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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Jan 04. 2024

직업으로서의 PD

이것도 직업이야. 넌 그 생각이 좀 부족한 것 같아.


 성 PD님이 말씀하셨다. 그와 함께 <TV 완전정복>을 만들던 때니까, 2007년쯤일 거다. 왜, 무슨 이유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편집실에서의 그 말은 지금까지도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


 직업으로서의 PD라...


 그 뉘앙스는 PD로서의 자질이나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PD라는 직업인으로서의 태도일 테다.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조용히 일만 했던 겨우 3년 차 조연출이었던 내게, 그분은 어떤 결핍을 보셨던 걸까.




 직업인으로서 PD의 태도와 자세에 대해, 인터넷엔 수많은 'PD론'이 있다. 과거 스타 PD였던 주철환 PD님과 송창의 PD님은, PD가 갖춰야 할 자세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창의력.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발상의 전환으로 새로운 걸 시도해라.

 둘째, 친화력. 전문가를 묶는 전문가로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라.

 셋째, 추진력. 생각을 실제로 구체화시키는 열정과 집념을 가지고, 일에 미쳐라.

    

 이것이 PD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갖춰야 할 자세라면, 성 PD님의 말씀이 옳았다. 나는 단 하나도 가지지 않았다. 그 외, PD를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새로운 것에 항상 진취적으로 도전하고, 즐겨라.
활동적인 성격, 뛰어난 순발력, 폭넓은 지식과 상식, 외국어 실력을 갖춰라.
봉사·여행·독서, 방송·신문을 통한 직간접적인 사회 경험을 많이 해라.
인간의 심리와 대중의 니즈를 파악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라.
많은 사람의 의견을 조율·통합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리더십을 가져라.
공공선에 대한 뚜렷한 주제 의식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춰라.
방송을 통해 재미와 의미를 함께 전달해라.
한 프로그램의 경영자로서, 주인의식을 가져라.
방송은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쪼개서 볼 정도로 관심을 가져라.


나는 단 하나도 가지지 않았다.




 내게 태도나 자세라고 할 만한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한 가지는 나의 '기준'이다. 그건 학창 시절부터 세워졌다. 망설였는데, 자의식 과잉이니까 얘기해야지.


 고등학교 졸업 후, 누가 하라는 공부에 반감을 가져 힘든 청춘을 보냈지만, 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했다. 비록 모두가 공부하지 않았던 할렘가였지만, 두 번을 제외하고, 12년 동안 전교 3등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종종 내게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고 하신다.


 어쨌든 잘했고, 부모님은 시키지도 않으셨고, '이번에는 꼭 100점을 맞겠어.', '1등을 해서 저 녀석을 이기겠어.'란 마음은 1도 들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승부욕이 없었고, 꾸준히 애쓰지도 않았다. 놈팡이처럼 살다가, 시험을 앞두곤 언제나 벼락치기를 했다.


 , 벼락치기를 할 땐 '기준'이 있었다. 외우든 어쩌든, 내 성에 찰 때까지 해야 했다. 목적이 있거나,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중간에 멈추면 그냥 찜찜했다. 찜찜하지 않을 때까지 파면, 독서실엔 혼자 남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서울대 의예과 수석합격자의 글과 같았다.


 "독서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를 한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분명 내가 제일 공부를 잘하는데, 내가 제일 열심히 한다."


 서울대는 못 갔지만, 어쨌든 나도 그렇게 문과 전교 2등이나 3등을 했다. 언제나 전교 1등을 하던 넘사벽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앞에서 진짜 물개 박수를 쳤다.


 "야~ 너 진짜 짱 먹어라!"


 '이만하면 됐다. 더 이상은 무리다.'란 생각이 들 때까지 하니, 시기심 0%, 순도 99% 리스펙이 나왔다.

 이건 방송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사수가 없던 난, 내 성에 찰 때까지 편집실에서 밤을 새웠다. '됐다.' 싶으면 독서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편집실엔 혼자 남았다. 일에 미친 게 아니었다. 명작을 남기고 싶거나 칭찬받고 싶은 욕심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찜찜하지 않으려고 그랬다. 그래서 후배라도, '진짜 대단하구나.'란 생각이 들면, 절로 물개 박수가 나왔다. 전교 1등 그 녀석한테 그랬던 것처럼.


 이 자세는 성격이 돼서, 지금까지도 부작용을 낳고 있다. 10만 원짜리든, 100만 원짜리든, 내 성에 찰 때까지 하니, 퀄리티가 비슷하다.


