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완성

건축사유 : 땅과 사람의 교감 20

by 정로각심

예술의 완성과 미완성


완성과 미완성, 그 차이는 어디일까? 기술과학에서는 완성이란 설계된 바대로 결과가 마무리되었을 때 완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이나 문학 등에서도 계획된 바대로 결과가 도출되었을 때 완성이라 할 수 있는가? 일부는 완성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일부는 아닐 수 있다. 창작 분야에서는 계획과 결과물의 일치보다도 작가의 창작 의도와 의지가 마무리 또는 종료되었을 때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창작에서는 계획은 단지 계획일 뿐이며, 창작의 과정에서 충분히 최초의 계획 의도와는 달리 다른 방향으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창작의 결과는 계획보다 작거나 계획보다 넘칠 수 있다. 계획보다 규모가 작거나 내용이 작아도 작가가 만족을 하면, 그 단계가 완성이며 또 반대일 수도 있다. 예술에서의 창작은 계획과 결과의 완성이 아닌 작가의 마무리 선언을 통해 결정된다.


그러나 가끔 작가의 의지가 창작의 마무리에 반영될 수 없는 상황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작가가 완성을 선언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사건사고가 발생할 경우, 즉 작품의 진행이 더 이상 불가능할 경우, 이 상태는 완성에 다다르지 못한 미완성의 상태가 된다. 우리에게 미완의 유고로 남은 작품들이 그러한 경우이다.


미완으로 남은 유명한 글과 그림이 많다. 이러한 작품들은 제작 당시에는 미완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지만, 시간이 흘러 우연한 기회에 유고로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완성을 미룬 경우도 있겠지만, 갑작스러운 삶의 마감으로 인한 미완성도 있다. 그림과 같은 작품은 미완의 상태가 결국 완결된 상태로 확정되어 후대에 전해지며, 글과 같은 작품은 작가 자신에 의해 영원히 묻혀버리거나, 가끔 친구나 가족들에 의해 어느 정도 정리 보완되어 완성작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미완으로 남은 작품들


미완으로 남은 작품들 중, 시대가 예술성과 작품성을 인정한 글과 그림을 몇 개 살펴보자. 여기서 시대가 인정한 작품이란 단순히 인기가 많은 상태를 넘어, 작품이 '시대의 정신에 부합했는가?' 그리고 '시간의 여과기를 통과했는가?'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시간의 여과기'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한시적 유행, 상업적 거품, 도덕적 가치, 정치적 이해관계 등 작품을 둘러싼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작품의 본질적 가치만 살아남은 과정을 의미한다. '시간의 체'라고 하기도 한다. 누가 했는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비유가 너무 좋아서 기억하고 있던 말이다.


회화에서 미완으로 남은 대표적인 작품의 예는 다빈치의 <모나리자>이다. 두말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모나리자는 미완의 초상이다. 눈썹이 그려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눈썹을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은 완성작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미완성작이라는 의견이 조금 더 많다. 일설에 의하면 모나리자의 눈썹은 다빈치의 완벽주의적 집착이 만들어낸 미완으로 이 미완의 상태가 작품의 가치를 더 부여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파리의 도시이야기로 잘 알려진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도 미완이다. 그의 글들은 문장은 완성되었으나, 주제가 뚜렷한 문서나 책으로 완결되지 못한 미완의 습작이다. 그는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글이 다듬어지지 않았다. 후대에 그의 글들을 모아 발행한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서구 지성사에서 가장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미완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벤야민의 글은 소멸의 위기를 어렵게 넘겼기에 지금 우리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완성과 소멸은 아주 얇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있다.


모든 건축은 미완이다.


그렇다면 미완으로 남은 건축은 없는가? 과거 또는 최소 반세기 이전에 미완이었으나 여타의 이유로 건축가가 사라진 뒤, 당시 미완의 모습 그대로 예술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건축은 없을까? 굳이 시간을 반세기 전으로 한정한 이유는 건축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과 다르기 때문이다. 건축에서 반세기 이내의 시간은 완결을 이야기하기에 이른 시간이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완결된 미완이 아니라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진행 중인 미완의 건축이라 할 수 있다. 1882년에 착공하여 140년이 넘도록 지어지고 있다. 이 건축은 미완성인 상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가우디는 생전에 "내 건축주(신)는 서두르지 않는다"며 완공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중세시대에도 교회건축 대부분이 완공까지 3~400년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당시의 건축은 대를 이어 지어야 했기에 도제시스템이 중요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2026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말고도 미완의 건축을 찾아보면 대부분 설계단계에서 중단된 건축이 나타난다. 그러나 설계는 설계일 뿐이며, 착공도 안 했으니 미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아마도 어디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쉽게 찾을 수 없는 이유는 건축은 미완이 작품으로 인정되거나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건축은 미완의 상태로는 시대의 정신을 담아내기 힘들고 또 시간의 여과기를 통과하기도 어렵다. 더 큰 이유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이 땅(대지)이라는 가치 있는 자원을 완성도 안된 건물이 차지하도록 방치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미완으로 남은 건축이 없다고 모든 건축은 완성된 존재라고 쉽게 단정을 지을 순 없다. 물리적 완성의 개념으로 바라보면 지어진 모든 건축은 완성이겠지만, 건축은 정신성에 의해 예술의 위상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건축에서의 완성은 어휘적 또는 물리적 완성의 개념만을 적용하기보다는 완성의 철학적 또는 정신적 개념도 고려되어야 한다.


