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눈물

내 마음의 사진, 엄마의 이야기

by 전정석


하늘엔 막 쏟아질 듯 검은 구름이 듬성듬성 떠 있고 그 틈새로 간혹 햇빛이 보인다.

늘 다녔던 길이지만 오늘은 서둘러서 떠나는 이 길이 내 마음과 감정을 헤아리듯 천천히 스쳐 간다. 어젯밤은 엄마 볼 생각에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한숨 못 자고 뒤치락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해피 녀석은 나를 쳐다보며 놀아 달라고 애원한다. 내 마음은 이미 엄마한테로 달려가고 있었다.


길가에는 겨우내 긴 고통을 참고 땅 밑에서 머금은 영양소를 발산하듯 연초록 생기 있는 가로수 나무 이파리들이 늘 바람에 흔들리고 그 초록을 더 하였다. 초봄 코로나로 즐길 틈 없이 지나간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 길은 온통 봄꽃으로 장식되어 오가는 사람들을 반겼을 것이다.


지나는 차장 밖 논에는 이제 막 심은 모들이 제법 뿌리내리고 한단 한단 자라고 있었다. 초록빛 논두렁에는 두루미 한 마리가 앉아 한가롭게 긴 부리로 물속 우렁이랑 새우를 먹이 삼고 연신 고개 숙이며 좇는 모습이 보인다. 논 사이를 흐르는 도랑물이 이들에게는 생명수와 같다. 이 물이 조금 흐르다가 어디서 큰 도랑을 만나면 물살도 거세지고 거기서는 메기도 쏘가리도 떼 지어 살아간다.


머릿속에 그리는 엄마와 고향 집 생각에 배가 꼬르륵, 고픈 줄도 모르고 어느새 서산. 당진. 대천. 무창포를 지나 군산 휴게소에 다 달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소라 과자를 사서 우두둑 소리 내어 씹었다. 금요일 이른 오전이지만 아침부터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인다. 고향 찾는 사람, 여행하는 사람, 결혼식 가는 사람, 출장 가다 식사하기 위해 들른 사람, 멀리 떠나는 사람, 이들 모두 목적은 달라도 이곳 휴게소는 낭만과 추억, 많은 사연을 가지고 늘 붐비는 곳이다.


화장실 옆 등산복 가게에서 송가인의 ”너와 마주 앉아 입 맞춰 부르던 노랫소리 기억합니다. 살며시 감은 나의 두 눈 속에 그대 모습 담아봅니다. 함께 걸었던 이곳에 홀로이 그대 이름 불러 봅니다 “음악, 내 마음의 사진“ OST가 애절하게 흘러나왔다.


어느새 동군산으로 들어와 이성당 빵집 근처를 지나니 시청 주차장이 가까이서 보인다.


“어서 오쇼? 식당 집 아주머니가 우릴 쳐다보며 나와서 반긴다. 양지머리 길게 찢어 뼈 사골 국물에 뽀얗게 끓인 국물은 담백하며 밥맛을 더한다. 반찬과 시원하게 익힌 김치, 갈치속젓, 하얀 쌀의 궁합이 잘 맞는다. 군산항 수출 단지 가던 길옆에는 공장과 숙소들이 띄엄띄엄 보이고 간혹 커피점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물류 차량이 힘차게 질주하고 있었다. 새만금 진입로 오른쪽에 횟집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을 반기지만 이곳도 코로나의 영향으로 문 닫은 상점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어느새 차는 새만금 진입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국가 핵심사업으로 군산-부안을 연결하는 총 33.9km의 세계 최장 방조제로 1989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휴게소가 3개나 있으니 쾌적하고 시원한 도로임엔 틀림없다.


멍하니 탁 트인 바닷가를 바라보면 멀리서 빨간 등대 하나가 내 시야로 선명하게 들어온다. 금방 펄에서 잡은 백합, 동죽, 우럭들은 해안 도로 주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점심 메뉴 재료가 된다. 이곳 오래된 변산해수욕장이 탈바꿈하고 있었다.


