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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Jun 02. 2022

필리핀, 네팔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

현장에서의 고민

필리핀과 네팔은 한국인에게 꽤나 친숙한 여행지다. 세부, 보라카이, 히말라야 트래킹 등 한국인이 자주 찾는 여행코스가 있기 때문이다. 저렴하고 아름다운 여행지로만 알았던 이 두 나라는 누군가에게 생존, 노동, 활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중 이곳의 여성에 집중해 보았다. 나는 이 두 나라에 외부인으로서 잠시 살았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행동양식의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가부장제가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곳들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필리핀

 성 이분법적 사고는 한국과 비슷하다. 학생들은 성별에 따라 선호하는 직업군이 확연하게 달라졌고 실제 선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세대별 결혼에 대한 인식도 비슷했다. 내가 만난 중, 노년층의 필리핀 여성들은 대부분 '여성이 가장 성공하는 방법은 결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청년층 여성들은 일을 위해서는 결혼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기혼 여성들이 경력단절 없이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임신한 여성에게 출산 휴가를 3개월이나 지급한다. 그리고 그 후 확실한 복직 또한 당연했다. 육아는 다른 가족들이나 마을 이웃들이 돕는다. 

 나는 필리핀의 한 지역, 그것도 작은 마을에서만 경험했기에 감히 부러워하거나 안타까워할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필리핀이 여성에게 얼마나 안전한 나라인지 정리해보았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

 필리핀의 여성인권을 말하려면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테르테는 마닐라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추모 동상 기습철거 명령을 내린 대통령이다. 그는 2018년도에 정상회담차 방한했다. 교민행사에서 "내게 키스해주는 여성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겠다"며 행사에 참여한 필리핀 이주여성에게 입을 맞췄다. 비판 여론에는 질투라고 반격했다. 시장 재직 시절과 대선기간에는 모든 여성과 키스했다면서 '그게 내 스타일'이라고 했다. 아세안 정상회의 비즈니스 포럼에서는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처녀 42명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연설문을 읽었다. 같은 해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개최한 계엄령 선포 지역 투입 군인들 앞에서는 “당신들이 투입 후 여자를 성폭행해도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공언했다. 한 연설에서는 "아름다운 여성이 많이 존재하는 한 강간 사건은 벌어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여성을 성적 도구로 치부하고 강간의 원인을 여성에게 묻는다. 성폭력을 농담으로 소비한다. 대표자 입에서 나온 발언으로 필리핀 여성인권의 현실을 알 수 있었다. 매번 두테르테의 발언이 이슈화되었기는 하나 사실 최근 사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여성혐오다. 이 발언이 한 나라의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주목할 점이다.

 필리핀 프로젝트로 찾았던 학교의 모든 교실에는 두테르테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한 학생은 그의 사진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등교하기도 했다. 그 학생에게 두테르테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지만 막상 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그저 시장에서 구입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혐오정치 속 독재자는 국민들의 삶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고 있다. 그의 모든 언행이 그 나라의 일상과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난 5월 18일 필리핀 대통령으로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가 당선되었다. 그는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필리핀을 통치하며 계엄령까지 선포한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들이다. 그의 러닝메이트는 직전에 대통령 임기를 끝낸 두테르테의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다. 나는 필리핀 지인들, 특히 청소년 세대가 인스타그램에 마르코스를 지지하는 글(그의 굿즈를 들고 지지자들만의 콘서트 같은 행사를 했다.)을 올릴 때마다 지난 2013년 12월이 떠올랐다.


여성단체의 노력

 필리핀 여성운동단체는 지속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추모 동상을 건립하거나 일본 정부에게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 힘쓰고 있다. 사회운동에 대한 처벌이 심한 분위기 속에서도 성폭력 피해경험인 회복, 여성인권을 위한 국가정책을 촉구하는 운동을 해내고 있다. 2018년 필리핀에서는 처음으로 '세계 여성의 날' 집회가 열렸다.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 분위기로 집회를 즐기면서 여권 신장을 외쳤다. 두테르테의 마약전쟁 속에 숨진 용의자들의 미망인들에게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나눠주는 행사도 마련했다.    

  

대표 여성인권 운동가 메리 존

 메리 존 수녀는 필리핀 페미니즘 운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 여성 정치범을 군인들이 학대하는 사건을 지켜보며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메리 존은 "교회는 신학적으로는 평등하더라도 그 안에서 성차별이 존재할 수 있다"고 폭로했다. 그는 필리핀 여성운동단체 ‘필리피나’와 수녀 네트워크 '필리핀 여성수도자 전국회의'를 건립하는 데 구심점이 되었다. 그들 덕분에 필리핀의 첫 여성 자원센터는 물론, 연합조직인 가브리엘라와 여성학연구소까지 생겼다. 종교에 가려진 성학대와 성차별 사건들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편이 되어준 사람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여성인권 선진국 필리핀>이란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여성 직장인들에게 하이힐을 강요하면 안 된다는 행정명령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노동환경에 무척 도움이 되는 국가 행동이었다. 하지만 기사 제목만큼 선진 하는 일은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동남아 아동 성매매 관광이 이슈가 되었을 때 주 고객으로 한국 남성 커뮤니티가 발견되어 화제였다. 13만 명의 회원 수를 가진 그 커뮤니티는 회원들끼리 필리핀에서 저렴하게 성 매수하는 방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필리핀 성매매 사업장 대표가 한국만은 광고를 위해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두 나라 모두 여성이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사회가 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인권이란 절대 단 하나의 사람, 단 하나의 단체, 단 하나의 국가가 지켜낼 수 없는 가치다.


