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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y 08. 2019

한 줄기 빛을 향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언더그라운드>

한 줄기 빛을 향해




언제든 눈앞에 떠올릴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어린 날의 냇가, 산비탈에서 볼록 솟은 무덤들, 그곳에서 썰매를 타듯 비료포대를 타고 내려오던 철없는 아이들, 길쭉한 마당과 집 뒤편으로 펼쳐진 노란 들판, 그리고 과수원. 지금은 사라진, 내 어린 날의 배경 같은 공간들. 그곳의 바삭바삭한 빛을 기억한다. 지금은 국가산업단지 공장이 들어섰으므로,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그곳을.


중풍으로 거동이 불가능해진 할아버지를 위해, 아버지는 그곳을 파노라마로 사진 찍어서 벽에 걸어두셨다. 마을을 전부 담을 수 있도록 가로를 길게 해서 만든 현수막을. 휠체어에 앉아 현수막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한다.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한다. 가닿고 싶어도, 나는 그 마음을 전부 알지 못한다.



영화 <언더그라운드>



이처럼 공간은 신비로운 힘이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일까. 공간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삼켜두고 있다. 어떤 사람은 공간이 품은 기억을 토해내기를 바라지만, 그저 묻어두기를 바라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다. 애틋한 추억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쉽게 이해하지만, 안간힘을 다해 잊으려는 마음은 어렵다. 얼마나 지독하거나 고약한 것이기에, 공간이 계속해서 삼켜주기를 그토록 바라는 것일까.


허욱 감독의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공간에 관한 영화다. 지하유령역이라는 별명을 가진 지하철 신설동역 지하에서 시작한 영화는, 다시 지하철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거대한 순환구조를 가진 영화는 마치 지하철의 순환노선처럼 각 공간을 돌아다니며 잠깐씩 정차한다. 관객은 영화 속 공간이 정차하는 역마다, 함께 내려서 그 공간을 골똘히 응시하게 된다. 


이 영화가 정차하는 역은 다음과 같다.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신설동 지하유령역, 외양포 일본군 포진지, 신일본제철, 야하타 제철소, 스페이스 월드(구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 군함도, 미쯔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해안 터널, 죠잔 지하벙커, 마이주루야마 지하벙커, 제주도 수월봉 일제 갱도 진지, 송악산 해안동굴 진지, 일출봉 해안동굴 진지, 셋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 알뜨르 비행장, 치란 카미카제 평화박물관, 후텐마 미 해병 공군기지, 구 해군사령부호, 히메유리 기념관, 치비치리가마, 마부니 언덕, 비무장 지대까지.



영화 <언더그라운드>



하나같이 폭력의 상흔이 남은 곳을 영화는 천천히 응시한다.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징용되어 고된 노역을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인 곳, 제주 4.3 사건 당시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곳, 한국 전쟁으로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던 비극까지. 너무 깊어서, 빛조차 도달할 수 없는 지하에서 소년, 소녀들은 허덕이며 일했을 것이다. 땀이 비처럼 흘러내렸을 것이다. 피가 흥건했을 것이다. 간절하게 빛을, 평화를 갈망했을 것이다.


일본의 야하타 제철소, 신일본제철, 미이케 탄광, 군함도 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래서일까, 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에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셔터를 누르거나, 웃으며 포즈를 잡기도 한다. 순간, 그 광경이 생경해 보였다. 관광객들은 훗날 그곳을 어떻게 기억할까. 또, 당시 피해 당사자들은 그곳을 어떻게 기억할까. 아마 생경하게 보였던 이유는, 이 둘 사이의 서늘한 낙차 때문이 아닐까.



영화 <언더그라운드>



내내 내레이션 없이 자막만을 건네는 영화의 어법에서 이런 마음이 읽힌다. 기억을 묻어두기를 바라는 피해 당사자를 대신해, 우리가 바라봐 주기를. 함께 아파해주기를. 끝까지 이 비극을 잊지 말기를. 폭력과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기를. 간절하게 눌러쓴 기원문의 필체로.


광주의 아픔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의 끝 부분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내내 어두컴컴한 지하를 비추다가도, 영화는 종종 햇빛이 충만한 쇼트를 몇차례 비췄다. 아마, 허욱 감독의 마음도 동일했을 것이다. 빛보다 어둠이 친숙한 그들의 손을 잡고, 한줄기 빛을 향해 가자고. 애틋한 청유문으로.




(2019. 5. 8.)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중 <언더그라운드>를 보고 쓴 글입니다.






영화 정보



영     화 : 언더그라운드

감     독 : 허욱

국     가 : 한국

제작년도 : 2019년

러닝타임 : 68min

관람장소 : 전주국제영화제 CGV 전주고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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