바닷가 풍경을 살리고 소나무, 후박나무, 천연기념물 호랑가시나무도 심고 캠프장도 만들었다.

여기저기 아름드리 단풍으로 조경도 꾸미고 전에 없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 점원은 나에게 “오랜만에 여기 왔어요?”라고 물어보며 이곳 풍경이 달라짐을 알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거리측량, 도로 석 깔고 있는 인부들도 보인다. 주변이 변하다 보니 한두 명씩 찾아오는 캠프장 이용객들이 늘어서 이곳 점포들은 외지에서 온 상점 주인들로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구수한 사투리로 퉁명하게 ∼쇼잉 하는 말은 여행객들과 현지인을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10년 전에 이사 와서 이곳에 자리 잡은 오십 넘어 보이는 허브 찻집 아주머니는 단정하게 차려입고 앳된 모습으로 농장에서 직접 길러 말린 차와 꽃잎으로 허브차를 만들어 주었다, 평온과 안정, 그리고 마음의 여유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허브차 만들어 장사하며 마음마저 넉넉해진 이곳을 선택한 그 주인이 나는 몹시 부러웠다.


비는 보슬보슬 솜사탕처럼 내 어깨 위를 스치며 나는 서둘러 우산을 들었다.

이 비가 주변 나무들을 푸르고 청초하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만든다. 허브차 한잔 따뜻하게 먹고 로즈메리, 워터 코인 화분 두 개와 주인이 덤으로 준 또 작은 화분 하나 들고 차에 올랐다. 소나무. 후박나무. 참나무. 우거진 해안 도로로 접어들어 산내면 리조트 지나 격포항으로 향했다.


격포항에 이르러 빗줄기는 더 거세지고 몇몇 사람들은 나보다 앞서서 다정히 걸어간다. 오른쪽 방파제 돌 위에는 갈매기들이 비 맞고 잠시 쉬고 있었고, 하얗게 싼 똥이 여기저기 영역을 표시하였다.


공원 입구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는 길은 오래 바랜 책을 싸놓은 듯한 채석강이 보이고, 바다가 그리운 몇몇 사람들은 바위 있는 난간까지 내려와 비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길게 뻗은 전망대를 지나 좌우를 돌아보면 앞에는 멀리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이곳 위도로 향하는 선착장은 7년 전 낚시하러 다니느라 가끔 와 본 곳이기도 하였다. 4월 주꾸미가 한창이던 이곳은 어시장이 있고, 스산한 빗줄기에 좁혀진 시야로 가까운 것은 더 선명히, 먼 곳은 하얀 구름에 쌓인 한 폭의 어촌 풍경화가 되었다.


왕포 마을, 궁항, 모항 지나 왼쪽에 내소사를 두고 어느새 시큼 바닷물 냄새가 풍기는 곰소 젓갈 단지에 들어섰다. 안쪽으로 들어가 어시장을 쭉 돌며 마지막 건어물 가게에서 엄마 줄 멸치 한 상자를 샀다. 몇 안 되는 건어물 가게이지만 꾸준히 이 가게는 사람들로 붐비고 관광 철은 이곳도 줄 서서 웅성거리며 가격 흥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꼴뚜기. 문어. 명태 말린 것 연신 집어먹고 어시장을 나왔다. 엄마가 가끔 꽈리고추에 이 멸치를 볶아주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가게 주인이 소개해 준 길 건너 앞 부안 상회에서 생선구이와 풀치 조림으로 허기를 채우니 어느새 밤 7시가 훌쩍 넘었다.



