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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Jun 20. 2022

남해일기 2주 차

210621~210627 사랑과 상실

6월 21일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블랙베리 하우스에 가서 잡초를 뽑았다. 나는 유독 대학생 시절 농촌체험활동의 추억을 좋아한다. 그 활동도 중도하차를... 여름이라는 계절에 딱 알맞게 살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땀 흘리는 걸 매우 싫어하는데 자연 안에서 흘리면 개운하면서도 기분이 좋다. 블랙베리 하우스는 눈을 못 뜰 정도로 땀이 날만큼 더웠다. 축축하고 텁텁한 숨으로 가득 차 더 더운 느낌이었다. 여기저기 짜증 섞인 신음이 들릴 때마다 끝말잇기나 삼행시 같은 말놀이를 시작했다. 다행히 다들 나의 시시껄렁한 장난에 맞장구쳐주며 즐거워했다. 무명의 풀을 뽑아대면서 과하게 이름 붙여진 잡생각들을 없앴다. 농부님은 자신의 직업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 잼이며 청이며 이것저것 챙겨주신 덕분에 지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한때 디지털 노마드를 꿈꿨었는데 내게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오늘 활동하는 모임에서 배려해준 덕분에 온라인 회의에 참여했는데 조금 벅찼다. 내 몸이 있는 공간 그리고 마음을 쏟아야 하는 시간, 어느 것에도 최선을 다해 집중하지 못했다. 감사하게도 모임 사람들은 내게 행복해 보인다고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 이제 나는 꽃내를 우리 집이라고 부른다.  오늘의 깜짝 20분 스피커는 하다였다. 말을 먼저 걸어주던 첫인상 그대로 '곁'이라는 위치를 좋아하는 친구 같다.          



6월 22일 화요일

 그룹여행 첫날이다. 내가 속한 팀은 '여유'가 주제이자 목표다. 아보, 금, 사월과 함께 한다. 길에 놓인 모든 만물에 관심 갖는 내게 아주 적합하다. 여행 첫 날인 오늘은 날씨도 습습해서 마음도 습습했다. 여행 중 한 공터를 지나쳤다. 덩그러니 폐허 한 채가 있었는데, 옆에는 계곡이 흐르고 앞에는 마구잡이로 자란 풀들이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나는 사람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겨진 곳들을 좋아한다. 별말 없이 길을 벗어나 풀을 헤치며 마당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그 집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냈다. 아차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팀원들 모두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따라오고 있었다. 사진 한 장에 꽂혀 이름 없는 곳으로 여행 목적지를 정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아주 멋진 여행 메이트들이다. 돗자리를 펴고 가장 어여쁜 색으로 찰랑이는 바다만 쭉 바라봤다. 아보가 바다가 보이는 땅의 끝으로 가서 우뚝 서더니 갑자기 한마디 툭 던졌다.

  "여기에 살기로 한 거 잘한 것 같아."
아보는 우리와의 6주살이가 끝나면 이곳 남해에 정착할 계획이었다. 아보의 확신에 찬 감탄사에 금, 사월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세 명은 한 덩이로 뭉쳐 같이 훌쩍였다. 뒤로 보이는 한낮의 바다보다도 더 푸르고 반짝였다. 공감은 역시 가장 보드라운 사랑법이다. 아보가 남해에서 지낼 시간 동안 사랑과 상실을 부족함 없이 경험해냈으면 좋겠다.

 오늘 내게 아주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오랜 걸음 끝에 여행 목적지가 코앞에 나타났길래 친구들을 지나쳐 신나게 내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삐끗했고 아스팔트 도로였던 탓에 발등뼈까지 뚝 부러져버렸다. 처음 두 시간 정도는 별 것 아닌 줄 알고 콩콩 한 발로 놀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심하게 부었다. 친구들이 택시를 불러줘서 먼저 센터로 돌아왔다. 훈이 시내 병원까지 데려다주었고 나는 한 달간 깁스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내가 과연 목발질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철이 없게도 조금 재미있다. 걸음걸음이 전부 그네 타는 기분이다.           


6월 23일 수요일

 골절된 발로 남은 5주를 살아야 한다. 나와 살러, 모두에게 불편할 것 같아서 집에 먼저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석의 거친 위로로 '그래, 같이 이겨내자!' 생각하다가도 미안해지는 순간마다 마음이 흔들렸다. 센터로 놀러 온 하다가 나의 투정에 "그럼 다예는 다리 불편하신 분이 살러로 왔으면 집에 가라고 눈치 줬을 거야?"라고 되물었다. 헉. 모순된 마음을 잘 꼬집은 충고였다.  

 거동이 불편하니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내가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려면 친구들은 나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더 움직여야 했다. 금은 재빠르게 내 전용 바퀴의자까지 만들어줬다. 이름표도 붙어있다.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고마움과 미안함에 휩싸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누구보다 내가 가장 많이 모자람 없이 위대한 이 친구들의 마음을 느끼고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남해가 이동장애인에게 괜찮은 여행지일지 궁금해졌다. 지내는 기간 동안 조금이라도 알아내어 기록하면 좋겠다. 쉬는 시간에 관련 논문을 찾아 읽었다. 지역의 배리어 프리는 장애인의 여가활동 증진을 위함도 있지만 노인 세대가 많이 살수록 더욱더 필요하다. 문턱과 경사로 없는 계단 등은 우리도 모르게 어느 집단을 소외시키고 있었다. 이런 지점들을 많이 알아채는 시간으로 써야겠다.



