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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Jun 13. 2022

남해일기 1주 차

210614~210620 새 공동체에 스며들기

어쩌다 보니 딱 1년 전이다. 벌써!



6월 14일 월요일

 서울의 복잡한 출근길에 고속버스를 놓쳤다. 출근까지 미루고 나를 데려다주시던 아버지도, 집합 시간에 딱 맞춰 버스를 예약한 나도 매우 당황했다. 단톡방에 인사말 하나 남기지 않은 내가 그제야 첫 카톡을 보냈다.  
‘버스를 놓쳐서 5시에나 도착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들이 가득한 공동체에 담긴다. 서로에게 관심 주는 일이 전부인 첫 만남은 언제나 생기가 넘친다. 그 빛나는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쨍한 한여름도 지루할 만큼 화려했다. 눈도 귀도 맘도 시끌벅적한 낯가림 시간을 보냈다. 밝은 분위기는 한 톨의 악의 없이 나를 애쓰게 만들었다. 기분에 기대기 위해 홀짝거린 맥주는 금방 졸음을 불렀다. 뜨끈한 취기를 느끼며 2층에 올라와 테라스 의자에 앉았다. 캠핑체어여서 그랬는지, 혼자 있어서 그랬는지 방금까지 앉아있던 식당 의자와 달리 포근하고 깊숙했다. 먼저 남해로 도망친 개구리들의 수다를 들으며 달을 마주했다. 흐린 실눈의 달이다. 내일 비 오겠구나. 내게 6주라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이렇게 멍청히 밤하늘만 쳐다보며 내일 날씨만 상상해도 괜찮아서 정말 다행이다.           



6월 15일 화요일

 비 오는 날엔 더욱 제 상태가 아니게 된다. 몸이 흐물거리고 오른팔이 저릿해진다. 우리의 첫걸음에 마음이 산만해져서 속상했다. 이 발자국이 훗날의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을 알고 있기에 소중했다. 협동조합 활동가 시절에 회칙, 평등약속문, 정관 등 딱딱한 문장에 온갖 온기를 불어넣느라 몇 달을 고생했던가. 이 모든 걸 하루 안에 끝낸 살러 공동체가 대단하다.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규칙들이 많이 생겼다. 나랑 짝꿍이었던 사월과 문장을 고르고 골라 ‘다채로운 사랑의 방식으로 나눕니다’라는 규칙을 제안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땅한 이유가 있었지만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여기에선 각자 한 명씩 20분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20분 말하기' 시간이 있다. 오늘의 스피커는 석, 금, 아보의 시간이었다. 석에겐 악수를, 금에겐 포옹을, 아보에겐 박수를 선물하고 싶었다.



6월 16일 수요일

 드디어 센터 땅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래 봤자 꽃내마을 안이었지만. 꽃내마을은 정말 예쁘다. 석이 일하는 청소년수련관까지 가는 길이 참 좋았다. 풍물패 공연을 하면 하는 이와 보는 이 모두 즐거울 곳이다.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거의 30분이 지나도록 천천히 걸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색 사이로 인간의 색들이 틈틈이 끼어있다. 그래도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색색깔의 지붕은 오히려 더 훌륭한 풍경을 만들어주었다. 수로에 버려진 목장갑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들려주었고, 마을회관 명패는 아주 촌스럽고 힙했다. 수련관은 마을에서 듬성듬성 보이던 빈 집처럼 어두컴컴하고 고요했다. 코로나19가 만든 멈춤이다.

 카약을 탔다. 내 아귀에 힘을 얼마큼 주냐에 따라 빠르기가 결정되었다. 노를 어디에 두냐에 따라 방향이 바뀌었다. 깊숙이 숨겨뒀던 천진난만한 마음에만 집중했다. 닿는 대로 마구 움직였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희열이었다. 일부러 점심도 카약 위에서 먹었다. 나를 위해 햄을 뺀 감자 샐러드가 들어간 샌드위치였다. 바닷물 묻은 손 때문에 느껴지는 짭짤함이 꽤나 재밌었다.

 오늘의 스피커는 중, 한, 근이었다. 중의 이야기는 감탄하느라 바빴고 한의 이야기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고 근의 이야기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6월 17일 목요일

 가장 정신없는 하루였다. 김밥을 만들고 체육대회를 진행하고 저녁식사도 준비했다.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온 후에는 반절 정도 영혼이 이미 빠져나간 상태였다. 열심히 저전력 모드를 지켰다. 체육대회라 하면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여러 승부가 떠오르는데, 아무래도 살러 공동체의 목적이 있다 보니 협동심을 기르는 놀이들로 채워졌다. 나에게는 매우 다행이었다. 상품도 우승을 많이 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추첨을 통해 주어졌다. (나는 감사하게도 우승도 하고 가장 좋은 상품도 얻었다!) 풋살장에서 한 게임이 기억에 남는다. 맨 뒤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안대를 쓴다. 그리고 팀원들끼리 정한 수신호를 활용해 상대팀이 숨겨둔 목적지까지 상대보다 빠르게 가는 팀이 승리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린 뒷사람에게만 의지한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아직 시간을 많이 나누지 못한 사람들이어서 조금의 망설임이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나도 스피커가 되었다. 지금 이렇게나 횡설수설하는 부족한 사람이어도 아주 잘 살아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일부러 전부나 최고를 내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냥 마구 뱉었다. 내가 말하는 그대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려지는 시간이라니, 생소하고 힘겨웠다. 나를 제외한 오늘의 스피커는 훈, 문, 홉이었다. 훈은 지나온 날에 대한 성찰이 훌륭했다. 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마음이 근사했고 홉은 앞으로의 날들이 아주 기대됐다.