차는 줄포를 출발하여 익산. 김제 지나 전주로 향하고 있었고, 1시간 지났을까 전주 도착을 알리는 기와 현관 모양 문설주가 눈앞에 크게 보인다. 엄마가 있는 덕진 풍경채 앞에서 가져간 멸치, 과일을 들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큰오빠를 만났다. 나오지 말라던 오빠는 나를 보는 순간 반가워하며 내 짐을 들며 앞서서 총총걸음으로 엄마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오빠는 항상 모범생으로 언제든지 내 마음속에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응, 혜정이 왔냐? 오지 말랬는데 머가 급하다고 이렇게 와!”하며 문이 열렸다. 엄마!, 하며 내 두 팔은 벌써 나도 모르게 엄마 품으로 향했다. 엄마는 다리 다쳐 수술한 것도 잠시 잊은 채 나를 안아 주었다.


얼굴을 비비며 잠시 어렸을 적 고쟁이 속 엄마에게 딱 붙어 애교 부리던 그 엄마의 냄새도 난다. 몇 가지 준비한 반찬과 오랜만에 엄마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여서 같이 먹었다 엄마?, 오빠, 나랑 같이 한 상에서 먹는 모습은 참으로 언제였는지! 갑자기 조용하던 집이 나 하나 왔다고 시끌시끌한 모습을 보며 엄마는 기뻐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렸을 때 툇마루 끝에 누워 멀리 보이는 북두칠성이 유성으로 조금씩 움직일 때 엄마가 동요를 불러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 누워! 나랑 같이 이야기하자”, 그리고 엄마? 좋아하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도 불러봐, 아직도 그 노래 잘 부르잖아? 엄마는 오랜만에 만난 딸을 보며 그동안 못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였다. 연금공단에 근무하는 공무원 큰아들, 제주도에 가서 착하게 사는 둘째, 그리고 그 손자 공부 잘한다는 이야기, 보라는 항상 당신에게 훌륭한 손자로 누구에게나 자랑거리 재목으로 생각했다.


일부러 옛 생각 더듬어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엄마의 반응을 보았다. 아들딸 손자 자랑과 안부로 시간 지난 줄 몰랐다. 지금도 모든 걸 기억하고 그 누구보다도 행복을 느끼고 있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엄마는 이제 늙었으니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만이 앞서는 것 같았다.

사람은 나이 먹어 마음이 순하고 약해져 조그만 감정에도 눈물을 흘린다. 오랜만에 보는 딸을 품 안에 두고 두 손 꼭 붙들고 있는 따뜻한 감정이 어느새 엄마는 감사와 사랑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느 때 보다 힘차고 따뜻한 모습으로 모든 걸 기억하며 안부 묻던 엄마인데 이제는 힘이 좀 부치는 것 같았다. 사우나보다 더 따뜻하던 정겨운 엄마의 목소리는 때때로 어조가 힘이 없어 옛날을 그리듯 나에게 어떻게 사는지를 묻고 또 묻는다. 오늘만은 엄마의 친구로 나도 천진스러운 어린아이로 변했다. 포근한 자장가는 어렸을 적 엄마가 별을 보며 가끔 불러주던 그런 노래로 나도 어느새 포근한 잠자리에 들었다.



앞 동네는 소나무가 무성하게 들풀들이 잘 자라고, 길가 양쪽은 반듯한 논에 항상 푸른 벼가 자라고 가을에는 노란 나락들이 온통 뒤범벅 져 환한 등불을 켠 것 같이 온 동네를 비춘다. 동네 어른들은 이때를 풍년이라 생각하고 조상님께 감사하며 마을 옆 서낭당 제실에서 감사의 제를 지낸다.


돌부리가 뾰로통 튀어나온 먼지 자욱한 신작로 길을 쭉 돌아가면 내가 다니던 학교가 나온다. 운동장에는 하루 사이 쑥쑥 자라는 잡초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첫 교시 공부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자 운동장으로 뛰어나와 남자들은 공을 차고 나는 친구랑 고무줄놀이, 사각 뜀뛰기 놀이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종이 울려 선생님이 들어오라고 불러야 그때야 교실로 들어가곤 했다. 가끔 먼지와 기름냄새 풍기며 씽씽 달리는 버스도 보였다.


마을로 들어가는 왼쪽 아래 입구엔 큰아버지네 옹기 굽는 화로에서 까만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른다.

