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커상 우리는 왜 안되나?

건축사유 : 땅과 사람의 교감 19

by 정로각심

건축계의 노벨상, '프리츠커상'


며칠 전 2026년도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원래는 3월 초에 발표되는데 올해는 조금 늦어졌다. 내부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는 칠레 산티아고 출신의 크로아티아계 건축가 스밀얀 라디치 클라크(Smiljan Radic Clarke, 60)가 수상하였다. 일단 건축인으로써 진심으로 축하의 마음을 전하는 바이다. 실무에 깊이 관계있는 분들은 수상자에 대해 잘 알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생소하다. 프리츠커상 홈페이지에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스밀얀 라디치는 불확실성, 재료 실험, 문화적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작품들을 통해 근거 없는 확신보다는 취약성을 중시합니다. 그의 건축물들은 임시적이고 불안정하며 의도적으로 미완성된 듯, 마치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이고 낙관적이며 조용히 기쁨을 주는 안식처를 제공하며, 취약성을 삶의 경험에 내재된 조건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현장 맞춤형 전략은 다양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각 건물이 정해진 공식에 얽매이지 않고 특정한 환경에서 탄생하도록 합니다. 건물은 레스토랑 메스티조(산티아고, 칠레, 2006)처럼 땅 위에 세워지는 대신 부분적으로 땅속에 묻히거나, 피테 하우스(파푸도, 칠레, 2005)처럼 강풍이나 강한 햇빛을 피하도록 방향을 정하거나, 칠레 선사시대 미술관 증축 건물인 칠레 안테스 데 칠레(산티아고, 칠레, 2013)처럼 완전히 철거하는 대신 기존 건물을 개조하여 형태를 갖추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설계됩니다."
"그의 건축 작품의 특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렵습니다. 그의 디자인은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지만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의 차원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간의 인식처럼,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개념적으로는 모호한 것입니다. 그의 건물들은 단순히 시각적 산물로만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몸으로 체험하는 존재를 요구합니다."



프리츠커상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며, 건축계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큰 상이다. 1979년 미국의 하이얏트재단의 제이 A. 프리츠커(1922~1999)와 그의 아내 신디 프리츠커(1923~2025)가 설립했다. 설립 목적은 상을 통해 건축의 우수성을 높이고 사회 형성에 있어 건축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고자 한데 있으며, 매년 초에 수상자를 발표한다. 수상자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큰 명예가 주어지며, 청동 메달과 상금 10만 달러도 주어진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이지만, 한 개인의 건축사상이 시대와 세계를 대표한다는 것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건축환경과 건축문화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우회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영광스러운 상이기도 하다.


1979년 이래 지금까지 총 55명(49회)의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역대 수상자들의 동향을 보면 일본 9명(8회), 미국 8명(8회), 영국 5명(5회), 프랑스 4명(3회), 스페인 4명(2회), 독일 3명(3회), 스위스 3명(2회), 아일랜드 3명(2회), 캐나다 2명(2회), 중국 2명(2회), 이탈리아 2명(2회), 포르투갈 2명(2회), 브라질 2명(2회), 칠레 2명(2회), 멕시코, 덴마크,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캐나다, 인도, 부르키나파소, 이라크, 모로코가 각 1명이다.(2중 국적 포함) 대부분 개인이지만, 4번은 그룹에게 수여되었다. 프리츠커상은 노벨상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따라서 출신 국가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당장 수상 건축가가 어디에서 활동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매년 하는 고민 '우리는 왜 프리츠커상을 받을 수 없는가?'


나는 건축설계를 직접적으로 행하는 입장이 아니라서 건축실무적인 측면에서는 항상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국내외 건축의 사건들에 대해 그들보다 조금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해왔다. 얼마 전까지 그랬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세계가 한국의 문화에 집중하고 있다. 집중을 너머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분야도 있다. 음악, 영화, 문학, 그리고 음식까지 문화를 주도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의 문화가 세계에 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건축문화에도 조금은 기대가 있었다. 이제는 우리도 프리츠커상 한번 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건축은 아직인가 보다. 사실 이러한 기대는 올해 처음한 것이 아니라, 벌써 10여 년 전부터 우리도 한번 받아보자는 이야기를 해왔던 터이다. 기대와 희망이 커서 그런지 올해의 수상자가 발표되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되지만, 기분이 썩 좋지 만은 않다. 점점 커져가는 기대와 희망의 무게에 더해 여전히 가망 없는 한국건축의 현실 무게가 더해져 어깨에 무거운 짐 하나가 더 올려진 느낌이다. 무게에 눌려 이제는 나 스스로가 객관적이고 냉정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무래도 더 이상 냉정함을 지키고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객관적 입장 좋아하다가 한국건축 망치게 생겼다. 세계건축에서 우리나라만 변방으로 내몰리는듯한 기분이 피부로 절실히 느껴지는 데, 언제까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으란 말인가? 내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 건축을 직접 실천하는 당사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어제와 오늘 신문, 그리고 SNS에서는 수상 소식만 전할 뿐, 예상보다 건축인들의 자성의 목소리가 작은 것을 보면, 분명 그들의 목구멍은 지금 뭔가에 의해 꽉 막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부에서 앓는 소리도 조금씩 들리는 것을 보면, 이제 자신들의 목구멍을 막고 있는 뭔가에 의해 답답하고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몇 년 전 보다 프리츠커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도 많이 없어진 듯한 분위기도 보인다. 좋은 말로 달관이겠지만, 안 좋은 말로는 포기가 될 수도 있다. 관계자들도 속으로는 많이 답답할 것이다.