                   

네팔

 네팔 프로젝트 4기를 인솔하기 직전, 이전의 프로젝트를 회고한다. 네팔은 여성에게 얼마나 친절한 공간일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월경하는' 여성에게는 친절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을

 마을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없다. 비닐봉지를 챙겨가 화장실 구석에 놓는다. 화장실이 크지 않으니 가장 작은 봉지를 두는데 함께 묵는 팀원과 한 기간에 월경을 하게 되면 금방 가득 찬다. 쓰레기봉투는 프로젝트 마지막 날에만 학교로 가져가 소각할 수 있다. 마을에서는 월경대를 살 수 있는 곳이 아주 아주 멀리 있다. 코디네이터 삼촌이 안 계시면 월경에 대한 마땅한 소통이 불가능하여 홈스테이 가족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다. 피임약을 먹을 생각으로 월경대를 챙기지 않는 팀원도 있다. 피임약 복용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하게 월경을 하게 되면 여성 팀원들에게 부탁해 월경대를 구해야 한다. 홈스테이 집들끼리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홈메이트 팀원도 소지하고 있지 않다면 다음날 학교에서 다른 팀원을 만날 때까지 휴지로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월경컵, 천 월경대도 자유자재로 물을 사용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추천하지 않는다.


카트만두 게스트하우스

 마을 활동이 끝나면 코디네이터 삼촌이 운영하는 카트만두 숙소에 잠시 머문다. 게스트하우스는 총 3층이다. 방은 3~4인용으로 4개, 화장실은 3개가 있다. 1층 화장실은 거실, 부엌과 붙어있어 매 순간 사람들이 북적이고, 화장실 안에 세탁기도 있어서 편안히 사용하지 못한다. 대부분 여성, 남성 팀원은 각 층을 나눠서 사용한다. 결국 여성 팀원들은 한 층의 화장실만 이용할 수 있다. 화장실 안에는 아주 작은 휴지통이 하나 있는데 뚜껑이 없다. 좁은 편의 화장실에서 여러 명이 샤워를 연달아하면 쓰레기통이 다 젖어버려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화장실 밖의 휴지통은 방에 하나씩 있다. 역시나 작고 뚜껑이 없는 쓰레기통이다. 사용한 월경대를 버리기 적합하지 않다.


포카라 호텔

 포카라에서 묵는 호텔은 아무래도 다른 두 공간보다 편하다. 하지만 프로젝트 일정상 곧바로 트래킹을 떠난다. 트래킹 도중에는 화장실을 찾기가 힘들다. 지난 프로젝트 중에는 한 팀원이 배탈 때문에 그냥 길 바로 옆  풀 사이로 들어가 볼일을 봐야 하는 상황도 생겼다. 당시 인솔자는 롯지에서 미리 화장실을 들르지 않았다고 참가자를 나무랐지만, 관련 지병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처럼 예방하거나 조절할 방법이 없다. 걷는 중에 월경이 시작된다면 더욱 그렇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롯지의 화장실 수는 줄어든다. 여러 등산객이 한 번에 이용하기 때문에 화장실 비는 타이밍도 맞추기 어렵다. 화장실 안 휴지통 유무는 롯지마다 다르다. 월경대를 구하기는 마을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이곳이 월경에 불친절한 데에는 오래된 이유가 있다. 힌두교에는 '차우파디'라는 관습이 있었다. 월경 중인 여성을 사람들로부터 격리하는 것이다. 실제로 네팔에서는 차우파디 중인 여성을 더럽다며 폭력을 행하는 건 물론, 모순적으로 이 기간만 노려 강간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차우파디가 범죄로 인정되기 시작한 건 불과 2017년부터다. 아직도 차우파디로 사망하는 여성들이 간혹 생기고 있다.


 어느 NGO단체들은 네팔에서 월경 인식 교육을 한다. 매우 필요하고 고마운 움직임이다.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 관습과 인식은 남아있기 때문에 활동가가 오래 찾을 수 있는 지역에서 해야 한다. 활동가들이 떠나고 나면 현지 여성들은 아직 남아있을 편견 속에 고립될 것이다. 그 누구도 월경을 한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선 안 된다. 그럼에도 나는 몇 년째 네팔에 들어가 차우파디의 흔적을 외면하고 침묵하다가 떠나 왔다. 우리가 떠난 후의 구조적 차별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길고 깊은 변화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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