고전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성'을 '잠재성의 실현'으로 보았다. 잠재성이란 완성이 정지나 종료된 상태가 아니라 '충만한 활동성'이라는 의미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불교는 '완성'을 '자유'로 이해했으며, 기독교는 '완성'을 '신'에 속한 상태로 보았다. 그리고 도가에서는 '완성'을 '미완성의 자연스러움'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근대에 와서는 '완성'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 칸트는 인간은 이성적으로 완성을 추구하지만 도달할 수 없으며, 완성은 '지향하는 바'일 뿐이라고 하였다. 헤겔은 '완성'을 도달하기 어려운 '절대정신'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현대는 근대의 개념을 이어받아 '완성'이란 개념 자체를 비판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완성을 '닫힌 구조'로 보고 삶은 '항상 생성 중인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현대철학에서의 '완성'은 '종료'가 아니라, '진행 중'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건축의 성립을 프로세스에 맞추게 되면 완공이 완성이 될지는 몰라도,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공간태로 보면 진행 중인 미완의 상태가 된다. 따라서 모든 건축은 미완이다.


건축에서 완성이 없다면 '완성'을 '완전성'으로 봐도 되나?


모든 건축은 미완이며 완성이 없다면, 건축의 완전성은 어떻게 확보되어야 할까? '건축은 완성이 없으며 영속성을 통해 완전성을 부여받는다'라고 할 경우 이는 모두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까? 여기서 한 가지 더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은 '완성'이 없다면, '완전성'을 완성으로 봐도 되는가이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완성'과 '완전성'은 다른 의미이다. '완성'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침표를 찍는 '일련의 사건'이라면, '완전성'은 흠결이 없는 '궁극의 상태'를 말한다.


존재의 흐름이 변화의 과정에서 벗어난, 또는 미완의 단계를 마감한 건축은 '완성'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완전성'이 맞을까? 만약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흠결을 가진 건축이라면 시대와 시장의 논리에 의해 철거라는 가차 없는 냉혹한 처분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흠결인가 아닌가는 판단의 결정이 소요되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흠결을 가진 완전성을 확보하지 못한 건축은 사라질 것이니, 건축의 완성을 '완전성'으로 봐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건축은 완성이 없으며 영속성을 통해 완전성을 부여받는다'에서 연장된 논리로 '건축은 영속성이 없으면 완전성도 없다'는 논리도 가능할 것이다. 이는 또다시 '완전성이 없는 건축은 미완이며, 완전성은 영속성을 통해 인정된다'로 논리 확장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영속성을 가지지 못한 건축은 미완이니 완전성을 추구하며 영속적이기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영속성이 시간으로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수적으로 얼마에서 얼마까지 인지가 중요하다. 영속성은 시간적 기준을 수치로 단정하기 어렵다. 알도 로시(1931~1997, 이탈리아 건축가)는 도시의 기념비적 건축이 영속성을 갖는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다. 그는 도시에서 건축이 기념비성(Monument)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100년 이상의 시간으로 보고 있다. 이는 건축이 도시의 기억으로 편입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의미한다.


건축의 완성은 없으며, 영속성을 통해 완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건축은 지어진 후 100년이 넘도록 '소멸'되지 않고 버텨내어 영속성을 유지한다면 완전성이 확보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건축의 존재 목적이 될 수도 있겠다.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요구에 대응하는 건축이 되겠지만, 건축은 예술이며 문화이기에 사용자의 요구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기능성 이외에도 영속성과 완전성을 확보한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을 받는 것도 큰 존재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속성은 어떻게 부여되는가?


