생 명숙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럼 뭐 엄마를 혼자 둬?”

  “저 둘이 두느니 혼자 있는 게 낫지!”

홍성보의 누나 금례가 명숙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빽빽거렸다. 금례의 정수리가 심하게 흔들리며 버둥거렸다. 금례는 고집을 부릴 때면 리를 곤두세우려고 애썼다. 이미 굽어버려 소용이 없지만 그래야만 맏이로서의 권위가 느껴질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미숙이 옆에 모시면 되잖어!”

  “거기가 엄마 거야? 당연히 안 되지.”

  “뭐가 안 돼!”

  “언니, 걔도 따로 가족이 있어. 거긴 매부 누워야지.”

명숙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성보는 혀를 찼다. 미숙은 영애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미숙이 가장 먼저 세상을 뜬 이후 영애는 미숙의 이름만 들으면 눈물부터 흘렸다. 미숙은 영애가 낳은 마지막 딸이었다. 얼굴은커녕 아버지 이름이 준석이라는 것조차 알지도 묻지도 못한 채로 자란 성보의 동생이었다.           




 여천 사람들이 장날에도 동네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던 나날이었다. 준석의 밤 산책이 잦아질수록 영애의 배는 점점 불러왔다. 마른 팔다리에 배만 툭 튀어나온 모습이 알밴 곤충처럼 초라했다. 어스름해진 저녁, 영애는 안채 마루에 앉아 촛불을 켜고 저고리에 자수를 놓았다. 바늘에 자꾸 손가락을 찔리는데도 어두운 마루에 앉아있기를 고집했다. 성보는 배를 까고 드러누워 어머니의 다리에 볼을 비볐다. 대문 밖에서 이따금 인기척이 나면 영애는 잠든 성보 머리를 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지난주부터 새벽 통행이 금지되었기에 개미 한 마리도 함부로 다닐 수 없었지만, 영애는 불어닥친 바람 하나 놓칠까 잔뜩 귀를 기울였다. 준석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서부터는 바싹 마른 흰 아가보가 빨랫줄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성보가 이 천을 잡아당기며 놀 때면 맏누이가 달려 나와 아버지를 죽일 셈이냐 나무랐다. 가끔 아주 깊은 밤 안채에서는 속닥거리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그 밤이 지나간 날 아침 남매의 간식은 어김없이 사탕수수였다. 베어진 잎사귀에서 슴슴하게 느껴지는 담배 냄새로 준석의 선물이라는 것쯤은 어린 성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른 봄에나 나온다던 아가는 한 달이나 일찍 태어났다. 더 작고 더 못생긴 모습으로 태어난 아가는 급히 나온 만큼 이름도 성의 없이 지어졌다. 아가를 받은 노인은 다 지쳐버린 영애 대신 갓난아이라는 뜻의 미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성보는 이 벌레처럼 버둥거리는 것이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통통한 팔다리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그대로 푹 들어가는 게 꼭 방금 쪄낸 백설기 같기도 했다. 성보는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본 막내 여동생이 가여웠다.

 “야, 이 떡 벌레야. 더 일찍 나오지. 그럼 아버지 얼굴 실컷 볼 수 있었을 텐데.”

성보는 아버지가 더 이상 집을 찾지 않는 이유가 미숙이 너무 쪼글거리고 추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거 여기서 미숙이 얘기까지 해야 해?”

결국 성보가 싸움에 끼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소리 꽥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명숙은 성보 쪽을 힐끔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명숙이 금례에게 말했다.

 “그래. 그만해, 언니.”

금례는 분이 안 풀린 듯 몸을 떨더니 꽥하고 한마디 더 질렀다.

 “이이이!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시켰는데!”

성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싸움을 처음으로 되돌리기, 금례의 버릇이었다. 상대를 지치게 해서 항복하게 만드는 금례만의 공격술이기도 했다. 답답한 것을 못 참는 명숙은 기어코 다시 발끈할 것이고 싸움은 또 반복될 것이다.

 “고모들 괜찮으신 거예요?”

성보의 아들이 창문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뜨끈하고 축축한 기운이 달려왔다. 성보는 누이들의 정수리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기일도 모르는 준석을 위한 이 수 십분 간의 의식이 저 말싸움 하나로 쓸모없어질 수도 있을 터였다. 성보는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엄마 성격 모르우? 미숙이 옆에 있다간 본인 탓하다가 속 미어져서 거기서도 또 죽어버릴 사람이야.”

성보는 명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는 미숙에 대해서는 자책만 할 사람이었다. 성보의 아들은 창틀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무슨 말이에요?”

아들의 물음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아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어른들의 사정과 소음을 핑계로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모양이었다. 성보는 모른 척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길을 걷는데 따발총 소리가 가까워졌대. 딱따구리 나무 쪼듯이 따따따따. 빠르게.”