6월 24일 목요일

 그룹여행 일정 마지막 날이다. 우리 팀은 두 번째 여행을 떠났고 나는 센터에 남았다. 함께 남게 된 여행지원팀원들은 오후 내내 대청소를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빗자루만 휘적이다가 그마저도 빼앗겼다. 제 역할을 해낼 수 없는 마음이 엄청 까끌거린다. 느릿하게 지내다가 늦은 저녁을 맞았다. 여행 나간 팀들 모두 밤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지원팀은 노을을 보러 외출했다. 나 홀로 1층 살러방에 남았다. 처음 느껴보는 고요한 꽃내센터다. 내 작은 숨소리가 넓고 큰 센터 공간을 떠돌다가 되돌아와 크게 울렸다. 처음 갖는 혼자만의 시간이 매우 평화로우면서도 왁자지껄함이 그리웠다.    

친구가 유튜브 보다가 너 아니냐며 보내준 사진. 행사 중 INFJ만 다쳐서 따로 혼자 있는 장면인데, 마침 INFJ인 내 꼴이 딱 이랬다! (출처 : 유튜브채널 에익쿠)



6월 25일 금요일

 다음 주면 자유일정이다. 원래도 계획 하나 없이 오긴 했지만 발이 이 모양이니 더 예측하기 어렵다. 마지막 워크숍을 가졌다. 우리의 규칙을 더 견고히 하고 새로운 방 짝꿍을 정했다. 곧 씨의 곁을 떠나 문, 류와 함께 지낸다. 밤에 나의 매화방으로 석, 중, 한이 놀러 왔다. 물론 술병을 가득 들고 왔다. 이불을 덮고 누워서 그들의 이야기를 라디오처럼 듣고 있자니 뭐랄까, 왠지 소주가 어울리는 주제들이었다. 코인부터 주식까지, 그들이 어른스럽다면 어른스럽고 하여튼 생소해서 신기했다. 다리 다친 내가 심심할까 봐 온 것치고는 나는 계속 관찰자 위치였는데 그것이 더 좋았다.


           

6월 26일 토요일

 아침부터 부지런히 마파람사진관으로 갔다. 살러들은 정말 창의적이고 열정적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남해 하늘만큼 푸르고 맑은 류의 스카프(색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류가 직접 물들였다고 한다.)를 빌려 12명 전부 다른 룩을 완성했다. 단체사진 찍을 때는 기분이 아주 묘했다. 이 애틋함이 남해 밖에서도 우리를 더 끈끈하게 만들어줄 것 같다. 곧 오픈하는 남해청년센터도 다녀왔다. 훈의 인터뷰 촬영을 따라간 것이다. 멋스러운 한옥에 통유리 창문이 주변의 햇빛을 한데 다 담으려는 듯했다. 나는 다친 발 상태가 나빠져서 한 곳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살러들은 구경하고 촬영하느라 바쁘게 폴폴 돌아다녔다. 언젠가 본 영화처럼 하나의 사물이 되어 사람들을 관찰했다. 총총 돌아다니는 다리와 서로 귀엽다고 까르르 거리는 웃음소리, 새로운 공간을 구석구석 담으려는 눈동자. 모두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웬일로 저녁에 체력이 남아돌았다. 저녁에 2층 테라스로 나가 문, 홉과 미뤄둔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대충 우리만이 비슷한 또래라는 것을 눈치채고, 지금까지 꺼내지 못했던 여러 사연을 공유했다. 은근히 닮은 점도 많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두 친구는 언제나 또랑또랑하고 유쾌하다. 중과 현의 전화 유혹을 못 이기고 잠시 1층 술자리에도 합류했다. 술이 만드는 거침없는 분위기가 좋은 쪽으로 별스러웠다. 몰래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바퀴의자 때문에 소란스럽게 온갖 변명을 둘러내며 빠져나왔다. 국화방으로 놀러 가서 홉, 류와 조곤조곤 이야기 나눴다. 세월호부터 인문학,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였는데 오랜만에 대화 주제가 깊숙해져서 새삼 즐거웠다. 류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찬연하다. 다단한 나와 달리 매우 곧고 눈부시다.        



6월 27일 일요일

 오늘은 최대한 바깥에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봤자 센터 마당이지만 나름 남해에서의 하루를 즐기려 애써보았다. 낮에는 2층 빨래들 옆에 같이 드러누웠다. 책 읽으러 나온 사월을 붙잡아 시를 주제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사월이 유진목 시인의 영상을 보여줬는데 해보고 싶은 작업이어서, 우리가 언젠가 함께 할 프로젝트의 레퍼런스로 삼았다. 저녁에는 하루살이를 이불 삼아 마당 나무데크 위 돗자리에 누워있었다. 문과 뒹굴거리며 노래만 같이 불렀는데도 한여름밤은 즐거웠다. 시커메진 손이 거슬려서 문의 매니큐어를 바르다가 석의 손톱에도 낙서했다. (석은 끝까지 이 낙서를 지우지 않았고, 프로그램이 끝난 후 몇 주 뒤에 '이제 다 없어졌다'고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러고 보니 석에게 "안 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집에서도 멋진 아버지일 것 같다. 중이 트럼프를 갖고 내려와 '텍사스 홀덤'이라는 게임을 알려줬다. 류, 사월과 규칙 외우는 데만 30분이 걸렸지만 중이 조급해하지 않고 잘 가르쳐줬다. 하다 보니 재밌어서 계속 "한 판만 더!"를 외쳤다. 홀덤을 하는 중에 갑자기 석이 카드마술을 보여줬다. 마술이 길어지면서 정적이 생기자 류가 그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아~ 지루해~"라고 했다. 웃겨서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다시 떠올려도 웃길 것 같아서 일기에 적어본다. (다시 옮겨 적는 지금도 너무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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