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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y 24. 2019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세계 #2

우리 시대의 젊은 고전: (영화 <로마>)

우리 시대의 젊은 고전: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세계 #2 (영화 <로마>)



들어가며

지난 글(‘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세계 #1’)에서 우리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생명을 어떤 형태로 표현하는지 생각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생명은 신적으로 묘사되며, 모종의 ‘구원’을 꿈꾼다. <그래비티>에서 생명이란 거창한 목적, 당위 없이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 귀중한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렇다면, <로마>에서 생명은 어떤 형태로 표현되어 있을까.


알폰소 쿠아론의 기억, 감각의 총합인 <로마>가 그의 작품 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음을 지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자전적인 영화’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특정한 개인(클레오)을 위한 영화라는 것도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내게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예술관의 요체를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드러내는 작품으로 보인다.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곳을 뚫고 아기를 낳으려 가는 클레오의 모습은 자연히 <칠드런 오브 맨>의 출산 시퀀스를 떠올리게 되고, 그녀와 가족들이 모여 관람하는 <우주 탈출>(1969)은 말할 것도 없다.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이 우주복을 입고 노는 장면은 관객 머릿속의 생각이 맞다고 확증해주는 쇼트다. (이외에 <이 투 마마>와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은 무엇일까를 찾아보는 것도 <로마>를 재미있게 관람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요컨대 관객은 <로마>에서 그의 이전 작품에서 봤던 이미지의 근원을 발견하는 셈이다. 



영화 <로마>



알폰소 쿠아론의 사실주의와 형식주의

영화의 발전 방향을 사실주의와 형식주의의 관계로 파악한 사람은 루이스 자네티(Louis Giannetti)였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사실주의 영화는 왜곡을 최소화해서 현실세계가 드러나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며, “조작되지 않은 실제 세계의 객관적인 거울”(영화의 이해, 2012)과 같다고 말했다. 형식주의 영화는 조작과 양식화를 통해 현실을 보여주며, 상징과 은유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사실주의 영화가 추구하는 바는 실제 현실과 최대한 가까워지는 것이고, 형식주의 영화는 조작과 양식을 통해 최대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주의 영화에서 유효한 물음은 “현실을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Re-presentation)하는가”이지만, 형식주의 영화에서는 “가상의(가공의) 세계를 얼마나 주제(본질)에 맞게 구체적으로 ‘구현’(Presentation)하는가”이다. 길고 긴 영화사적 논의를 설명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를 ‘사실주의적 영화’라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나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적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의 전작들의 면면을 떠올리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든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 <칠드런 오브 맨>(2006), <그래비티>(2013). 이들을 ‘사실주의 영화’의 집합 아래로 묶는데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오히려 장르적인 면에서는 형식적이지 않은가.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는 형식적인 영화를 (현실세계처럼) ‘재현’하고, 사실적인 영화를 (특정한 주제에 맞게) ‘구현’한다. 떠올려보면, 그는 대체로 형식적인 장르를 마치 실제 세계처럼 그대로 ‘재현’하는데 탁월했다. 인류 종말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칠드런 오브 맨>에선 놀라운 실감이 느껴졌고, <그래비티>는 숨이 멎을 정도로 생생했다. 요컨대 그는 미래와 환상을 현실처럼 ‘재현’한다. 시퀀스 쇼트라고도 하는 ‘롱테이크’는 아무런 편집도 하지 않고 사실적인 영상을 만들어내는 카메라 촬영 기법이다. 이 쇼트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동일하므로, 이 촬영기법을 대표적인 사실주의적 촬영기법이라고도 한다. 형식주의적인 그의 영화에서,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촬영기법인 롱테이크가 자주 쓰이는 것은 그의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로마>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는 것은 이전 영화들과 결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전작들이 미래와 환상을 ‘재현’했다고 한다면, <로마>는 자전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가공의 세계를 ‘현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로마>에서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형식주의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나는 왜 그렇게 느꼈던 걸까, 조금 궁리를 했다.



영화 <그래비티>



원본(현실세계)을 고스란히 재현하려는 사실주의의 속성은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다. 영화가 완벽히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영화는 ‘영화’로서의 존재 의미가 그만큼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화-현실'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혹은 없애는) 방식을 택하는 사실주의 영화와는 달리, 형식주의 영화는 ‘영화-현실’ 사이의 벌어진 거리를 강조한다. 사실주의 영화라고 불리는 <로마>에서 형식주의적인 느낌을 받은 이유는 시종 피사체와 거리를 두는 <로마>의 카메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의 카메라는 마치 유령 같다. 어떤 존재감도 드러내지 않는다. 우두커니 서있거나, 때로 조용히 따라가면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한다. 섣불리 인물에게 다가가려는 성급함도 없다. 그동안 유려한 움직임으로 감탄을 자아냈던 그의 카메라 워킹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인물/풍경과 떨어져 있는 거리를 태평하게 숨김없이 내놓는다. 이것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자신의 기억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고 나는 느꼈다.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서 모든 순간, 풍경은 공평한 비중으로 존재한다. 공평한 것은 (자신을 포함한) 인물의 비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4남매 중 누가 어린 시절의 감독 본인인지도 확실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거의 매 쇼트가 패닝 쇼트(Panning Shot)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틸트 쇼트(Tilt Shot)는 영화에서 네 번만 쓰였다. 이 형식의 의도는 분명하다.  네 번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바닥의 물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클레오를 보던 오프닝(첫째), 옥상 위 침상에서 클레오와 함께 누워있다가 올려다본 하늘(둘째), 페르민의 위협으로 터져버린 클레오의 양수(셋째), 마지막 계단을 오르던 클레오의 걸음(넷째). 네 번의 쇼트는 한 번도 빠짐없이 모두 등장하는, ‘클레오’를 위한, ‘클레오'께 드리는 헌정과도 같은 쇼트다. 한편, 클레오 말고도 네 번의 쇼트에 모두 등장하는 것은 또 있다. 바로, 물이다. 엔딩을 제외한 세 쇼트에서 물은 모두 같은 운동을 한다. 위에서 아래로의 수직운동이다. 첫째,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으므로, 클레오가 청소하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둘째, 옥상에 널어놓은 빨랫감에서 뚝뚝 물이 흘러내린다. 셋째, 터져버린 양수가 흘러내린다. 이외에도 물은, 영화 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등장한다. 