 “응.”

 “그때 길에 피할 데가 어딨냐. 그냥 납싹 엎드렸지. 귀 틀어막고, 발발 떨면서. 얼마나 손에 힘을 줬는지 귀도 멍하고 손에도 핏기가 하나 없어서 막 저릿저릿한 거라. 좀 지나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길래 옆을 쳐다봤더니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나더래. 그래서 네 할머니도 일어나려는데 등이 묵직하더란다."

 “왜요?"

 “미숙이 고모를 업고 있었던 거지.”

 "헤엑?”

절을 하던 손녀가 움찔거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성보는 젊은이들에게 꽤 흥미로운 휴식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함까지 들었다.

 “그제서 귀가 뻥 뚫리고 아가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몇 시간을 바닥에 주저앉아서 끌어안고 같이 울었단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가야. 미안하다. 미안해...”

성보는 미숙의 시신을 염하면서 사과만 되풀이하던 영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영애는 아가로 제 목숨을 살리려고 했으니 어미로서 한번 죽고, 마흔을 넘기기도 전에 죽어버린 딸의 영정 앞에서 두 번 죽었다.

 “엄마 걱정을 왜 죽어서야 하시우. 살아계실 때나 더 잘하지.”

창밖의 명숙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세졌다.

 “못된 년이!”

금례가 자기화에 못 이겨 욕설을 내뱉으며 손을 휘적였다. 명숙이 재빠르게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

 “진숙이 언니, 아버지 좀 그만 미워해.”

금례의 입이 꾹 닫혔다. 진숙은 나라의 감시를 피해 개명하기 전 금례의 이름이었다. 영애 손에 이끌려 금례가 되던 날 진숙은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그날은 진숙이 자신의 이름과 함께 아버지라는 존재를 지우는 순간이었다. 성보가 위에서 비스듬히 바라본 누나의 표정은 꼭 진흙탕 속 두꺼비 같았다. 입가에 팔자주름이 깊어서 더 그렇게 보였는데 그 주름이 자리 잡는 데에는 분명 명숙이 한몫했을 것이다. 사실 싸움의 결과는 처음부터 아주 뻔했다. 명숙은 단호하게 대하기에도 마냥 예뻐하기에도 애매한 셋째로 태어났다. 이리저리 치이며 내공을 쌓은 덕분에 어떤 싸움이든 명숙이 속한 편이 이겼다. 이번 승부도 언제나와 똑같이 끝났다. 성보는 시선을 돌려 영애 사진 옆 나란히 놓인 텅 빈 액자를 바라보았다. 성보는 어렴풋한 기억으로 액자 안을 채우려다 금방 포기했다. 성보가 아무리 아버지 얼굴을 채우려 애써봐도 자신의 젊었을 적 얼굴만 떠올랐다. 성보는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쩌면 떠오른 얼굴이 준석의 얼굴이 맞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준석은 여수에서 시끌벅적한 무리가 몰려온 그날 사냥총과 함께 사라졌다. 영애는 어린 남매들이 느낄 정도로 매우 초조해했다. 몇 번이나 쓸데없이 앉았다가 일어났다. 영애는 평소보다 이르게 미숙에게 젖을 물렸다. 소화다리에는 매일 총소리가 났다. 여수 집을 통해 경찰이 찾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날 영애는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고운 얼굴에 숯을 벅벅 칠해댔다. 가장 낡은 삼베 치마를 골라 입고 남루하고 큼직한 방한 점퍼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경찰 앞에서는 걸음도 일부러 절뚝였으며 말도 어눌하게 했다. 그들의 물음에 영애는 항상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입김으로 성보네 집과 큰아버지 집은 가끔 누군가 들이닥치는 정도로 끝났지만, 마을 사람들은 속곳만 입고 운동장에 모이기 일쑤였다. 잔뜩 겁먹은 사람들은 곁에 있는 아무나 손으로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는 칼날과 총구가 향했다. 마을은 싸늘해졌다. 이웃에게 이름을 불린 자는 이불을 덮은 채로 끌려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갈 길 잃은 분노는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 누구도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에 서로를 미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은 영애와 성보 남매만 보면 발치에 침을 뱉었다. 처음 들어보는 저주를 퍼부었다.

 “버러지 새끼들 때문에 밤에는 밥 뺏기고 낮에는 고문을 당하는구나.”

영애는 감히 울지도 못한 채 고개만 연신 숙였다.

 어느 날 영애의 남동생들이 시끄러운 차를 몰고 찾아왔다. 성보는 웬일로 제복을 갈아입지 않고 찾아온 삼촌들이 근사하여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살가운 인사 한마디 없이 어린 남매를 방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마당에서 맏누이를 다그쳤다. 영애는 막내 남동생 품으로 쓰러졌다.

