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유 : 땅과 사람의 교감 21
'건축의 완성은 소멸이다. 소멸의 결과는 건축이 존재하면서 획득한 가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난 글 <건축의 완성>을 마무리 지었던 문장이다. 이 문장은 완성과 소멸이 상반된 개념으로 논리학적으로 의미가 분명한 명제가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대립된 개념의 충돌로 인해 우리의 사고와 판단에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 의미가 다소 불분명한 이유는 글에서 '완성'에 비해 '소멸'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 글의 결론은 온전한 의미를 가지는 문장으로는 아직 논리적 오류가 있다.
하나의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 분명해지려면 명제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모두 만족하여야 한다. 즉 완성의 기준과 소멸의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나는 건축의 완성은 완공이 아니며, 완공은 여전히 변화의 가능성을 품은 '진행 중'인 상태로 설명하였다. 따라서 건축의 완성은 진행이 멈춘 상태인 '소멸'과 동시에 있다고 의미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완성은 사전적으로 끝이나 마지막을 의미하기에 건축에서의 완성을 '완전성'으로 보자고 동의를 구하였다. 하지만, 이 주장에서 소멸의 기준이 모호하였다. 다만 건축의 완성을 결정짓는 소멸은 물리적 실체의 소멸과 영속성을 통한 완전성으로 설명될 수 있음만을 이야기하였다.
'건축의 완성은 소멸이다'라는 주장이 하나의 온전한 명제로 성립되려면 앞선 글에서 제시하지 못한 소멸의 기준을 좀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이 글은 '소멸'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소멸은 '사라져 없어짐'이 아니다. 뭔가 설득력 있고 자세한 부연 설명을 하고 싶은데 나의 생각에 딱 맞아떨어지는 뭔가를 찾지를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소멸은 건축을 좀 더 형이상학적이고 고차적 정신성을 가진 예술적 존재로 이해하였을 때,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보편적 인식과 판단을 넘어서는 사상이나 가치 같은 것의 일종일 수 있다. 말이나 글로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기 힘든 뭔가이다. 그래도 쉽게 이야기하면 사전적 의미인 물리적 실체의 소멸은 '정신성(의 계승)'으로, 물리적 소멸은 아니지만 변화가 중지된 건축은 '영속성(의 확보)'으로 완전성이 확보된다는 의미이다.
소멸의 의미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고 하였을 때, 존재는 소멸의 조건이다. 그리고 소멸은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소멸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의미를 가지며, 존재가 있기 때문에 소멸은 가치를 가진다. 끝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소중함이 있으며, 소중하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진정성이 확보된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소멸을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으로 보고, 생성과 소멸은 서로 반대가 아닌 '일련의 과정'이라고 하였다. 즉 소멸은 '변화의 리듬'이며, 세계가 살아 '움직이는 방식'이다. 이데아의 완전성을 주장한 플라톤은 소멸을 '불완전한 세계의 속성'으로 규정하였으며, 세계를 형상과 질료로 구분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은 사라지지 않으니, 소멸을 '본질의 변형'이라고 하였다. 스토아학파는 소멸을 우주의 조화 속에 포함된 자연의 '순환적 법칙'이라 하였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무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소멸은 '자연스러운 흐름'의 일부분일 뿐이다. 소멸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에는 '완전한 소멸은 없다'고 한다. 그들에게 소멸이란 신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개념이다. 특히 영혼이 더 그렇다. 구원을 받으면 천국에서 영원하며, 심판을 받으면 지옥에서 영원하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과학은 소멸에 대한 관점을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의 사상에서 계승한다. 물리학의 질량보존의 법칙에서는 모든 물질은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형태로 '변환'될 뿐이다. 그리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서도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으며 운동·열·전기·빛 등으로 '전환'될 뿐이다. 생물학의 소멸은 모든 유기체는 분해되어 새로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만 열역학 제2법칙에서는 소멸이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증가로 이어지지만, 비가역적이라서 질서가 잡힌 상태로 돌아가는 순환의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현대의 IT기술에서의 정보(Data)도 열역학 제2법칙의 성질을 따른다고 한다. 정보는 끊임없이 생산되지만,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비가역적으로 흐르는 과정이라고 하기도 한다. 데이터는 이러한 성질 때문에 소멸도 순환도 없다. 이 말은 엔트로피의 무한 증가를 의미한다. 그 끝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상할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데이터(교)를 호모 사피엔스의 잠재적 위협으로 판단한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건축과 소멸은 반대의 개념이다. 건축은 구축된 상태, 소멸은 사라진 상태로 물리적으로나 관념적으로나 모순된 개념이다. 두 개의 모순된 상태가 논리적으로 대립된 상태는 역설로 설명된다. 역설은 사전적으로는 반대의 의미이나, 사용 방법에 따라 상태를 강조나 사고의 집중으로 유도하는 수사적 기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주의나 관심 또는 강조를 위한 수사법이다. 하지만 본질은 그곳에 있지 않다. 실체의 단순한 이해를 벗어난 본질의 추구는 '완성'을 단순하게 '있음'이 아닌 어디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있음'으로 사고의 확장을 유도하며, '소멸'을 그냥 '사라짐'이 아닌 무엇이, 언제, 왜 '사라짐'으로 사고의 반성을 유도한다.