답답하면 꺼내어야 한다. 끄집어내어 목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한다. 내 목에도 뭔가가 꽉 막힌 것 같아 나는 지금 그것을 끄집어 내려한다. 아마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게 나올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보편적인 이유라고 확대하여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제부터 일부 매체에서는 스밀얀 라디치 클라크의 수상 소식과 함께 매년 그렇듯이 '왜 우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을 수가 없는가?'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반복되고 있다. 수상자에게 축하는 하되, 우리의 건축계에게는 참담한 기분을 숨길 수 없다는 회의적 입장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나도 '왜 우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을 수 없는가?'가 궁금하다. 하지만 내가 더 궁금한 것은 우리가 '왜 프리츠커상을 받을 수 없는지 진짜 모르고 있는 것인가?'이다. 매체에서는 그동안 매년 이러한 고민을 했을 텐데도 아직도 똑같은 질문만 하고, 또 건축가들이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없는 우리나라 건축시장의 한계라는 똑같은 분석 결과만을 내놓고 있다.


이러니 못 받는 것이 아닐까? 원인을 시장과 사회분위기에서 찾으려는 분석은 하나 마나가 아닐까? 제대로 한번 근본 원인부터 분석해 보자. 하기 싫다면, 못하겠다면 건축의 실무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내가 그 이유를 이야기해보자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왜 우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을 수 없는가?' 일단 '왜'라는 질문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적어보고자 한다.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딱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싶다. 그동안 고민 하던 내용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으니 큰 흥분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극히 비평적 입장이니,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온전히 개인적인 문제임을 밝힌다. 세 가지 이유라고 했지만 완전히 다른 이유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 의해 관계되는 상관적 또는 필연적 이유들 일 것이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한국건축은 개념이 부재된 이미지 건축'이기 때문이며, 두 번째 이유는 '한국건축은 스스로 말하는 건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한국건축은 대중에게 다가가지 않는 건축'이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건축은 개념이 부재된 이미지 건축이다.


그동안의 한국건축은 건축을 존재의 이유에 대해 사유된 결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현혹적인 이미지로만 표현하여 왔다. 다시 말하면 한국건축은 이미지일 뿐 개념이 부재한다. 대부분의 건축디자이너들은 건축의 창작과정에서 디자인을 위한 개념을 찾고 개념을 도식화하여 디자인을 발전시킨다. 창작과정에서는 그 어떤 예술분야보다도 풍부한 개념들이 넘쳐 난다. 하지만 건축물이 지어지면 무엇을 표현하였는지,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개념을 잡아낼 수가 없다. 거창한 디자인 논리를 발견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건축을 보는 순간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떻게 사용되는 것이며, 이 땅과 장소가 요구하는 건물인가라도 어느 정도 알아차려야 하는데,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끔 디자이너들에게 그 건축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묻게 되면, 그들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개념들까지 만들어 붙여가며 작품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수많은 개념들이 그들의 입에서 현란하게 춤을 춘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개념들은 떨어지는 빗방울 같아서 잠시 발아래 고였다가 바다로 흘러가 버리는 허무한 것일 뿐이다.


