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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y 09. 2019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할 것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 <꽥꽥과 잉여인간>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할 것



시커먼 액체가 마을로 떨어진다. 누군가는 이것을 ‘똥’이라고 하고(꽥꽥), 누군가는 이것을 ‘검은 피’라고 하며(신부), 누군가는 아직 조사해야 할 ‘무언가’라고 한다(수사원).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이 액체를 누군가는 뒤집어썼고, 누군가는 요행히 피했다. 이 액체의 정체는 영화 끝까지 규명되지 않는다. 마을에 액체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것에 대해 명백하게 밝혀진 사실은 ‘이 지구 상의 물질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없다. 이것을 미지의 ‘X’라고 먼저 명명해보자. 그렇다면, 영화의 굵은 줄기를 다음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외부로부터 X가 들어왔다. 이에 대해 마을은 X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X가 외계 물질이라는 설정은 ‘우리 영역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타자, 정체불명의 X를 주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X(액체)의 실체'를 규정하고, 그것(검은 액체)을 뒤집어씀으로써 ‘경험’해보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온 ‘실체론적 철학논쟁’이 아닌가.



영화 <꽥꽥과 잉여인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철학은 사물을 파악함에 있어서 그 속성을 명제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명제에서 주어는 사물로, 술어는 사물의 속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실체론적 사고방식은 버드란트 러셀에 이르러 부정당했는데, 그에 의하면 ‘술어’인 속성은 사물의 본질을 말하기보다 그저 ‘주어’와의 모종의 ‘관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어-술어’로 연결되는 명제로는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여러 양태로 나타나는 사물의 속성 중 특정한 하나의 ‘관계’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이점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 더욱 발전되는데, 그는 실체에 대해 참인 명제는 모두 근본적으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 점을 끝까지 밀고 나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에 당도하게 된다. '사물의 실체를 아는 데 있어서 인간은 무력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구도 X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는 이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에는 정체불명의 액체인 X 외에도,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그러나, 그동안 너무나 쉽게 규정한) 여러 실체가 등장한다. 이를테면, ‘코린’으로 대표되는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난민), 지적장애인, 인종차별당한 흑인 등이다. 이들을 그동안 규정해온 주체는 주로 백인 남성이었다. 극 중에서 ‘꽥꽥’과 ‘판데르바이덴’은 서로 닮았는데, 둘 모두 타자/세계를 쉽게 규정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둘은 모두 세계/사람을 규정하는 뚜렷한 술어를 갖고 있다. 꽥꽥은 에브의 사랑을 받는 코린에 대해 ‘남자 같아서 재수 없다’고 했고, 판데르바이덴은 ‘비-인간’(인간이 아닌 것. 그는 흑인까지 이 범주에 포함한다)을 혐오하며, ‘무질서가 문제므로, 세계는 질서 정연’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의 직업이 경찰이라는 점과, 그리고 마을 사람 중 가장 많이 액체를 뒤집어쓴 사람이 이 둘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 <꽥꽥과 잉여인간>


브루노 뒤몽의 코미디는 판데르바이덴에게 나타난 외부요인(타자)이 자신에게서 나온 복제 클론(잉여인간)이라는 점에서 극대화된다. 이점은 늘상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외부요인(타자)을 쉽게 규정하던 그에게 하나의 딜레마로 다가온다. 그는 그것을 향해 ‘전적 타자’라고 할지, ‘자신의 복제’라고 할 것 인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X, 판데르바이덴은 그것에 대해 어떤 행동을 보일까.


장장 러닝타임 200분에 이르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잉여인간과 판데르바이덴은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결국, 판데르바이덴의 선택은 외부요인을 죽이는 것. 그런데 이때, 돌연 축제가 벌어진다. 그동안 주체의 시선으로 규정해온 모든 종류의 실체들이 흥겨운 행진을 하며, 천천히 원을 그린다. 무질서와 ‘비-인간’(동물과, 심지어 죽은 망자까지), ‘잉여인간’ 등의 그동안 주체에 의해 제멋대로 규정받은 실체들이 함께 축제를 벌인다. 이것을 밀란 쿤데라의 책 제목(『무의미의 축제』)을 빌려 표현하자면, ‘무질서의 축제’라고 해도 될까. 제각기 부르는 노래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아 소음처럼 들리고, 리듬없이 제멋대로 박수만 치는, 그 거대한 무질서의 축제가 기괴하게 보이지만은 않다.


언어-철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비트겐슈타인으로 글을 정리해야겠다. 그는 논리적 언어를 근본적으로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실체를 표현하는 술어는 결국 예전에 봤던 박제품이며, 이것은 미래까지 재단해버리는 일반화의 오류, 그러니까 무의미한 동어반복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그는, 이런 결론을 맺는다. “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논고』, 6.5.22) 이것은 그동안 실체를 멋대로 규정해온 모든 주체(꽥꽥과 판데르바이덴을 위시한)에게 하는 정중한 꾸짖음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할 것.”


(2019.5.7.)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중 <꽥꽥과 잉여인간>을 보고 쓴 글입니다.






영화 정보









영   화 : 꽥꽥과 잉여인간 Coincoin and the Extra

감   독 : 브루노 뒤몽 Bruno DUMONT

국  가 : 프랑스

제작년도 : 2018년

러닝타임 :  207min

관람장소 : 메가박스 전주(객사) M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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