쉽게 말해 건축을 '소멸'이라는 사유의 폭이 넓혀 줄 수 있는 개념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의미이다. 사라진 것에 대한 미련보다는 사라진 것이 남긴 이야기와 교훈에서 계승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이 있다면 그 남은 것이 무엇 때문에 남을 수 있었는가를 사유해 보자는 것이다. 이제는 완성과 소멸이 완전히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완성은 소멸로 가는 과정에서의 교훈으로, 소멸은 완성됨으로써 남겨진 기억으로 하나의 완전성을 확보하는 개념으로 사유를 확장해 보자. 그렇게 되면 완성과 소멸은 분리된 것이 아닌 경계를 공유하며, 항상 동시적이며, 끊김이 없는 연속성으로 이어진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완성과 소멸의 경계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형이상학과 자연학에서도, 그리고 종교와 첨단 IT기술에서도 소멸은 끝이 아니며, 정지도 아니며, 죽음도 아니다. 오로지 소멸은 소멸을 거부하는 인간에게만 끝의 개념일 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건축에서도 성립될까? '건축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는 의미가 성립될까? 나는 이미 건축의 완성은 소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철학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소멸은 끝의 개념이 아니다. 소멸은 순환이며, 변화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그렇다면 '건축은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건축의 완성이 소멸이라면 완성이 없다면 소멸도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완성이 있든 없든 소멸은 있다. 소멸이 실체에만 적용되느냐, 아니면 관념에까지 확대되느냐의 문제이다. 실체로만 보면 완성된 것이 소멸되면 아깝고 그렇지 않은 것은 좀 덜 아까운 문제이다. 건축이 실체 이상의 관념적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소멸의 의미와 기준은 훨씬 자유로울 수 있다.
보편적인 건축의 삶은 완성에서 유지, 그리고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이는 자칫 직선적인 흐름으로 보이지만, 사실 건축의 삶은 그렇게 직선적이지 않다. 건축은 완성과 동시에 소멸의 단계에 있다는 논리를 따르면, 과정은 시작과 끝이 없어지며 완성과 소멸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아니 사라질 수도 있다. 건축은 다양한 시간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존재이다. 도시의 시간 위에서, 사회의 시간 위에서, 장소의 시간 위에서 사람의 시간을 품고, 기억의 시간을 품고 있다. 모든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르며 체감 속도도 다르다. 건축의 완성과 소멸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이유이다. 소멸과 완성은 끝과 시작으로써 가까운 것이 아니라, 한정이 없는 과정의 곳곳에서 서로 가깝다.
그러므로 건축은 소멸되어도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면서 소멸될 수 있다. 소멸됨으로써 존재하는 것은 건축이 가졌던 '정신의 계승'으로, 존재하면서 소멸되는 것은 건축의 '가치를 고정'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소멸은 완전한 파괴가 아닌 '지양(止揚, Aufheben)' 임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지양이란 '피하다, 제거하다' 등의 의미가 아닌, 더 나아가 '보존하다'라는 뜻까지 포함된다. 니체는 생철학을 통해 소멸을 '계승'의 에너지로 보고 파괴는 곧 '창조'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사라짐으로 남겨진 정신은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계속 살아남는다. 시대의 정신은 소멸할지라도 그 경험은 응축된 언어와 문화로 후대에 계승되어 정체성을 형성한다.
건축의 소멸과 새로운 시작 - 계승
소멸됨으로써 존재하는 건축의 소멸은 건축의 정신성을 새로운 건축에게 계승을 위한 자리를 비워주는 과정이며, 계승은 소멸한 대상의 가치를 재해석하여 현재화하는 과정이다. 소멸 없는 계승은 정체되어 썩게 되고, 계승 없는 소멸은 그저 허무한 끝일뿐이다. 건축의 완성을 소멸로 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소멸은 물리적 실체가 소멸되면서 남겨진 '정신성의 계승'이다.