도시에 우뚝 선 수많은 건축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같은 모양에 같은 재료이다. 한때 개성 없는 도시건축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이제는 개성이 넘쳐 혼란함 마저 가중시킨다. 국적불명의 건축들이 한국의 도시에서 영어간판과 함께 무의미한 이미지로 고착되어 있다. 이것이 내가 보는 우리 건축의 현실이다. 차라리 영어간판은 단어의 의미가 있어 개념이라도 뚜렷하다. 하지만 건축은 어떠한가. 지금 우리의 건축은 이미지로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한가? 의미가 전달되어야 우리의 의식에 자극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의 예술이 의식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개념화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 도시의 우리 건축은 개념이 없어 의식될 수 없는 피상적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과격한 말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의식을 가지기 위한 개념 또는 개념화란 무엇인가? <개념의 개념 잡기>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살펴보자. 개념이란 우리의 주변의 무수히 많은 관념과 현상들에 대한 속성을 말한다. 그 속성은 ‘실체, 분량, 성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 등을 말하며, 이 속성들은 또다시 개별적 개념이 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한다. 즉 개념은 그 개념의 대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은 또 다른 개념을 불러오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관념과 현상들의 속성에 대한 질적 차이를 구별하고 범주화시켜 내는 것을 개념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떠한 대상이 개념화된다는 것은 또 다른 개념으로 발전된다는 것이며, 이렇게 개념은 연쇄반응을 통해 개념화의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다.(우리의 건축가들은 개념을 알고 있되 개념을 개념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개념의 개념이 조금 복잡해진 것 같으니, 쉽게 건축이 개념화된다는 의미로 돌려보자. 건축은 현상화되기 전에는 복잡한 관념으로 존재한다. 서로 얽히고설킨 관념들은 사고의 과정을 통해 체계화되고, 구체화되어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 이미지는 구상, 에스키스, 드로잉, 모델, 그래픽, 그리고 건축물 등으로 나타난다. 건축은 수많은 과정 속에서 단계 단계마다 건축가와 땅과 인간을 통해 수많은 가능성 있는 결과물로써 개념을 만들어 내며, 그 개념을 통해 자신을 외부로 드러냄과 동시에 세상과 소통을 시도한다. 그렇게 창작과정 속에서의 건축의 개념은 건축가의 사상과 땅의 논리와 인간의 삶을 담아낸다. 그리고 건축은 하나의 예술적·자연적·철학적 산물로써 땅 위에 최종적으로 이미지화된다. 이렇게 이미지화된 건축은 독자적 개념화를 포함한다.


철학적 개념이든 건축적 개념이든 개념은 복잡하다. 건축에서는 더 복잡할 수도 있다. 인간에 대한 배려, 땅의 논리, 건축가의 사상은 디자인과정에서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시간과 공간에 의해 범주화되어 수백수천의 개념으로 분류된다. 건축가에게 필요한 개념은 그 모든 것이 아니다. 수백수천의 개념들 중, 건축에 필요한 개념을 찾아내는 것이 건축의 개념화이며 창조적 과정이다. 이렇게 개념화된 이미지는 의식될 수 있는 이미지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건축의 문제는 창작과정에 관여한 관념과 이미지들이 모두가 다 개념으로 확립이 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개념이 있는 건축은 절대 장소를 왜곡하지 않고, 인간을 배제하지 않고, 시대성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건축은 전술된 모든 것들에 대해 부정적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개념화란 우리의 사고에 의해 대상이 확고한 존재로서 정립이 되는 원리이다. 건축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형식적 이미지로만 이해하고 표현을 하게 된다면 건축은 개념화될 수가 없다. 즉 의식을 담아내지 못한 시각적 향유대상이 될 뿐이다. 창작의 과정 동안 건축가의 관념을 통해 무수한 생산적 과정을 거쳐낸 개념이 하나의 건축물이 되어 개념화된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이 진정한 건축이다.


건축은 현상되는 시각적 이미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건축의 이미지는 단순한 상업적 이미지 또는 회화적 이미지 자체가 아니다. 회화적 이미지라는 예를 들었지만 우리가 아는 예술에서의 회화는 당연히 개념화된다. 단지 여기에서 말한 회화적 이미지란 시각적 목적에 충실한 가시적 행위의 결과와 수단적 의미가 더 강하다고 봐야 한다. 건축은 그림이 아니다. 건축은 사진이 아니다. 보다 더 복잡한 의식의 산물이다. 건축을 사진처럼 보여 줘서도 안되고 건축을 그림처럼 그려줘서도 안된다. 건축은 개념으로서 설명되어야 한다. 말장난이 아니라 개념화된 말이어야 한다. 의식 있는 말로 건축은 이야기되어야 한다. 개념화된 이미지는 말하지 않아도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개념이 내재된 건축에서는 전술한 인간을 위한 노력과 땅의 논리와 건축가의 사상을 이미지 속에서 자연스럽게 읽어낼 수 있다. 이미지는 개념화되어야만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개념화된 건축의 이미지는 말이 필요 없다. 생산된 건축은 더 이상 건축가의 대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가 무엇을 궁금해하더라도 궁금한 사람 스스로 그 해답을 건축의 이미지를 통해 찾아내도록 해야 한다. 건축에 개념화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이미지의 개념화는 어렵지 않게 사람들에 읽힐 것이다.