항상 이 길을 지나가며 이 황토 굽는 냄새 맡으며 늘 걸어가곤 했다. 오른쪽 귀퉁이 돌아 밭 높은 언덕길엔 성석이 오빠네 집이 있었고 이 집엔 남자 식구가 많아 늘 농사를 많이 짓고 가끔은 우리 집을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내가 책가방 메고 길이라도 걸어가면 성석이 오빠는 내 뒷모습을 쳐다보며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으려는 듯 생각에 수줍어서 말 못 붙이고 하루가 또 지나갔다.


길 아래 조금 내려가면 왼쪽에 회색 지붕, 주황 황토벽으로 된 아담한 우리 집이 있고, 거기서 우리 형제와 엄마 아빠가 살았다. 아침 일찍이 학교 갈 준비하고 길을 나서면 오빠들은 맨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뒤따라오고, 아래 개울가 징검다리 건너 오른쪽 신작로로 접어들면 뒤에서 순남이가 반갑게 같이 가자고 소리치며 따라온다. 서로 얼굴 한번 쳐다본 후 손잡고 가로수 사잇길을 사이좋게 걸어 십 리 길 학교에 가곤 했다.


봄에는 길옆 밭에서 자운영꽃이 활짝 피고 여름에는 감자꽃, 가을에는 무궁화꽃, 겨울에는 당근 뿌리가 흙 위까지 올라와 빨갛고 싱싱하게 자랐다. 어느 봄날 엄마는 보자기에 뭘 꽁꽁 싸 주면서 진안시장 이모 집에 갔다 주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그때 이모네는 형편이 좋아 시내에서도 큰 부자였다. 콩나물 길러 시장에 팔고, 오색 상여 꽃 만들어 팔아서 큰돈도 벌었다. 그 돈으로 형편이 어려운 형제들에게 나누어 준 고마운 이모였다.



지금은 내 얼굴만 보아도 금 새 눈물을 흘리는 그런 사람이다.

꾸불꾸불 십 리 길을 걸어가다 보면 길가 논에서 소에게 풀 꼴을 뜯어 먹이던 동네 오빠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검은 고무신 신고 오른손에는 소 채찍, 왼손에는 풀피리 만들어 불고 있는 광경도 보인다. 걸어가며 해가 뉘엿뉘엿 질 때면 이모네 집이 나온다. 이모는 반갑게 나를 맞이하며 얼굴을 한번 쓰다듬는다. 엄마와 이모는 둘도 없는 형제로 지금도 정이 넘치며 힘든 시기를 함께 보낸 그 따뜻한 세월 속에서 늘 그리워하며 살았다.


지대가 높아 지나가는 바람도 쉬어 간다는 진안 장터는 5일마다 큰 장이 열리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게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을 만난다. 시장 입구 도로변에는 시외버스터미널이 있고, 노점상이 있는 뒤로는 산에서 흘러온 물이 고여 조금씩 물길 따라 길게 뻗친 도랑도 보인다.


길가 주변에는 신흥상회. 전주 상회. 부안 상회 간판이 희미하게 보이고 텔레비전. 라디오. 미장원. 농기구. 종묘 상점이 쭉 들어서 있다. 여기서는 금성 텔레비전. FM 라디오. 머리 고데기. 각종 채소 씨앗. 고추. 상추. 누우 모종도 볼 수 있고, 농사일에 지친 남자들 잠시 쉴 수 있는 대폿집과 동네 집 다방도 보인다.


시장을 찾는 날이면 영락없이 등 뒤에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머리는 소쿠리 두 개를 겹쳐 있고, 오른손은 대나무 광주리 몇 개 들고 이것을 파는 아낙들도 볼 수 있다. 추석 전날이 되면 동네 어른들 열댓 명이 줄지어 고깔, 조끼, 상모 틀고 징, 꽹과리, 장구 치며 시장 흥을 돋우며 볼 재미를 주는 농악대의 모습도 가끔 보인다.


