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개념 잡기

건축사유 : 땅과 사람의 교감 17

by 정로각심

건축디자인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른 생각과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두 가지 방법은 나의 생각이다. 하나는 예술적 디자인의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목적적 디자인의 방법이다. 전자를 건축의 예술적 또는 미학적 가치를 본질로 디자인에 접근하는 방법이라 한다면, 후자는 건축의 합목적적 본질을 가치로 하여 디자인을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다른 관점으로 건축디자인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 두 가지 방법은 내가 생각하는 큰 틀이다. 어쩌면 지난번에 썼던 글 <디자인은 발견되어야 한다>의 연장으로 <디자인을 발견하는 방법>이 글의 제목으로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건축의 예술적 가치에 중심을 둔 디자인은 도시와 문화의 요소로써 충실한 건축이 좋은 디자인이 될 것이며, 건축의 목적적 가치에 중심을 둔 디자인은 인간의 요구에 충실한 건축이 좋은 디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두 관점은 어느 하나를 위해 어느 하나를 배제하거나 포기한다 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 필연적인 복합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건축디자인이 어려운 것이며, 또 멋진 작업인 것이다.


사실 이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일 수 있다. 상식이지만 건축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디자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좋은 디자인이나 쉬운 디자인이란 정법이나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좋은 건축디자인에 대한 평가의 기준도 모호하다. 좋은 건축은 시대와 사회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설계공모와 같은 건축의 선정과정에서는 심사위원들이 공모에 참여한 여러 작품들을 심사한다. 이 과정에서 내외부공간계획, 입면(형태)계획, 기술계획, 기타 맥락성 등을 고려하여 당선작을 선정한다. 이 과정은 가장 좋은 건축을 평가하는 단계가 아니다. 어차피 지어야 할 건축이기에 여러 경쟁작들 중 그나마 좋은 작품을 선정하는 단계이다. 시대와 사회는 심사위원들에 좋은 건축의 평가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건축의 평가는 성립 이후 시대와 사회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지어져야만 하는 건축의 여러 후보들 중 디자인을 비교해서 최종 하나를 선별하는 권한만 주어진 사람들이다.


건축디자인은 시대와 사회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어렵다. 어렵다고 피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창작 과정에서 끊임없는 사고와 부단한 고민을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그나마 접근이 용이한 두 가지 방향에 대한 방법론을 한번 고민해 보자. 접근법을 조금 바꿔서 예술적 가치를 위한 방법은 '트렌드 잡기', 그리고 목적적 가치를 위한 방법은 '개념의 개념 잡기'로 접근 틀을 바꾸어 보도록 하자.


트렌드 잡기


먼저 예술적 가치를 위한 건축디자인의 방법으로는 원론적일 수 있지만 '경험'이 최우선이다. 경험은 이미 지어져 시대와 사회가 모범으로 판단한 수많은 건축을 직접 접하고, 몸으로 공간과 형태의 체험을 통해 감각을 익히는 방법이다. 오래된 것은 오래된 대로 새로운 것은 새로운 대로 체험된 모든 것을 통해 디자인의 방향, 즉 트렌드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흔히들 예술이나 디자인 분야에서는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말로는 경향, 동향, 유행 등등의 의미일 수 있다. 왜 중요할까? 한 시대의 트렌드라는 것은 당대의 문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방향이자 주류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복잡한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의 정의로 국가(정치, 경제 등), 사회(예술, 법 등), 이념(종교, 풍습 등) 등을 규정하는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트렌드는 문화의 흐름이며, 트렌드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문화의 흐름을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중요한 만큼 디자인의 트렌드 읽기는 쉽고 만만하지가 않다. 건축디자인의 트렌드는 건축의 역사를 이해하고, 양식의 주기와 흐름을 파악하고, 현대건축이 계승한 건축의 정신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계승이다. 현대건축의 단편적 동향을 파악한다는 것이 아니라, 왜 현대건축은 이러한 특성을 획득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건축디자인에서 흐름의 전체과정이 아닌, 단지 현재의 동향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고 해서 트렌드를 완벽하게 읽어 내었다고 섣불리 자만한다면 크나큰 판단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건축을 타 분야와 비교해 볼 때, 다른 예술에서는 계획과 제작이 그리 긴 시간을 요구하지 않지만, 건축은 기획, 계획, 설계, 시공, 준공에서 엄청나게 긴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축에서 단지 현재의 트렌드를 반영한다는 것은 기획과 완공이 가지는 시간적 갭을 놓쳐버리는 중요한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문화 현상의 트렌드가 20년이나 30년에 걸쳐 아주 천천히 느리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건축에서의 트렌드는 반드시 미래형으로 읽어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물간 트렌드로 뒷북치기 십상이다. 물론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그 유행이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건축의 트렌드는 건립과정의 시간을 고려하여 미래를 읽어 내어 반영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예측하기도 힘든 미래의 트렌드를 읽는다는 것은 당연히 쉬운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장의 눈앞에 있는 트렌드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험과 역사적 지식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가지게 해 준다. 100년의 역사를 파악하면 100년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며, 순환하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역사의 연구』를 쓴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과 응답의 반복 과정'이라 하였다.


예술적 또는 좋은 디자인을 위한 안목으로 가장 우선되는 것은 경험이다. 학문적인 경험은 물론이고 몸을 움직여 많은 여행을 통한 현실적 경험 또한 중요하다. 사실 건축은 선례를 많이 찾아다녀 직접 공간과 형태를 경험한 사람이 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진리에 가깝다.