영화 <로마>



물이라는 생명 | 영화 <로마>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점이 <로마>의 형식주의적인 첫 번째 요소라고 한다면, 두 번째 요소는 물이라고 나는 말하는 중이다. 형식주의 영화에서 은유가 중요하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물이 은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대답으로, 나는 단연 생명을 떠올린다. 생명은 <칠드런 오브 맨>에서 신성이었고, <그래비티>에서는 중력이었으며, <로마>에서 물로 표현된다. 태초 모든 만물의 발원이자, 생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으로서의 물. <로마>에서는 시종 ‘생명-죽음’이 대구를 이룬다. 어린아이들은, 군인에 의해 목숨을 잃은 다른 아이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박제된 강아지 머리 아래로, 살아있는 강아지가 돌아다닌다. 거대한 시위 현장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요행히 살아남았다. 결정적으로, 클레오는 살았지만, 뱃속에 품은 아기는 죽었다. 옥상에서 그녀와 파코가 함께 누워 “죽어 있는 것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대사는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죽음을 가정상태로 둘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사람만의 특권 같은 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 안에서 ‘죽음 충동’과 ‘삶의 충동’이 서로 투쟁하고 있다고 말했다. 죽음 충동이 생명 이전 무기체적 상태의 평온함으로 돌아가도록 추동하는 힘이라면, 삶 충동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추동하는 힘이다. 그런데, 이 구분은 어디까지나 인간 내면 안에서의 일이다. 추동하는 힘이 인간 외부로 표출되면, 삶과 죽음 충동은 완전히 뒤바뀐 방식으로 작동한다. <로마>는 이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낸다. 페르민은 내내 역동적인 삶의 활력으로 스스로의 생명력을 확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클레오를 향해 표출되는 순간(그는 거칠고 기습적으로 클레오에게 침입한다), 양수는 터지고 클레오의 아기는 유산됐다. 다른 이유도 아닌, 기습적으로 침입해 총을 겨눈 페르민의 움직임으로 아기가 죽게 되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다. 한편, 클레오의 움직임은 내내 초연하고 평온하다. 그 움직임은 프로이트의 말대로 생각하면 ‘죽음 충동’과 가장 가깝다. 그러나 그녀는 두 아이의 생명을 구한다. (파도를 헤쳐 가는 클레오의 걸음조차 어딘가 초연하면서도 부드럽게 느껴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국, 인간의 외부에서만큼은 부드럽고 평온한 것이 (죽음이 아니라) 삶 충동으로 이어지고, 역동적이고 과격한 것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 충동으로 연결된다고 <로마>는 부드럽게 말한다.



영화 <로마>



그 부드럽고 연한 것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물이라고, 알폰소 쿠아론은 생각하는 것 같다. <로마>에서 물은 여러 가지로 은유된다. 거대한 악마의 형상 같은 불길이 숲을 삼키려 할 때, 물은 그것을 진압하는데 쓰이고, 마음속에서 울컥울컥 치미는 심란한 내면의 불길을 잠잠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물은, 물이 부족한 지역의 생명수이면서, 존귀한 생명을 잉태하는 양수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물은 더럽혀진 집을 씻기도 하면서, 동시에 오염된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내리도 한다. 두 아이를 바다에서 구한 뒤, 내내 삼키고 있던 말을 그제야 내뱉는 클레오의 말은 회개 같기도 하고, 고해성사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 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어요.” 마치 바다의 침례, 그러니까 생명의 세례를 받고 거듭 난 사람의 고백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차창 너머를 바라보는 클레오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 같은 것이 연약하게 스친다. 


이제, 카메라의 넷째 틸트 쇼트(엔딩)에 대해 말할 차례가 된 것 같다. 앞선 세 차례의 틸트 쇼트에서 수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물이었다. 마지막 쇼트에서 알폰소 쿠아론은 수직으로 운동하는 자리에 물 대신 ‘클레오’를 넣었다. 클레오는 더 이상 아래로 하강하지 않고  상승한다. 물은 더 이상 떨어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그래비티>에서 다시 태어난 여성과 <칠드런 오브 맨>에서의 생명의 구원, 이 모두가 소박하지만 진하게 배어있는, 관객 저마다의 삶을 어루만지는 환상적인 쇼트다. 모든 생명에게, 샨티 샨티 샨티. (평안을 비는 힌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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