 “얘야, 얘야. 그 이 살려만 줘. 살려만 보내줘.”

영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물로 애원했다. 그들은 영애의 등을 토닥였지만 매우 화가 나 보였다. 가끔 욕설을 크게 내뱉었다. 영애는 그날 저녁 급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은 집에 두고 아이들의 겨울 옷가지를 주로 챙겼다. 그날이 성보가 여천을 기억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얘! 네 언니 좀 챙겨라!”

명숙은 열린 대문 뒤 숨어있던 막내 효심을 불렀다. 효심은 언니들이 말싸움을 시작하면 근처에 숨어 슴벅거리기나 했다. 예전이라면 처세술 좋은 미숙이 뻔뻔하게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었겠지만, 미숙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론 효심이 그 일을 떠맡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막내는 그 역할로 꽝이었다. 한 마디라도 끼어들면 언니들이 ‘네가 뭘 아느냐’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노래교실 강사로 먹고살 만큼 사람들에게 살가운 효심이지만 언니들 앞에서는 시골 강아지처럼 깨갱거리기나 했다. 기센 언니들의 탓도 있지만 그녀는 자신을 가족의 외부인으로 생각했다. 성보 남매는 효심의 마음이 느껴질 때마다 더 호되게 대했다.          



 서울은 말씨도 느글거리고 괴상한 옷차림의 사람도 많았다. 상쾌한 향기를 몰아주던 대나무는 하나 없고 웬 바쁜 소음만 득실거렸다. 언제 적 전쟁고아도 아직 거리에 남아있었다. 서울의 집은 매우 낡고 열악했다. 작고 기다란 방에 다섯 명이 간신히 누워 잠들었다. 새벽에 오줌이라도 누러 나가려면 온 가족을 다 깨워야 했다. 얇은 문 뒤로는 거리의 불빛이 울렁여 불을 끄더라도 까맣게 그림자가 생겼다. 뻔뻔한 서울은 하나의 방에 얇은 가벽을 세워 두 집의 세를 받았다. 주먹으로 내려치면 움푹 들어가는 벽 하나를 사이로 젊은 여자가 갓난아기와 단둘이 살았다. 그녀 이름은 효심이었다. 정신없는 서울에 덩그러니 남은 두 여인은 금방 친해졌다. 미숙이 아플 때면 효심은 기꺼이 미숙과 영애에게 자신의 방 한 칸을 내어주었다. 영애는 언니로서 효심을 가여워했다. 영애는 아이들 밥을 다 먹이고 자신의 상을 차릴 때 밥그릇 하나를 더 꺼내어 자신의 것을 나눠 담았다. 그 그릇에는 꼭 두 술의 밥을 더 얹었다. 그리고 얇은 벽을 조심히 툭툭 두 번 두드렸다. 효심은 민망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넘어왔다.

 “항상 미안해요, 언니.”

영애는 싱긋 웃으며 밥그릇을 들이밀었다.


 어느 추운 겨울 옆집 아가는 닭보다 먼저 깨서는 목 놓아 울어댔다. 어르는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듣다 못한 영애가 옆집서 아가를 안아왔다. 아가는 멍텅한 성보네 남매 눈매와 달리 짙은 쌍꺼풀이 있었다. 영애는 진숙과 돌아가며 아가를 돌봤다. 다음 날도 며칠 후에도 그리고 몇 주가 지나도 효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애는 아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생명이라도 제손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주 하찮지만 고귀한 사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자신의 가족을 찾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아가가 효심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날부터 명숙은 학교를 나가지 못했다. 맏딸인 진숙은 엄마를 따라 일을 나가야 했고 미숙은 효심을 돌볼 만큼 건강하지 못했다. 명숙은 5일 내내 꺼이꺼이 울어댔다. 영애는 우는 명숙에게 물 한 모금 떠먹이지 않을 만큼 단호했지만 밤마다 딸의 머리카락을 쓸며 훌쩍거렸다. 명숙은 남매 중에 유일하게 서울을 즐거워했다. 다 해어진 옷을 입고 골목을 뛰어다녀도 성보처럼 무시당하며 두들겨 맞지 않았다. 성보는 가끔 명숙이 아가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는 모습을 목도했지만 평생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지프차가 줄지어 멎어있는 길거리로 나가 허연둥이들에게 미국 말까지 배워오는 씩씩한 명숙이 그때만큼은 눈물로 얼룩져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매 중 학교에 가는 건 성보가 유일했다. 성보는 학교가 싫었다. 아침마다 신발을 신지도 않고 칭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명숙은 성보를 죽일 듯 노려봤다. 성보는 명숙에게 자신의 꼬추를 떼어 달아주고 싶었다.




 “아휴, 언니가 참아요.”

효심이 진숙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활짝 웃었다. 명숙은 모른 척 법당으로 쏙 들어갔다.

