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은 정확한 여름

선인들은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by 이정식

지금 이곳은 정확한 여름



여름이다. 한여름. 이 계절의 공기는 눅눅하고 바람은 무겁다. 햇빛이 내려주는 열기를 고스란히 흡수한 대지는 밤이 되어도 제몸을 식힐 생각이 없다. 더위는 매번 속수무책으로 닥쳐온다. 그 앞에서 나는 늘 당한다. 처음에는 선풍기로, 그것마저도 역부족이면 에어컨으로 성난 열기를 식혀보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다. 더위는 피해야 하는 맹수같다. 피하지 않으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래도 이번 여름은 작년보다는 비교적 온순한 편이다. 재작년, 작년의 여름이 몹시 맹렬했던 걸 떠올리니 문득 궁금하다. 우리 시대는 문명의 힘으로, 사나운 맹수를 관리, 통제할 수 있었는데, 피할 도리 없이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오래전 선인들은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선인들은 여름을 ‘녀름’이라고 불렀다. 녀름은 순 우리말인데, 덥다, 뜨겁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무척 직관적인 명칭이다. 여기에는 어떤 사유가 들어설 공간조차 없이,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감각하는 단어. 그렇게 감각한 것을 머리의 언어가 뒤따라 가며 호명하는 계절. 관념이 아니라, 감각이 자신 그대로를 표현하는 계절. 그래서 ‘더위’라는 말도 여름과 같은 의미가 되는 걸까. 왜 유독 여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녀름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데, ‘농사’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선인들은 풍작을 일컬어 ‘녀름 잘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건 여름과 농사가 시간적으로 인접해있어서 그렇게 사용했는데, 나중에는 농사와 여름을 구분을 하기 위해서 한자어 ‘농사(農事)’로 바뀌게 됐다고. 그러니까 여름은 농사짓는 시간이다. 밭에서 곡괭이를 들고 노동하는 시간. 낮이 길어 땀방울은 굵어지고 휴식은 모자란 계절.


선인들에게 녀름은 얼마나 가혹한 존재였을까 싶다. 뜨겁고 더운 것도 모자라, 삶은 끊임없는 노동의 연속이라는 실존의 버거움을, 이 단어는 자신을 호명하는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었을 것이다. 녀름 앞에서 모든 존재는 비껴나갈 길 없이 공평하다. 녀름을 통과하는 동안 모든 사람은 자신의 땀방울을 공물로 바쳐야만 한다.


그래도 녀름에는 여름을 타지 않는 의미도 있다. 녀름은 ‘열음’과 동음이 되면서 열매를 뜻하기도 했다고. 그러고 보니, 수박이나 포도 같은 여름과일은 유난히 많은 수분이 들어있었다. 농사지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 수분만큼 여름과일로 다시 섭취할 수 있도록 설계해놓은 조물주의 배려같기도 하고, 열매와 여름을 잇대어놓은 선인들의 지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뜨거운 볕 아래에서 농사를 짓고, 그 결과로 열매를 먹으며, 먹은 힘으로 다시 농사를 짓고. 녀름은 이렇게 세 의미를 동력 삼아 시간을 흘러 보낸다. 지구는 이렇게 일 년을 돌아왔다.


이제, 한여름이다. 한은 한창이라는 뜻이지만, ‘정확한’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매해마다 번번이 맞는 여름, 피할 수 없이 맞는 ‘정확한 여름’이다. 한여름, 선인들의 녀름나기는 이랬을 것이다. 삶이 자신의 생을 무너뜨리려고 닥쳐오거나, 멱살을 잡고 흔드느라 숨이 턱턱 막히는 중에도, 피하지 말고 정확하게 마주하기. 그렇게 여름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한여름'이라고 입으로 부르면서 선인들이 느꼈을 감정을 떠올린다. '뜨거움-노동-열매'라는 여름의 거대한 순환에서 선인들은, 지금의 치욕과 고통이 언젠가는 삶의 행복과 긍지로 연결될 것이라는 낙관을 가졌다. 오늘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고있고, 지금 이곳은 정확하게 여름이다. (20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