둘째, 한국건축은 스스로를 말하는 건축이다.


두 번째 이유는 개념화된 건축의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개념이 파악된다는 의미에서 연결된다. 사실 어느 예술이든 예술가에 의해 이미 생산된 예술품에 대해서는 예술가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다. 예술가는 창작의 과정에서만 예술에 관여할 뿐, 완성된 예술품의 가치나 평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감상자들의 몫이 된다. 따라서 건축도 당연히 건축가 스스로 자신의 건축에 대해 직접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건축가의 말은 창작과정에서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이후는 개념이 내재화된 이미지로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의 건축은 그동안 개념이 부재한 이미지였기에 건축가 스스로 건축의 개념을 변명해야 하는 현상을 불러왔다. 지금 많은 건축가들이 신문에서 잡지에서 방송에서 도시를 이야기하고 건축을 이야기한다. 물론 비평적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평론도 있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설계한 건축을 자신이 이야기한다든가, 동료건축가의 건축을 대신 비평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무엇을 이야기하겠다는 건가. 건축계는 좁고도 좁아 모두가 친구이고 모두가 동료인데, 과연 누구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제 식구 감싸기가 건축의 고질적 습성이 되어버리기 일쑤이다. 건축가가 하는 건축비평은 비평이 아니다. 그들은 올바른 비평을 할 수가 없다. 외적인 입장에서는 과정을 몰라서 못하고 내적인 입장에서는 같이 살기 위해 하지 못한다. 건축의 과정에서 건축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어진 건축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말아야 한다. 개념 없는 건축을 엉뚱한 개념으로 미화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건축현실에서 진정한 개념화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아는 바이다. 일과 실적이 우선이 되는 나라에서 결과가 먼저 있고 난 후, 부재한 개념이야 차후 말로 미화하여야 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지금까지는 안 되었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여유가 된다면 달아져야 한다. 아마도 우리 건축이 달라질 때쯤이면, 우리도 프리츠커상 하나쯤은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건축가는 자신의 건축에 대해 옳고 그름을 말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건축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도 자신의 입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그 건축의 향유자뿐이다. 건축의 비평은 비평가와 대중들에게 맡길 일이다. 좋은 뜻으로 이해하여도 되지만, 건축의 자기변명은 건축을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고유영역으로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일 뿐이다. 즉, 건축은 예술이지만 기술적인 면이 강조되는 전문분야이다. 따라서 건축은 기술적 이해가 사회와 경제, 그리고 물리적 안정성에 의해 강조된다. 따라서 건축은 예술임을 자처하지만 대중적 예술이기를 거부한다. 기술과 안전을 이유로 배타적 전문성을 구축한다.


셋째, 한국건축은 대중에게 다가가지 않는 건축이다.


세 번째 이유는 건축의 최종 평가자는 대중이다라는 의미에 있다. 예술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다른 견해가 존재하지만, 나는 현대의 예술은 대중적일 때 그 가치가 인정된다고 본다. 지금 우리가 대중예술이라고 부르는 음악, 미술, 영화, 사진 등등의 예술들은 고귀한 예술성을 버리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이미 세계 속의 한국예술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일부에서는 대중예술이 가지는 통속성 때문에 대중예술이기를 꺼려하지만, 대중예술은 통속성 이외에도 대중성과 생활성을 포함한다. 우리가 통속성만 따진다면 일부 예술평론가들이 이야기하는 '대중예술이란 쓰레기예술들의 처리장...'이라는 말에 대해 뭐라 반박할 수가 없다. 하지만 또 다른 속성인 대중성과 생활성은 예술이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또 생활의 일부가 되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예술의 새로운 방향성을 내포한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대중예술이란 생산된 예술을 대중이 함께 향유하고, 비평하고, 심지어 직접 생산에 까지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건축은 이것을 거부한다. 안전성과 기술성이라는 큰 책임감이 요구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대중적으로 개방되기 힘들다는 족쇄를 차고 있다.