 “오살할 년. 썩을 년.”

진숙은 명숙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었다. 원래도 거친 진숙이었지만 더 입이 걸걸한 남편을 만나고부터는 입이 험해졌다. 효심은 아양스레 진숙에게 팔짱을 끼고는 대문을 나섰다. 성보는 빠글거리는 두 형체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아들 가족도 다시 절을 이어갔다. 성보는 조용히 대웅전을 나섰다. 바로 앞에는 아주 가파르고 좁은 나무 계단이 이어졌다. 너무나 낡아 발을 갖다 대기만 해도 2층 바닥 전체에서 흔들림이 느껴졌다. 한 층계당 무릎까지 오는 높이에 한숨이 절로 났다. 누이들은 엄두도 내지 못해 성보만 한참 씨름하며 올라왔던 곳이었다. 거의 매달리다시피 난간을 붙잡고 내려왔다. 성보는 나이가 지긋한 스님들이 매일 이 계단을 오르내릴 것을 생각하니 새삼 불심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절 밖으로 나오자 곱이진 골목 가득 된장찌개 냄새가 풍겼다. 구수하면서도 시금떨떨한 냄새가 반가웠다. 성보는 음식 투정하는 남매에게 가난한 집 된장이 가장 맛있다고 하던 어머니의 위로를 떠올렸다. 3일장 내내 입에 안 맞는 육개장만 먹어서인지 자연스레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대문을 나서자 산책 나가는 두 누이의 형체가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갈 만큼 작아져 있었다. 성보는 마음 편히 대문 뒤로 몸을 숨겼다. 손가락처럼 두껍고 투박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며느리가 잔소리할 게 뻔했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신경 쓰기까지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씁쓸한 담배 연기가 입 안에 머물자 걸쭉한 가래가 끓었다. 담장으로 몸을 돌려 가래침을 뱉었다.

 “카악. 퉤.”

흙으로 덮기 위해 발로 땅을 긁자 담장 끄트머리에 모여있는 개미 떼가 눈에 띄었다. 잎사귀 색이 변하기도 전에 방역을 해대는 신축 아파트 주민 성보에겐 개미 떼도 이젠 생소한 풍경이었다. 성보는 눈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개미의 움직임을 쫓았다.

 ‘세상이 하찮다고 말하는 것일수록 더 부지런히 살아야 해.’

저 깊숙한 기억에서 목소리 하나가 튕겨 나왔다. 성보의 흐릿했던 추억 몇 개가 생기를 띄었다. 잊고 있던 어린 날의 공백이 서서히 채워졌다.



 성보는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마당 가장자리를 돌아다녔다. 눈으로 땅 구석구석을 훑으며 개미굴을 찾았다. 성보는 행랑채 담벼락 구석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개미 몇 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놓은 돌멩이 감옥 안에 가둬놓았다. 개미들은 돌로 막힌 작은 원형 옥에서 허둥거리며 갈 길을 헤맸다. 엉성한 돌 틈 사이로 빠져나갈 법도 한데 방향을 잃고 자기들끼리 부딪혔다. 성보는 그저께 낮에 작업복을 입은 청년들이 킬킬거리던 장난을 해보고 싶었다. 형들의 등에 가려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손짓을 어설프게 따라 하다 보면 재미있는 무언가가 나타날 것 같았다. 성보는 준석 방에서 몰래 빼 온 끈 달린 가죽 안경집을 꺼냈다. 거북 등껍질로 만든 돋보기 안경은 영애 둘째 남동생이 사다 준 귀한 선물이었다. 성보는 해의 위치를 확인하며 개미에게 안경을 들이밀었다. 쨍한 한낮의 햇빛이 안경알을 통과하여 얇은 줄기를 만들어냈다. 성보는 안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빛줄기를 돌 감옥 안으로 쏘였다. 타닥. 숯 탄 냄새가 어렴풋하게 났다. 돌 안에는 타 죽은 개미들이 벌러덩 뒤집혀 있었다. 성보는 자신이 해낸 일의 잔해를 보며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뒷목이 자릿해진 이유가 놀라움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담장을 넘어온 나뭇가지가 움직이자 햇빛이 길에 얼룩지며 내려왔다. 태양은 땅에 고꾸라지면서도 여전히 눈을 아리게 만들었다. 성보는 느닷없이 느껴지는 먹먹함에 얼굴이 후끈거리고 목이 다시 칼칼해졌다.

 “아버지”

잔기침 사이로 낯선 단어가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아까 채우지 못했던 액자에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리움이 치밀어 오르자 떠들썩한 혐오가 뒤따랐다. 성보는 씁쓸한 마음에 아주 세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숨을 크게 뱉으니 담배 연기가 자욱해 눈이 시큰해졌다. 가을바람이 매캐함을 부지런히 저 멀리로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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