건축의 존재는 성립과 완성이라는 두 개의 관점과 단계가 있다고 하였다. 성립은 준공에, 완성은 평가에 그 기준을 둔다고 하였다. 성립과 완성이 있다면, 철거와 소멸도 있어야 한다. 세상에 영원은 없다. 건축이 소멸되는 이유와 방식은 다양하다. 가장 상식적인 이유는 건물의 노화에 따는 물리적 소멸이다. 가끔 건축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시대정신의 인정을 획득한다면 법적으로 권한으로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생명이 연장되기도 한다. 그렇지 못한 건물은 기능과 용도의 종료로 인해 해체를 통해 소멸된다. 그리고 천재지변이나 전쟁과 같은 불가항력적 외력에 의해 구조적으로 재생 불가능의 파괴가 있을 경우 소멸의 위기를 피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사회적 이유로 인구 감소, 경제 쇠퇴, 지역 소멸, 공동체 파괴 등에 의해 건축의 사용이 극히 제한되면 소멸의 수순을 밟게 된다. 특별한 경우, 용도와 공간이 변경되어 재생의 길을 가기도 한다.
건축의 수명은 생각보다 길다. 우리는 지금 재건축을 밥 먹듯 하는 아파트공화국에 살고 있기에 건축의 수명은 기껏 3~40년쯤 되나 하고 쉽게 생각할 뿐이다. 부실시공이나 천재지변 등이 없다면 건물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버텨낸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온전한 기능을 하느냐가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이미 수백수천 년의 시간을 버텼다는 것은 기능적 효용이 아닌 문화적·정신적 가치가 먼저 작동되어 건축의 생명에 깊게 관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동된 가치가 앞에서 언급한 건축이 관념적 실체로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건축의 물리적 실체가 사라지면 관념적 실체도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다.
건축을 단순하게 물리적 실체로만 보면 소멸이란 철거와 파괴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소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건축은 물리적 실체를 넘어 의미를 저장하고 있는 관념의 실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건축이 품고 있는 관념은 다양하다. 사람, 기억, 장소성, 연결성, 권력, 상징, 기능 등 다양한 관념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철거나 파괴라고 하면 콘크리트나 철골 덩어리의 해체이겠지만, 소멸이라고 하면 이들 건축을 지탱하고 있던 의미 복합체의 분해라는 의미가 더 적절하다. 따라서 건축의 소멸은 분해된 의미들의 재정리와 새로운 사용을 위한 계승으로 이어져야 한다.
건축의 물리적 소멸은 단순히 건물 하나가 사라지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마을에서 건축이 담아 온 기억·역사·생활공간의 상실과 크게는 공동체의 해체까지도 이어진다. 건축은 존재 방식에 따라 물리적 구조물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삶의 흔적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한다. 그러한 건물이 사라질 때, 그 지역의 정체성과 기억도 함께 소멸한다. 따라서 건축의 소멸은 단순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계승은 상실을 극복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일 수 있다.
가끔 물질적 소멸을 비껴가는 소멸(가치의 고정)이 있을 수도 있다. 문화유산 등으로 보존되어 박제되는 경우이다. 여기서 박제된다는 의미는 건축은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변화가 중지된다는 의미이다.
소멸의 또 다른 방법 - 복원
보존과 복원은 다른 의미이다. 보존은 사라지기 전에 유지하는 것이며, 복원은 사라진 것을 원형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두 개념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발생되는 혼란을 막고자 보존을 복원의 개념 안에 포함시키도록 한다. 여기서 말하는 소멸은 완전성으로 중지된 의미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보존된 것과 복원되어 보존된 것 모두 영속성이 확보된 소멸이다.
아주 우연한 이유로 건축이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거나 소실의 운명을 맞는 경우가 있다. 천재지변이나 화재 등의 이유로 건물의 대부분이 상실된 경우이다. 이럴 경우 해당 건축이 가치가 없다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며, 만약 그 건축이 존재하면서 역사적·사회적·문화적 가치 등을 부여받은 건축이라면 완전한 소멸은 맞지 않을 수 있다. 시대의 정신을 담은 건축으로 보존되거나 사라졌다가 복원되기도 한다. 앞에서 말한 건축 문화유산이 이에 해당한다.