 한 번은 친했던 PD 형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홍보영상 3편 편집해야 하는데, 돈이 100만 원밖에 없단다. 워낙 예전부터 알던 형이니 그도 내 스타일을 알았고, 나도 부담 없이 돕는 셈 치고 맡았다. 그런데 믿고 맡긴다던 그에게 다음날 전화가 왔다.


 "잘하고 있지?"

 "네, 하고 있어요. 얼른 해서 드릴게요."

 "근데, 이번 거 진짜 잘해야 돼. 신경 써줘."

아니, 이 형 왜 이렇게 부담을 주지. 웃으며 농을 쳤다.


"아ㅋㅋ 한 편 30만 원 주고서 뭘 그렇게 바라세요. 알아서 할게요. 걱정 마세요ㅎㅎ"

전화를 끊고 다시 한창 일을 하는 중, 톡이 왔다.


 "일단 한 편만 하는 거로 하자. 그거 보고 역량 안 되면 자른다."


 야~ 이 형 톡 날리는 꼬라지 좀 보소.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길래, 못된 것만 배웠네. 정말 30만 원어치만 해줄까... 하지만 난 또 그러지 못했다. 내 '기준'에 찰 때까지 해서 넘겼고, 그 형은 남은 두 편도 부탁한다고 했고, 난 싫다고 했다. 이러니 자꾸 거래처가 끊기지... 성 PD님 말씀처럼, 난 정말 PD로서의 직업의식이 결여됐다. 친화력이 있어야 된다는 PD로서의 자세가 글러먹었다.




 내게 있었던 또 다른 태도는 '미안함'이었다. 팀에선, 밤새워 일하는 선배들, 후배들, 작가들에게 미안했다. 현장에선 이게 뭐라고, 시간을 빼가며 참여해 주는 출연자들에게 미안했다. 정확한 디렉션도 주지 못하면서, 의지만 하게 되는 스태프들에게 미안했다.


 미안해서, 능력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들 얘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눈치가 보여서, 가능한 ASAP로, 조금이라도 모두의 요구가 반영될 수 있도록 머리를 굴려대고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간혹 어떤 사람들은 내게 리더십도, 추진력도 있다고 얘기해 줬지만 개뿔, 그건 그냥 미안함에 벗어나고픈 나만을 위한 행동들이었다. 프로젝트를 구체화시키려는 열정과 집념 따위. 그저 폐만 안 끼치고, 욕이나 안 먹고 싶었다. 역시 난, PD로서 직업의식이 결여됐다.




 이렇게 직업의식이 부족한데도, 오랜 시간 PD란 직업으로 먹고살 수 있었던 건, 사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다. 20년 동안, 인터넷에 떠도는 '바람직한 PD로서의 직업의식'을 다 가진 PD를 본 적도 없다. 다들 뭐  개씩은 문제가 있다. 내 미천한 인간관계로, 일부를 겪고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본 적 없다.


 되려 인터넷의 조언들은, PD로서 겪었던 나의 콤플렉스다. 마찬가지로 조언을 던진 그들의 콤플렉스 아닐까? 마치 좋은 대학교에 가지 못하고, 영어를 못해 사회의 불이익을 받아온 학부모들이, '내 자식만큼은 그런 고초를 겪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던진 조언 같다.


 한 번쯤 귀담아는 듣되, 휘둘릴 필요도, 절망할 필요도 없다. 저건 PD라는 직업인의 필수 조건도, 자세도 아니다. 그저 군자로서의 PD를 그린 이상향이다. 그리고 우리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현실 세계엔, 그런 군자는 희박하다. 있다면 김태호 PD나 나영석 PD처럼 성인의 반열에 올랐겠지. 그리고 이 세계는 몇 안 되는 성인이 아닌, 우리 같은 사람들로 굴러간다.


 직업인으로서 PD를 꿈꾸는 사람들이 저런 조언들에, 본인을 채찍질하고, 태생적 기질을 바꾸려는 괜한 노력으로 탈진해버리거나, '난 안돼'라며 좌절하고 상처받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더불어, 이미 직업을 삼은 신입 PD님들도 '좋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위해, PD란 이래야 한다'는 선배의 조언이나, 업계의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한다. 프로그램 연출도 빡센 마당에, 모질고 강한 본인의 리더십까지 연출하며, 집에서 홀로 우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렇게 한다고 좋은 성적을 얻는 것도 아니고, 성적이 안 좋다고 나쁜 프로그램도 아니다. 힘든 가면을 벗은 당신의 프로그램, 그 누군가에겐 인생작이다.


 고정관념을 탈피해야 하는 게 PD의 직업의식 중 하나란다. 'PD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묶여 고통받지 않기를 정말 진심으로 바란다.



도서 <직업으로서의 PD>

http://aladin.kr/p/mRs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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