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유 : 땅과 사람의 교감 13
여기서 말하는 대중화는 건축의 체험이나 이용에 관한 것이 아닌 더 근원적으로 확장된 건축의 디자인과 창작, 즉 생산의 과정에 가까이 있다. 글에 대한 접근성을 명확하게 한정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건축의 대중성에 대해 우리는 하루를, 매일을 건축 안에서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대중성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거나, 건축은 이미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대중성에 대한 의견을 일축해 버리는 분들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예술의 의미가 크게 변하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 유독 건축만이 배타적 전문성을 구축하고, 대중화보다는 전문화, 실제화보다는 추상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보다 깊은 단계의 건축의 대중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건축은 과거 고대에서부터 항상 예술이었다. 기술로 불린 적도 있지만 그때는 기술이 곧 예술(Ars)이었다. 건축은 '위대한 예술(기술)'로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다. 따라서 고전적 관점에서의 건축예술은 결코 저급할 수 없는 정신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정신성과 고귀함은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창조적 특권과 배타적 전문성을 확보해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예술의 대중화가 확립된 현대에 왜 아직도 건축만이 특권층에게 전유되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나도 물론 건축가이다. 창작에 참여하는 건축가가 아니라,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는 건축가이다.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너무 기회주의적으로 개인적 생각을 글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겠으나, 나는 지금 지극히 객관적이고 대중적 시각으로 건축을 바라보고자 노력을 하고 있다.
건축이 타 예술과 달리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부분이 강조되기 때문에, 안전과 합리성이라는 전문성이 강조되는 분야라는 이유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건축가가 위대한 기술자로서의 전문가적 특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근대 이전, 건축의 업무가 분화되기 이전의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건축이 거대하고 다양하고 복잡하게 발전하였기에 건축은 더욱 세분화되고 더욱 전문화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건축의 예술적 측면, 즉 디자인에 관계된 건축가들이 말하는 건축의 전문성은 이제 그 범위가 수정되어야 한다.
사용자의 안전과 기능성의 문제에서 안전은 구조라는 전문분야가 존재한다. 그리고 합리적인 목적이나 기능(공간적 기능 제외) 또한 기획이라는 전문분야가 존재한다. 물론 지금도 건축의 과정 전체를 보면 건축가가 건축의 전체 프로세스를 총괄하고 있지만, 이조차 입지가 흔들리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건축가들이 말하는 건축이 차별성과 품격을 갖추고자 한다면, 또는 건축이 지속적으로 예술이고자 한다면, 건축은 타 예술의 입장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현대의 제예술은 이미 고귀함이나 전문성을 탈피했다. 회화와 조각은 창조과정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벗어던지고 창작의 결과와 평가를 통해서 예술가의 지위를 확보한다. 즉, 누구나 창작은 할 수 있되, 평가는 대중과 사회에 맡기는 것이다. 음악·무용·사진 등의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예술의 대중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잡한 현대사회는 세계화란 이름으로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산업 등 모든 문화를 보편화시켜 버렸다. 이제 세계화란 앞선 문화(헤게모니를 획득한 문화)의 식민화이며, 보편화란 객체의 주체화인 대중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술 또한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이미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해체되었으며 대중적으로 보편화가 일어났다.
존 러스킨(1819~1900, 영국 미술비평가)은 '노동자와 서민도 예술을 향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윌리엄 모리스(1834~1896, 영국 예술가) 역시 '예술은 모든 사람의 삶 속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통해 미술공예운동을 이끌었다. 존 듀이(1859~1952, 미국 철학자)는 '예술은 특별한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경험 속에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발터 벤야민(1892~1940, 독일 철학자)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기술 복제가 예술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계기가 된다'고 분석하였다. 그는 기술 복제의 시대는 예술의 아우라가 약화되지만, 대신 대중의 접근성은 더 강화된다고 하였다. 얼마 전에 소개한 훈데르트바서(오스트리아 건축가, 1928~2000) 또한 <곰팡이 선언문(1958)>을 통해 '누구나 건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건축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오늘날 계획 건축은 결코 예술로 간주될 수 없다'고 이야기 하였다. 즉, 건축도 회화와 조각처럼 누구나 창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근대 이후에 탄생한 대부분의 신생 예술들(사진, 영화, 그래픽 등)은 그 시작부터 대중과 함께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예술인 미술, 음악, 문학 등도 시대에 동승해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왜냐하면 현대의 문화를 이끄는 힘은 대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대중에 의해 문화가 흥하고 대중에 의해 문화가 망한다. 이러한 대중들의 힘이나 대중예술의 잠재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는 마르크스 미학을 통해 동인을 살필 수가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대중의 노동을 착취하고, 혁명을 꿈꾸기 전에 노동의 대가나 보상의 차원에서 예술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대중은 그 달콤함에 길들여졌으며, 노동과 예술이라는 채찍과 당근을 삶의 운명으로 인식하도록 세뇌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대중예술은 대중의 노동력을 위해 만들어졌고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특권층의 유희였던 예술이 현대에는 노동과 삶의 원천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 대부분의 예술은 대중화가 되었지만, 건축은 대중을 위로하는 당근이기를 거부하고 자본의 편에 섰다. 그러나 건축이 자본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해서 대중의 노동까지 착취할 수는 없다. 건축은 대중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의 장은 될 수 있을지언정, 건축을 위해 노동을 요구할 수도, 요구한다고 따라올 대중도 없다. 건축은 대중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다만 허락된 범위 안에서 사회적 지위 상승의 도구로 가끔 이용될 뿐이다. 그래서 건축은 현대사회에서 자본의 축적이라는 모호한 자세를 취한다. 건축은 그렇게 대중에게서 거리를 두고 창조적 특권과 배타적 전문성을 위태하게 유지하고 있다. 대중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예술은 결국 그 끝을 장담할 수 없다. 문화는 대중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K-문화가 세계를 이끌어가는 K-파워 시대이다. 건축도 K-파워에 편승하고자 한다면, 먼저 대중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K-문화가 될 수 있다. 무작정 건축의 특수성을 고집하며 창작의 과정에서 대중을 배제하는 것보다, 건축의 생산과정에서 어디에서 어디까지, 무엇을 어떻게, 대중이 참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건축, 먼저 대중화가 되어야 문화가 된다.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의 서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과학을 단순화시키면 대중화할 수 있다' 어디 과학 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