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공명(현장에서 느끼는 감동)

건축사유 : 땅과 사람의 교감 05

by 정로각심


건축은 성립과 동시에 변화의 동적 선상에 위치한다. 이 말은 건축의 완성은 구축이 완료된 시점이 아니라, 건축으로서의 기능이 종료된 시점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유추해 낼 수 있는 의미는 건축의 기능이 종료될 때까지 건축은 미완의 상태라는 것이다. 결국 건축은 계획과 완공이 끝이 아니라 존재하는 동안 필요 또는 기타의 이유에 의해 지속적으로 공간이 축소되거나 확장되고 형태가 변형된다.


따라서 건축은 완결된 존재가 아닌 지속적 변화에 순응하는 유기적 존재이기도 하다. 유기적 존재 또는 유기적 건축이라는 말은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근대 이후부터 건축의 양식사에서 사용되어 온 말이다.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이 대표적 유기적 건축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자신의 건축에서 유기적 건축을 말했다. 가우디의 건축은 자연의 유기체적 형상을, 라이트의 건축은 자연과 통합된 건축을 이야기했다. 이들 두 사례는 건축의 성립과정에서 다루어진 유기적 개념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은 건축의 성립 이후, 사용되는 가운데에서의 변화이다. 즉, 여타의 필요에 의해 형태가 변형되거나 공간이 축소 또는 확장되는 경우이다. 이미 건축가의 손을 떠난 상황에서 건축이 스스로의 필요성에 의해 유기적 변화가 진행되는 경우이다. 근현대 건축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종묘이다. 종묘는 건축의 성립(1395년 창건, 1608년 중건) 이후, 시간에 따라 필요에 의해 성장한 건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종묘는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제례시설로 종묘의 공간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모셔야 하는 위폐가 늘어남에 따라 필요할 때마다 좌우로 공간이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공간의 확장은 형태의 변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좌우의 길이가 100m가 넘어가는 종묘 정전의 규모, 수직적으로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수평적으로 휴먼스케일을 넘어가는 장대한 규모에 크게 감동하지만, 조선왕조의 마감과 함께 종묘 정전의 유기적 성장도 멈추었다는 것까지 생각하는 이는 잘 없다. 종묘에 대해서는 다시 다루기로 한다.




변화하는 것에는 완성이나 완결이 있을 수 없다. 건축의 완성은 존재하고 있는 동안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가 마감될 때 타의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건축의 완성은 곧 소멸이라는 등식 관계가 성립된다. 완성과 소멸을 향한 건축, 이율배반적 지향, 이것이 건축의 존재 방식이기에 건축을 문화유산이라는 틀에 고정시키는 이유이다. 문화유산은 순간을 박제하여 관찰자에 의한 찰나적 완성과 순간적 영원을 유도한다. 건축의 이율배반적 굴레를 벗겨내는 가장 그럴듯한 방법이다. 우리가 건축에 환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제된 건축이라고 죽은 건축일까? 아니다. 건축은 혼자 있을 때 죽은 것처럼 침묵하지만, 대상과 마주하면 다시 깨어나 공명한다. 즉, 우리가 애써 시간을 내어 건축 문화유산을 찾아가고, 또는 기념비적 건축물을 찾아간다는 것은 이미 건축과의 대화의 시작과 준비단계에 해당한다. 그리고 건축은 내가 직접 찾아가 그 앞에서 관찰하는 순간 나와의 공명을 시작한다. 그 울림은 생각보다 강하다. 건축의 주파수와 나의 주파수가 맞아떨어질 때 감동이 일어난다.


감동을 기록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록의 방식도 다양하다. 글로, 사진으로, 눈과 마음으로. 건축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느낌을 가능한 온전하게 기록하고자 하지만, 건축의 감동과 느낌은 현장에서 완전하다. 글로든, 사진이든, 마음으로든, 현장을 떠난 기록은 복제된 감동이며 시간에 희석된 감동이다.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는 감동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건축을 직접 찾고 여행을 하는 이유이다. 자주 가야 한다. 한번 보고 다 봤다는 말은 자만이며 실수일 뿐이다.


건축이 주는 감동은 현장에서 느끼는 것이다. 흐려지면 다시 찾아 감동을 새것으로 리셋해야 한다. 건축은 유기적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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