소멸되어 건축의 정신을 계승한 건축과 소멸 이후 복원이라는 새로운 위치를 확보하는 건축의 차이는 무엇일까? 당연히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의 차이이다. 물리적 소멸은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 하지만 복원은 특별한 이유로 훼손 또는 소실된 건축의 가치를 원형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엄밀하기 따지자면 계승은 건축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며, 복원은 가치의 회복을 의미한다. 물론 모든 복원이 가치를 회복하는 것은 아니다. 복원은 훼손된 형태의 원형을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형태의 원형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 방식과 재료의 원형도 회복해야 하며, 원형이 가지고 있던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도 회복하여야 한다.
만약 법으로 지정된 문화유산이 그 원형이 훼손되어 가치를 상실하거나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문화유산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유산의 지정 해제가 이루어진다. 이후 원형 복원 과정과 재심의를 거쳐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숭례문이다. 2008년 방화 사건으로 전소된 숭례문은 원형 복원을 통해 문화유산(국보)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는 화재 등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복원이 되더라도, 원형의 부재를 얼마나 살릴 수 있었는지, 전통 기법을 준수했는지 등에 따라 문화유산의 지위가 유지되거나 아닐 수도 있다.
복원된 건축은 완벽한 공법과 재료 등으로 완벽한 원형으로 복원되더라도 우리의 마음에 한 번 새겨진 상처도 아무 일 없듯이 복원이 될까? 지금 내가 숭례문 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면, 예전에 느끼던 경외감, 공경심, 자부심, 숭고함, 미적 감동 같은 것들이 다시 되살아날까? 살아났으면 좋겠다. 살아나야만 그 소멸이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건축의 소멸 - 경계에 선 천년 고찰 <고운사>
고운사가 산불로 피해를 입은 지 딱 1년이다. 작년 3월 25일 자 뉴스에서 천년고찰 의성 고운사가 대형 산불에 의해 전소되었음을 크게 알렸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아픈 마음을 추스리며 중간에 현장에 한 번 다녀왔다. 현장은 뉴스보다 더 처참했다. 고운사는 나에게 특별한 사찰이다. 고등학교 학창 시절 방학이면 가끔 학생회 수련을 위해 찾던 곳이다.
교통이 불편한 오지여서 좋았고 산속 깊은 곳에 있어 좋았다. 오래된 전각들이 좋았고 개울 위에 올라앉은 가운루가 좋았다. 오래된 기와 사이로 피어오른 와송이 좋았고 새벽에 가라앉은 짙은 안개가 좋았다. 비가 오면 만덕당 처마 끝을 흐르는 빗물이 좋았고 흙 마당에서 피어오르는 흙냄새가 좋았다. 새벽이면 예불 소리가 좋았고 공양시간 밥 짓는 향기가 좋았다.
모든 것이 좋아 생각이 날 때마다 들르던 사찰이었다. 그런 고운사가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고운사는 신라 681년(신문왕 원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인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당시의 사찰 규모는 5개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가 있었다. 일본강점기 조선불교 31 총본산이었으며, 현재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의성, 안동,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개 사찰을 관할한다.
화재로 상당수의 전각이 전소되었으며, 전체 30개의 건물 중 대웅보전(신축), 일주문, 천왕문, 고불전, 나한전, 명부전, 삼성각, 그리고 신축된 문화관과 승가대학 건물만 겨우 살아남았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연수전(보물),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유산)는 불에 타 전소되었으며, 석조여래좌상(보물)은 화재 시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나한전 옆에 있던 삼층석탑(경북문화유산자료)은 화마의 피해를 비껴갔다.
고운사는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를 담당하는 거찰로 지역 불교의 큰 역할을 담당하는 사찰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석사와 봉정사도 고운사의 말사이다. 전각의 상당수는 전소되었으나, 현재 불사 복원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고 있다. 연수전과 가운루를 포함한 소실된 전각들은 대부분 복원될 것으로 보이나, 현재 연수전과 가운루는 지정 문화유산으로 문화유산 해제 절차가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해제 절차가 진행되기 전에 전 국민적 함의를 통해 복원이 이루어진 숭례문 등의 사례가 있듯이 고운사의 문화유산도 그렇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국가유산청의 결정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복원 과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면, 문화유산의 가치가 계속 인정되어 해제가 되어도 재지정이 가능할 것이다. '건축의 완성은 소멸이다'라고 하였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완전하게 사라지는 소멸이 아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국민이 원하는 것도 이러한 소멸이 아닐 것이다. 복원이 제대로만 된다면 영속성이 확보된 완성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내 좋았던 추억들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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