이 족쇄를 벗어야 한다. 아무나 집을 지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대중과 함께 할 방법을 고민하자는 이야기이다. 건축예술이 힘들 때,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은 대중 밖에 없다. 그들이 문화를 주도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건축, 먼저 대중화가 되어야 문화가 된다>라는 글을 통해 건축의 대중화에 대해 강조하였다. 오랜 세월 건축이 구축하고 있던 특수성과 전문성은 21세기 들어 문화와 대중화라는 이름으로 자주 언급된다. 건축도 이제 변할 때가 되어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다른 나라는 건축이 이미 대중화가 되었기에 수상자가 나온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과 우리가 다른 것은 그들의 건축은 우리 만큼 폐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올해 프리츠커 수상자에 대한 배심원단의 설명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 작품들을 통해 근거 없는 확신보다는 취약성을 중시~, ~ 조용히 기쁨을 주는 안식처를 제공하며, 취약성을 삶의 경험에 내재된 조건~" 이 말들의 숨은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반드시 건축가 자신의 확신보다는 대중의 입장을, 작가의 작품으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대중의 삶을 품는 집으로서의 건축이기 때문에 수상자로 선정했다는 의미는 읽어내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나의 의견이 다소 황망스럽겠지만, 요점만 두고 보면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우리에게서도 프리츠커상의 수상자가 나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번 받아 보자.’


프리츠커상의 수상 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떤 건축을 설계한 건축가가 받을 수 있다거나, 아니면 어떤 건축사상이나 이념이 받을 수 있다고 꼬집어 말할 수 없다. 당연히 무엇 때문에 상을 받지 못한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동안 무엇을 해도 받지 못했다면 안 해 본 것을 해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것은 우리의 건축이 안 해본 것들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건축은 개념이 부재된 이미지건축이었다. 완전한 부재라고 단언할 수도 없으니 소수의 개념들은 가졌으되, 그 개념들이 개념화되지 못한 건축이라고 해야겠다. 따라서 개념이 읽힐 수 없는 우리의 건축은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일부 건축가들의 변명도 있을 수 있다. 대중들과 비평가들이 건축에 내재된 개념을 읽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미지만 보는 것이라며, 그래서 건축가들이 대신 개념을 이야기해 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또 다른 반론을 만들어 낸다. 건축가들이 대중에게 다가서지 않았기에 건축이 대중에게 읽히지 못했고 또 담론화 될 수 없었다고.


철학계에서는 현대의 문화현상에 대해 이미지의 범람과 개념의 연성화를 우려하고 있다. 즉 모든 문화적 현상들은 이미지들로만 가득 차고 우리의 의식뿐만 아니라 감성과 무의식 까지도 개념이 부재한 이미지의 외적 환상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참 의미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러한 포괄적 의미에서의 비판을 우리 건축의 문제로 좁혀 생각을 하고 있다. 혹시 우리 건축이 철학계에서 지적한 것처럼 너무 시각적 이미지에 홀려 진정한 건축의 개념과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이미지만 범람하는 시대는 죽은 시대라고 철학자 이정우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비평가 타푸리는 건축예술이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건축가 스스로가 건축을 비평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건축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가치를 인정받아 대중이 등을 돌리지 않는 진정한 대중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건축이 건축가들에 의해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의 사용자와 관조자들에 의해 이야기되어야 한다. 대중들이 즐기지 못하는 건축문화에게 상을 주어서 무엇하나.


건축은 게임이 아니다. 건축은 블로그가 아니다. 건축은 추상미술이 아니다. 건축은 어려운 철학이 아니다. 건축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건축은 건축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건축은 개념을 담은 사건임과 동시에 전달자여야 한다. 건축가가 스스로의 건축을 미화해서는 안된다. 건축은 대중적이어야 한다. 대중이 건축을 만들 수 없다면, 대중이 건축을 읽고 말하게 하여야 한다.




나는 글을 과감하게 길게 썼다. 내 약한 주장에 설득력을 더 하려고 길게 쓴 것이 아니다. 이글에서처럼 다른 나라의 수상자들의 건축이 완벽하게 개념화된 이미지로 구축되었던가, 그리고 그들은 절대 건축에 대해 스스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을 하였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글은 당장에는 모르겠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나의 견해이며, 단지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건축의 문제들이다. 이 글은 그냥 오늘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혹시 내년엔 우리도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다가 쓴 글 일 뿐이다.


이 글은 예전에 sns에 핵심만 짧게 올린 적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글을 무시했다. 그때는 무시당해 기분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다행스러웠다. 만약 글에 대한 반박이나 태클이 들어왔다면 여기에서 지적한 문제가 진짜 우리 건축의 문제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역설을 가장 잘 표현한 '똥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무시되고 관심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건축이 내가 지적한 만큼 잘못된 상황이 아니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축은 어렵다. 누구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다시 한번 돌아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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