따라서 건축의 완전성은 어떻게 결정되는가는 건축의 영속성의 부여 방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건축의 영속성의 부여가 인위적인가 아니면 자연적인가, 강제적인가 아니면 자발적인가 등도 검토되어야 하며, 역사적 가치 보존을 위한 영속성 부여와 사회적 가치 유지를 위한 영속성 부여 등도 고민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영속성의 기준이 작품성인가, 기능성인가, 형태적 온전함인가, 아니면 단순한 논리로 법적인 사용승인과 멸실신고인가 등도 고민해야 할 대상이다. 마지막은 너무 비인간적이다. 건축가의 노력에 비해 너무 성의 없는 결론이다.


건축의 영속성을 작품성으로 부여한다면 작품성은 작품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인가, 작가의 지명도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평가에 의한 것인가도 고민되어야 한다. 또 기능성이 영속성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라고 한다면 기능이 유지되는 시점인지, 아니면 존재의 마감 시점인지도 결정되어야 한다. 또 건축의 형태적 온전함이 영속성의 기준이라면 형태는 항상 변화의 선상에 있으니 모호한 기준이 될 것이다. 기능도 마찬가지이다. 건축의 기능도 용도변경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영속성은 어떻게 부여되는가에 대한 결론은 보류한다. 건축의 완전성을 위한 영속성은 시간과 다음 세대의 정신이 결정할 문제이다. 결국 영속성은 건축이 소멸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역설적 완전성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미완의 글과 그림이 미완성인데도 유명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후대에 와서 그 작가의 지명도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역사, 즉 시간이 그 가치를 부여한다. 시간의 여과기를 통과한 가치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간의 지루함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이로써 아직 영속성을 부여받지 못해 완전성을 얻지 못한 현재 이 땅에서 지어졌거나 지어지고 있는 건축 중에서 완성된 건축은 없다는 말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건축의 완성은 항상 소멸과 같이 있다.


건축의 성은 소멸이다.


건축에서 완공이란 완성이 아니라 완공은 되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형태와 공간기능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에 미완이다. 건축은 소멸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완성이 아닌 미완의 과정이다. 이것이 건축과 타 예술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가끔 문학에서 완성 이후에 내용의 변경이 있을 수 있으나, 원형은 초판이라는 완성된 이름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건축의 변경은 기록물 이외의 원형을 남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건축은 성립 이후 끊임없이 변화의 선상에 존재하며 완성을 향해 진행 중이다. 변화가 진행 중인 건축은 완성이 없다.


모든 건축은 미완성이다. 기타 예술에서의 완성과 미완성의 개념을 건축에 끌어와 붙이다 보니 건축에는 미완성이다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 보였을 뿐이다. 건축의 존재 방식을 반영하면 건축은 완공은 있으나 완성은 없다가 맞는 말이다. 굳이 소멸 이전에 완성된 건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역사와 시간 속에서 시대의 정신에 인정받고, 시간의 여과기를 통과한 건축이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영속성을 부여 받아 완전성이 완결되는 경우가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보다 훨씬 앞선 파르테논 신전은 벽이 없으니 미완인가? 아니다. 파르테논은 신들의 거처로 신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굳이 벽을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파르테논은 신들의 집이다. 파르테논은 미완이 아닌 완결된 건축이다. 파르테논도 변화의 선상에 존재하는가? 아니다 파르테논은 영속성을 세계유산으로 이라는 이름으로 부여받은 변화가 중지된 박제된 건축으로 완전성의 단계에 존재한다. 건축은 그 안을 채우는 사람들의 기억, 시간의 흔적, 그리고 노화(소멸의 과정)와 결합할 때 비로소 매 순간 새롭게 완성 중이 된다. 즉, 완성은 상태가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영속성의 가치가 인정된 건축은 문화유산으로 완전성을 부여받는다.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빈틈이 없는 완벽한 건축은 죽은 건축이다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완벽하게 닫힌 건축은 더 이상 우리의 상상이 끼어들 틈이 없어 금방 잊힌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나 가우디의 성당처럼, '미완'의 속성을 가진 건축만이 후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해석될 여지를 준다. 건축이 존재로서의 완성을 거부할 때, 비로소 세대를 넘어 영속할 수 있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건축은 소멸과 함께 사유의 대상으로 완성된다. 모든 건축의 물리적 실체는 소멸한다. 물리적 실체가 사라진 뒤 남는 '정신적 유산'이 진정한 건축의 모습이다. 건축의 진정한 완성은 건물이 우뚝 서 있을 때가 아니라, 그것이 사라지거나 낡아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남겼느냐에 달려 있다. 건축의 물리적 완성은 허구이며 오직 사유 속에서만 완성으로 존재한다. 건축을 짓는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완벽한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결코 완성되지 않을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축의 완성은 소멸에 있다. 소멸의 결과는 건축이 존재하면서 획득한 가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