시장 안 가게에 들어서면, 허리 굽은 할머니가 앉아서 두릅, 취나물, 고들빼기 모둠을 놓고 나물 팔고, 명태포, 코다리, 홍어, 무침, 도라지, 연근 파는 가게도 눈에 들어온다. 풍성한 인심과 한참을 쳐다봐도 싫증 나지 않는 열정이 넘치는 인정과 소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멋쟁이 빨간 꽃무늬 부츠, 장화, 노란 우산 파는 가게를 지날 때면 그 앞에서 엄마 손 끌어당겨 징징 사달라고 했던 생각도 난다. 고소한 기름 짜는 집에서는 참기름, 들기름 냄새가 나고, 바로 옆에는 꾸지뽕, 작두콩도 신기하게 보인다. 정겨운 인심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추억과 인심이 살아있는 진안 장터는 내게 새록새록 추억을 알리는 40년 전 시골 아이로 돌아가게 한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담임선생님 손잡고 쭉 줄 맞춰 신작로 길을 걸어 마이산까지 소풍 가던 모습은 늘 있었다. 말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으로 이곳은 바닷물이 승천하여 물에 잠겨 지금도 비가 오면 폭포처럼 무섭게 내린다. 산등성이는 바다 이끼가 살아서 숨 쉬고 라이브 돌벽을 이룬다.


이갑용 선사가 하나둘 정성껏 세워놓은 탑사는 온갖 비바람과 풍파에도 끄떡없이 수년간 흔들리지 않고 세계 불가사의 중의 하나가 되었다. 깎아지듯 절벽 사이로 보살 전이 세워지고 바위틈 사이로 자란 능소화가 뿌리를 내려 온통 산등성이를 덮었다.


바윗돌 위로 자란 손바닥선인장이 꽃을 피웠다. 노란 꽃은 대략 5~10년을 기다린 것 같았다.

따뜻한 햇볕에 스님의 독경 소리, 구경꾼에 질린 누렁이가 편안히 턱을 괴고 잠자며 몸을 이리저리 가끔 주변을 주시한다. 탑사와 대웅전을 돌아보고 감탄과 자연에 감사하며 다음 일정을 위해 황급히 아랫길로 향하는 관광객들도 보인다.


내려간 만큼 올라오는 길은 힘들지만, 대웅전 주변에 심어놓은 노란, 보라, 주황색 수국이 자태를 뽐내며 겨울에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 고목 같은 오랜 연륜의 청 배나무, 바위 틈새로 차가운 냉기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 이 모두 신비스러운 광경이었다. 여기 어디서나 양쪽 말귀 모양의 마이산은 나를 포근히 감싸 주었다.


시집가서 엄마 걱정 덜어 드리려고 서울 올라온 지금 내 나이 50 중반을 넘어 삶의 일터에서 굳건히 일하는 내 모습을 엄마는 늘 그렇게 지켜보며 자랑스러운 딸로 생각했다. 동네 사람에게 혜정이는 돈 많이 버는 자식으로 여겼다. 나는 엄마가 늘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이제 어린이처럼 변하여 눈물 많은 소녀가 되었다. “엄마? 20년은 더 살아 걱정하지 마!” 이모한테 심부름시키고 나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 지키며 신작로까지 나와 기다리시던 모습, 마이산 소풍 갈 때 달걀 두 개 삶아 손에 쥐여주던 모습, 흥을 좋아해 가요를 즐겨 부르던 모습, 이제는 좀 더 내가 그 기억과 모습을 지켜 드려야 한다.


“혜정이, 너 친구 조심해! 돈 뺏기지 말고!” 그런 말도 이제는 너무 그립다.

차는 어느덧 용담호수로 향하고 엄마와 같이 누워 천장 불빛 아래서 나눈 사연과 이야기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직도 따뜻한 엄마의 볼이 그리워진다.


“나 괜찮으니, 이제 내려오지 말고 걱정하지 마라!” 힘주어 말하는 엄마의 음성이 달리는 차 뒤에 아련하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