개념의 개념 잡기

그리고 두 번째 인간의 요구에 충실한 건축디자인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방법론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나의 생각은 한 가지이다. 짓고자 하는 건축의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면 좋은 건축디자인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아니 잘못될 가능성이 낮다. 개념의 개념 잡기는 앞의 트렌드 잡기에서의 미래 내다보는 눈의 연장선에 있다.


이 '개념'이란 용어, 건축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평생 달고 사는 용어이다. 하지만 의외로 '개념'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이 개념의 올바른 파악과 분석은 철학적 역사적 관점을 조금 도입해야 되기도 한다. '개념'의 개념, 일반인들이야 인터넷 용어사전의 의미만 알고 있어도 개념 없는 놈이란 소리 안들을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들은, 특히 건축 디자이너들은 '개념'의 본질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평생 고생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개념'의 개념을 '실체, 분량, 성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 등 10가지 속성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실체는 개념과 동일한 개념이다. 즉 개념적 실체 그 자체이다. 그리고 나머지 아홉 가지는 실체를 있게 하는 속성들이다. 우리 인간이 요구하는 건축에 대한 이들 개념의 10가지 속성을 철저한 분석 과정을 통해 파악한다면 건축디자인은 결코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저 10가지 속성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개념의 10가지 속성들은 다시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서 자신들도 개념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개념의 파악을 위해서는 또다시 앞에서 말한 10가지 속성으로 분류되어 개념이 파악되어야 한다. <디자인은 발견되어야 한다>에서 말한 '개념의 개념의 개념...'이라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렇게 개념의 개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즉 각각의 개념들은 스스로가 또다시 10개의 개념으로 분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또는 다른 개념들과 결합되어 새로운 개념으로 탄생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건축이 나오기까지 분석하고 파악해야 할 개념은 수백 수천 가지가 될 수도 있다. 건축의 계획에서 초기 분석의 대상은 다양하다. 장소, 사용자, 대지, 용도, 맥락, 시간 등 초기에 주어지는 분석의 대상도 수십 가지에 이른다. 이들 수십 가지는 각자 개념의 10가지 속성으로 분석되며, 10가지 속성은 다시 10가지 속성으로 몇 단계에 걸쳐 분석될 수 있다. 그렇게 도출된 개념들은 수백 수천 가지에 이른다.


물론 이렇게 도출된 개념들을 모두 다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적합한 새로운 개념이 나오면 기존의 개념들 중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수백 수천 개의 개념들 중에서 취할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목적과 방향이 명확하면 버려야 할 것도 명확해진다. 남겨야 할 개념들이 창조적 사고를 통해 통합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디자인 분야에서 요구하는 창조성이 발휘가 된다. 이 개념을 잘 골라내어 잘 조합하는 능력이 창조적 능력이다. 그렇다면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방법의 예를 들자면 먼저 분석 단계에서 지어지지 않은 대상(또는 앞으로 지어져 있을)을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일을 파악하는 것이 추론적 방법인데 이는 매우 중요하다. 훈련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추론적 능력을 '오성(悟性)'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디자인 중에 있는 건축물이라는 결과는 아직 현상되지 않은 존재이며, 이를 하나의 가시적 건축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결과에 대한 추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추론의 방법들이 지어질 건축물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개념의 분석이다. 즉 이미 미래에 지어져 있을 건축의 개념들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건축의 상황에서 현재의 지어져야 할 대상의 10가지 개념의 속성과 분석되어 도출된 하위 개념들을 통해 미래의 관점으로 분석한다. 중요한 것은 개념의 분석은 절대 현재의 관점으로 분석하면 안 된다. 앞에서 말한 건축의 트렌드는 시간적 갭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예측되는 개념뿐만 아니라 그 장소와 사건들에 대한 과거의 개념 또한 반드시 끄집어내어야 한다. 그러면 지어야 할 집이 그대로 그려지게 될 것이다. 건축디자인 말로 하니까 참 쉽다.


우리는 흔히 '개념을 잡는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상의 설명에서 왜 개념을 '잡는다'라고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으리라 본다. 저들 속성들 중 추론적 결과에 맞는 개념들을 잡아내어 끌어모으는 것이 '개념 잡기'이다. 개념은 영어로는 'concept'이지만 독일어에서는 'begriff'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 용어의 어원적 의미가 '끌어모으다, 움켜쥐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학창 시절 교수님들에게 그렇게 자주 듣던 말인 '설계 개념 잡았냐?'라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결국 건축디자인뿐만 아니라 모든 디자인은 이러한 '개념'의 개념을 분석하고 가장 적합한 개념을 찾아내는 일을 통해 예측되어야 하는 결과를 추론해 내고 새로운 개념을 발굴하여 조합해 내는 것이다.


이 글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건축디자인의 접근 방법이다. 그래서 한 번 더 개인적인 생각으로 결론을 하나 만들어 보고자 한다. 디자인이 개념들을 찾고 개념들을 조합하는 일이라면, 디자인은 과학이고 수학도 될 수도 있겠다. 건축디자인, 어쩌면 처음부터 정답이 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정답은 땅이 가지고 있다. 잘 찾아보자. 땅이 원하는 집이 백 년을 가고 천년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