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의 기억

바람이 어깨를 건드리다

by 전정석
홍도.PNG 등대 위에서 바라본 홍도 바다


뱃머리가 부두에 닿자 상춘객은 서두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착장에 오른다.

진입도로 왼쪽에는 쪼그려 앉아 미역, 다시마, 전복, 붕어빵, 멀미약 파는 할머니도 보인다. 옆길 돌아 2층에는 배표 사는 곳이 있다. 숙박 손님 안내하러 온 여관집 주인도, 조그만 오토바이에 의자를 단 미니 차도 보인다.


짐 들고 앞으로 쭉 나와 황토 콘크리트 두 갈래 길로 들어가면 집 몇 채 있는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가는 길 옆엔 파도에 묶여 있는 배도 보인다.


홍도를 한눈에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산턱 깎아지듯 바위는 책처럼 펼쳐지고 긴 배흘림기둥 바위가 바닷물에 닿아 심하게 출렁인다. 마을 뒷산을 올라가다 뒤돌아보면 오른쪽에는 조그만 홍도 분교가 주황색 지붕으로 서있고 하얀 줄이 그려진 초록 운동장이 푸른 나무숲에 선명히 동그랗게 보인다.


그 옆길로 꾸불꾸불 올라가면 나무계단이 나오고 중간중간 쉬어가는 쉼터도 보인다. 저 멀리 홍도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산등성이 밑에 하얀 4층짜리 건물 두 채가 우뚝 솟아있다.


여기 서서 깊이 숨을 한번 몰아쉬고 멀리 바다를 쳐다본다.

지나가는 바람이 어깨를 건드리고 머리카락도 춤을 추게 한다. 깃대봉 가는 길은 동백나무, 후박나무, 도토리, 떡갈나무가 떼 지어 살고, 늘 바람에 쓸린 날렵한 몸매만 보인다. 추위에 약한 야생화들이 큰 바위 속에 숨어서 고개를 내민다.


깃봉에 매달린 바람개비 두 개가 바람 부는 방향을 알리고, 위쪽은 둥그런 하얀 모자, 중간은 사방이 삥 둘러친 유리 전망대, 다리는 육각형 모양으로 서서 흑산도. 비금도. 신안 앞바다를 멀리 보며 등대가 서있다. 산 밑 비탈길 옆에 우뚝 서있는 깃대봉 위 등대는 바다와 산, 푸른 하늘과 늘 마주 보고 있다.


바닷가 항구 해안선 가로질러 깃대봉 위에 홀로 서있는 등대.

낮에는 하얀 깃발로, 밤에는 주황, 녹색 불빛으로 배의 위치를 알리며 안개가 자욱한 아침나절과 해질 무렵에는 빛 대신 파이프 소리를 낸다.


등대는 사람 사는 세상만큼 많은 사연과 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봄에는 어촌 뒷산 마루에 진달래, 개나리,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모습을 보고, 여름엔 녹음 진 숲, 상춘객 노랫소리, 지나는 유람선, 선장이 부르는 뱃고동 소리, 가끔 지나가는 갈매기도 힘들고 지쳐 여기 앉아 잠깐 쉴 곳을 찾는다.


가을엔 파란 하늘에 새털구름, 뭉게구름, 소나기구름, 실구름, 양 떼구름이 펼쳐지고, 운 좋게도 소나기 내려 비가 갤 때쯤이면 멀리서 섬 산 무지개도 둥그렇게 뜬다.


겨울에는 꽁꽁 언 부두에 묶어놓은 고깃배, 겨울여자 그림, 풍경, 통발, 뜰채, 그물망, 낚싯대들이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넘실대는 파도와 잔잔한 희망도 산처럼 솟았다가 또 그만큼 유유히 내려오곤 한다. 바다 고깃배에 닻을 올리고 힘찬 출항과 함께 배가 움직이면 그때 어디선가 하나둘씩 때맞춰 먹을 것 달라고 찾아와 주리를 벌리는 갈매기들도 있다.


따라오다 배가 빨라지고 지치면 어느새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아침해가 솟으면 햇볕을 받아 물은 반짝거리고,

해 질 무렵 노을이 질 때면 아름다운 새털 석양이 펼쳐진다. 갯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등대의 어깨를 만져주고 눈부신 햇살에 지친 파도는 묵묵히 밀려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간간이 바람이라도 세게 부는 날이면 파도는 시퍼렇게 바위랑, 방파제랑, 고깃배를 무참히 할퀴고 간다.


선장은 뱃전에서 운전대를 좌현, 우현으로 힘차게 돌리며 힘든 숨을 몰아쉬고 선원들은 만선을 기대하며 고기 그물을 힘차게 걷어 올린다.


조상부터 고깃배 지켜온 마을 이장은 어부를 천직으로 알고 멸치잡이로 돈도 많이 벌고,

어릴 적 친구들과 바닷물에 들어가 물 멱도 감고 장난치며 놀던 모습을 회상한다.


서울에서 예쁜 여자 만나 결혼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장인 재산 물려받아 생계유지하며 여기 내려와 어부가 된 사람, 도시에서 건축업 크게 하며 돈을 모아 사업 확장하여 사장으로 살다가 금융위기 때 많은 부채로 심야에 몰래 가족과 짐 정리하여 도망치듯 내려와 이곳 옆집 이장 도움으로 배 한 척 빌려 일한 지 겨우 10년 만에 선장이 된 사람, 식구가 많아 한 푼 재산이 없이 여기저기 밥 얻어먹다가 밥벌이하러 가던 길에 전봇대 밑 광고지에서 얻은 벼룩시장 정보를 보고 돈 많이 주고, 먹고, 재워 준다는 말에 회사 취직하여 고깃배 선원이 된 사람. 가까운 진도 바다로, 멀리 파나마 해협까지 몇 달씩 땅 한 번 밟아 보지 않고 배 위에서 생활하다 이제 나이 먹어 어엿이 조금만 내 배 하나를 장만한 사람.


그 많은 선원들의 사연들을 곰곰이 기억하며 등대는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배에는 선장이 있고 멋진 마도로스가 있다.

선장은 위에 하얀 천, 까만 채양 밑에 노랗게 엮여만든 두 줄, 손바닥 모양의 노란 나뭇잎 모양 2개가 그려진 모자를 쓰고 색소폰 모양의 코끼리 뿔로 만든 담배 파이프를 연신 입에 물고 있다. 우럭, 노래미, 돔, 미역치, 볼락 잡아 만선으로 돌아와 시장에 팔아서 식구들 먹여 살리는 소중한 꿈을 가지고 하루하루 뱃고동을 울리며 힘차게 출항한다.


봄은 따스함을 주고, 여름은 푸르름과 시원한 바람,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단풍이 물에 비쳐 잔잔히 흔들리고, 겨울에는 긴 기다림과 인고의 시간을 준다. 등대 옆을 지나가는 많은 유람선, 쉬어가는 갈매기, 선장과 선원들의 사연과 이야기, 연인들의 사랑이 어촌 마을에는 활력이 되고 생명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하얀 등대는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많은 사연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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