6월 18일 금요일

 갑자기 얻게 된 여유시간에 카페 유자에 다녀왔다. 센터와 가까운데도 게으른 나는 처음 갔다. 이제야 이 마을 주민이 된 것 같다. 성이 미술 심리치료를 해줬다. 간단한 그림에도 서로가 아주 다른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이 신기했다. 새삼 우리의 인연이 더욱 반갑다. 오늘의 스피커는 류, 현, 사월, 씨다. 류는 평소에도 느껴지던 따스한 아우라만큼 역시나 존경스러운 삶을 살아왔고, 현은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만큼 빛나는 사람이었다. 사월은 나와 뭔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앞서 있었고, 씨는 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나는 큰 숲 같은 사람이었다.

홉이 찍은 사진



6월 19일 토요일

 오늘은 세 번이나 산책했다. 센터 뒤쪽에 새로 생긴 다리 직전의 샛길로 빠지면 해안선을 따라 쭉 걸을 수 있는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산책길이 나온다. 아침에 발견했다. 친구들과 같이 걷다가 얕아진 바다를 보자 신이 나서 먼저 호다닥 앞서 뛰어갔다. 뒤쪽에서 말소리가 들리지 않길래 얼른 발을 적시며 놀았다. 뒤늦게 사월과 한이 합류하여 짧은 물장구 놀이를 했다. 늦은 낮에는 마당에서 글을 쓰다가 햇빛의 유혹을 못 이겨냈다. 가벼운 엉덩이를 탓하며 사월과 뮤지컬 넘버들을 들으며 함께 걸었다. 자갈이 돌돌돌돌 드러났던 아침과 달리 벌써 바닷물이 높이차 있었다. 하늘 아닌 바다로도 시간을 알아챌 수 있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사월은 연극을 하다가 새로운 도전들로 자신의 우주를 넓히는 중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을 사월과의 대화를 옮겨 적어본다.

“사막에 선인장이 왜 있는 줄 알아?”
 - 왜?
“선인장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야. 선인장은 다른 지역에서 살면 더 잘 자란대.”  
- 헐! 몰랐어!
“나는 나를 다른 곳에 심어 볼 생각이야.”

하나 더 옮긴다.

“나는 첫 연극을 봤을 때... 연극 시작하기 전에 암전 되잖아. 그때 무대에 붙어있는 야광 스티커가 잠깐 반짝 빛나는데 그게 너무 우주 같았어. 그 우주에 있다가 불이 켜지면 갑자기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나오잖아. 그게 마음이 정말 벅찼어.”

 내가 들어본 무대 첫인상 중 가장 멋진 표현이었다. 무언가를 사랑하면 저렇게나 아름다운 말이 술술 나올 수 있구나. 이 공동체에선 6주 안에 꼭 개인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내 프로젝트는 인터뷰다. 이르지만 첫 번째 인터뷰이로 사월을 섭외했다.

 다시 돌아온 센터. 또 마당에 앉아 멍하니 햇빛을 쐬었다. 옆에서 쉬고 있는 근에게 이것저것 묻다가 그가 카메라나 녹음기 앞을 어색한다는 걸 알게 됐다. 얼른 두 번째 인터뷰이로 섭외했다. 내게 누군가를 평온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을지 궁금하다. 근은 자신의 페르소나를 위해 우리에게 직업을 숨기고 있는데 (나이와 직업을 숨기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기도 하다.) 그게 뭐든 음악과 가까운 친구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석, 금, 아보, 사월이 밖으로 나오라고 눈짓했다. 물기를 다 털어내기도 전에 근처 바닷가에 도착했다. 해안선과 맞닿은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번 주 내내 유일하게 멀리 나서지 못한 나를 위한 친구들의 선물이었다. 해가 금방 졌다. 바다는 맨날 저 큰 해를 삼켜대서 뭐에 쓰는지 모르겠다.

어색한 석과 나



6월 20일 일요일

 남해에서 처음 갖는 자유시간이다. '자유'라는 것은 늘 어렵다. 항상 크고 작은 갈등을 만든다. 가장 정교한 가치이기에 그런 것 같다. 수많은 해석이 엉겨 붙는 텍스트에 숨지 않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갈등을 이겨내는 친구들이 멋졌다. 살러들은 대부분 읍내로 나갔다. 나는 방 짝꿍인 씨와 함께 센터에 남았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로 햇빛이 강렬했지만 어떻게든 남해의 여름에 속하고 싶었다. 마당에 파라솔과 노트북을 펼치고 밀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참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내 시야의 경계에서 까만 점 하나가 왔다 갔다 했다. 개미가 내 텀블러를 올라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다리가 4개 이상 달리면 일단 기겁하기 때문에 텀블러를 마구 흔들었다. 개미가 내가 앉은 벤치로 톡 떨어졌다. 땅으로 옮기기 위해 빈 담뱃갑을 가까이 가져갔다. 개미는 순순히 담뱃갑에 올라섰지만 예상치 못하게 내 손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호들갑스럽게 손에 쥔 모든 것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바닥에 떨어진 개미는 죽어버렸다. 그 가벼운 빈 담뱃갑에 깔려서. 나는 작은 생명들을 아주 많이 해치며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목격한 죽음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들이 주인임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살게 되어 그런지, 나의 거대한 몸짓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간이어서 주어지는 어느 힘 때문에 내가 이 지구에 얼마나 많고 다양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 가늠조차 안 된다. 한 생명체에게 허락된 만큼만 누리는 삶을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이른 밤에 마당에서 홉, 중, 석과 이야기를 나누다 대화가 길어져 그새 해가 뚝 떨어졌다. 석이 뚝딱뚝딱 불을 피워줬다. 선선한 여름밤의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은 역시나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깊게 새기지 않을 말들만 툭툭 내뱉는, 잊지 않고 가끔 별을 올려다보는 이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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