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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May 27. 2022

탈학교운동이 탈낭만 하기 위해

<바보 만들기>를 읽고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직설적인 부제에 끌려 선택한 이 책은 제목보다 글쓴이가 더 강렬했다. 집필해온 책들의 제목은 더 심상치 않다. <학교의 배신>, <교실의 고백>, <수상한 학교>. 뉴욕에서 올해의 교사 상을 3번이나 받았다는 이 저자는 온 글마다 ‘학교가 정말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직이지만 공교육 교사로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질문이다. 역사 속에서 ‘학교의 필요성’은 의심받았을지언정 불신하지 않는 명제였다.


 저자인 존 테일러 개토는 기존 교육의 체제가 학생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관계의 단절, 무관심, 교사에 대한 지적 의존, 숙제로 이어지는 감시 등이 학생들의 자유로운 학습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문제를 벗어날 방법으로 ‘탈학교운동’을 언급한다. 학생들의 걸음을 제한하는 공간, 생각을 방해하는 시간, 똑같은 지식만 주입하는 행위 등을 바꿀 방법으로 가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가정을 교육의 주 동력원으로 받아들이면 지역사회와의 연계도 수월해질 테니 교육혁명의 탁월한 시작점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상상으로 미루게 되는 가장 먼 종착점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탈학교운동이 우리나라에 적용되기 위해 가장 변화가 필요한 지점들을 정리했다.          



어린이 자유권 보장

 저자는 어린이(책 안에서는 아동으로 표현하지만, 해당 세대를 존경하는 표현으로 바꿔 쓴다.)에게 혼자만의 시간, 선택의 기회, 감시로부터의 자유를 최대한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이 교수자에게 정서나 지적 호기심을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로운 학습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 학습자에게 자유가 보장된 환경이란 권리를 동등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칼릴 지브란은 “그대의 아이들은 그대의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을 갈망하는 생명이라며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부장제와 세대갈등이 짙은 우리나라의 경우, 자녀나 어린이는 보호자에게 소속된 존재로 분류한다. 보호자가 어린이의 의식주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당연한 의무는 성인이 어린이의 권리를 과도하게 빼앗는 과정을 합리화해왔다.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린이라는 어린이 대상화 언어를 지양하자는 인권단체 발표에  기자는 ‘아동은 미숙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보호도 받는 것인데 차별 언어라니 공연한 발표라며 비난했다.(여성조선 슬기로운 해독뉴스 이상문 기자 220504) '아동은 부족한 존재'라는 보편적 인식으로 보호자들은 어린이 혼자 스스로 생각하거나 행동하게 두지 않는다. 어린이 세대의 능력치를 불신하는 섣부른 우려는 저자가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  가지 자유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편견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어린이는 결국 보호자 또는 성인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자신의 감정과 개성을 표출하거나 지적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가족공동체의 구조적 한계

 1970년대 초 일리치를 통해 탈학교론이 대두될 당시, 사람들은 공교육 제도를 해체하고 새로운 학습망을 형성하자며 대안교육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우리나라 대안교육운동가들은 대부분 대안‘학교’를 택했다. 물론 탈학교론의 주장은 학교를 없애는 것이 아닌 학교제도를 폐지하는 것에 뜻이 있었지만, 그들은 근대학교의 공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공동체의 변화를 만들어냈다. 탈학교론이 교육운동가들(특히 우리나라)을 끝까지 설득하지 못한 이유는 아주 큰 전제조건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정 즉, 가족공동체의 역할적 한계다.

 탈학교운동은 현재 학교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을 다수의 장소에 분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나 가정의 기능을 강조한다. 탈학교를 위해서는 가정이 모든 구성원이 사고하고 탐구하는 학습공동체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보호자는 교육자이자 학습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부모교육, 교수법 등을 배우지 않은 보호자에게 부담감이 큰 변화다. 현재의 역할 구조로는 돌봄노동을 부담하는 보호자만 교육자 역할까지 모조리 부담하는 결과만 만들게 된다. 이는 코로나19로 일상화된 온라인 교육 이후의 모습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자녀가 있는 노동자 중 여성만 퇴사 비율이 증가하거나 학생들의 가족 소득 수준에 따라 교육격차가 벌어지는 단편적인 수치만 보아도 가정이 교육공동체로서의 기능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부모들은 자녀의 학습지도가 어렵다며 학교교육을 그리워했다. (사람인 ‘코로나 시대의 일과 육아 병행’ 조사 결과 210331) 갑자기 실시된 온라인 교육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부모교육과 부모 대상 교육이 매우 시급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수의 보호자에게 교수법에 대한 지식과 교육담론 형성의 문턱은 매우 높은 편이다.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을 분리해오던 사회적 맥락 때문이다.

 교육은 의도적 공동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의도적 공동체는 혈연적 자연 공동체와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대안교육, 아나키즘적 자유를 통한 성찰 : 지역 공동체에 근거한 자유교육 – 박연규 2010)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라면 교육을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할이나 구조를 세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족공동체 내 교육이 학교가 수행하는 기능을 해내려면 우선적으로 사회가 가정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가정에게 주어지는 역할에 변화가 필요하다. 사회는 가정을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하며 외면하지 않고 교육체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역사회의 역할

 탈학교운동에 지역공동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탈학교운동에서 가정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정상가족 구조에만 해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이, 청소년 학습자에게 다양한 성향과 지식을 제공하는 교육자가 꼭 필요하기에 지역사회의 움직임은 필수적이다.

 저자는 ‘사회’와 ‘조직’의 정의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조직은 모임이 필요로 하는 일이나 시키는 일만 할 줄 알고 그 대가로 무언가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학교 시스템이 사회가 아닌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재는 지역도 마찬가지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잃고 지역끼리 땅값으로 등급을 매긴다. 구성원끼리도 관계하기를 꺼리고 있다. 기업, 기관, 노인세대, 가족 등 지역을 이루는 모든 공동체이자 구성원들이 교육에 동참하게 만들어야 한다. 현재 대안교육에서 주로 강조하는 교육의 3주체는 학생, 학부모, 교사다. 이는 학생에게 가족공동체가 있는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을뿐더러 매우 제한적이다. 교육의 3주체를 학습자, 교육자, 지역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시급하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학생들이 오전에 학교에서 지식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지역기관으로 흩어져 예체능 수업을 받는다. 돌봄의 공백을 학교 외에도 메울 수 있는 지역적 체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공교육과 평생교육기관의 연계를 늘리는 시도와 마을공동체 사업 지원이 매우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필수과제인 탈시설운동처럼 탈학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학교 밖에도 교육 생태계가 잘 구축되어야 한다. 탈학교 정신이란 자유로운 교육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관계 속의 존재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것(민들레 120호 6. 탈학교운동을 돌아보며)이기 때문이다. 학교제도는 여러 교육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여러 교육법을 시도하고 선택하고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학교제도를 자리 잡게 만든 사람들, 즉 우리가 바뀌지 않은 채 교육의 변화를 꿈꾸는 것은 의미가 없다. 탈학교운동은 지금껏 비주류 대안으로 취급받으며 다양한 방법 모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급진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탈학교론이 논의되던 당시부터 낭만주의적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저자 또한 책 안에서 “의무교육 같은 제도의 획일적 우산 아래 각양각색의 가족과 공동체를 욱여넣으면 무슨 공학적 해결책이라도 나올 것처럼 말해왔다"라고 반성했다. 낭만은 태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 뿐 존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기에, 탈학교운동은 충분히 개인이 아닌 사회적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낭만적 이념이 부딪힐 현실적 한계를 고민한다면 운동은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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