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없이, 기다리기

불안한 여행기 #2

by 이정식


기대없이, 기다리기

불안한 여행기 #2



안내방송이 다시 울렸다. 제주도행 비행기에 탑승하실 승객은 지금 바로 탑승 수속을 밟으라고 재촉하는 방송이었다. 방송이 재촉할수록 나는 스스로를 더 채근했다. 어떻게 할래? 이제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얼굴과 손에서 땀이 제멋대로 흘러내리는 것을 나는 내버려 두었다. 추워서 옷깃을 여미며 공항 로비를 걷는 행인들과 달리 나는 땀을 흘리고 있구나, 그 순간 생각했다. 정말 나는 이상하다, 라는 생각도 함께. 그러다가 문득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결국 나는 일어서서 짐을 들고 공항 보딩 게이트를 등진 채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죄지은 사람처럼 내 걸음은 느렸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걸었을 것이다. 부끄러웠다. 누구에게도 들킬 수 없는 치부처럼 느껴졌다. 고작 비행기 하나 타지 못해서 제주도도 가지 못하는 내가 창피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모를 일인데, 나는 마치 그 사실이 다 들통이 난 것처럼 화끈 거리는 얼굴로 느릿느릿 걸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실패자처럼 느껴졌다. 내 인생에 부과된 고난을 끝내 통과하지 못하고 참패한 채로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내가 그런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새벽에 챙겨간 짐을 오전 10시에 그대로 다시 가져왔다. 그래도 여행을 가고 싶니?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나는 그래도 가고 싶었다. 비행기는 타지 못하지만 다른 교통수단을 통해서라도, 해외나 섬에는 갈 수 없지만 국내 지역이라 하더라도, 나는 꼭 가고 싶었다.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걸.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김연수,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 론리플래닛) 라는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꼭 ‘세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를 둘러싼 ‘일상’을 바꿔보고 싶었다. 처음에 수치스럽던 마음이 조금씩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제 다시 정하자. 다른 여행지를.


김영하 작가는 데이비드 실즈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데이비드 실즈가 사용한 표현을 이렇게 바꾸어 여행에 적용시킨다. 여행은 바로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라고. 어떤 기억도, 정서도, 회한도 소거되지 않은 일상으로부터 달아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몇 번쯤은 필요하기 마련이라고. 나는 집 근처 스타벅스 카페에 앉아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제주도 여행을 준비할 때처럼 여행지를 고르고, 그곳에서 무엇을 먹으며, 또 잠은 어디에서 잘 것이며, 이동은 어떤 방향으로 할 것인지를 차근차근 결정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이 모든 걸 4시간만에 전부 해냈다는 데 있었다.


내가 정한 지역은 부산이었다. 부산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여행하고 온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이면 내가 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좋은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바다.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의 소울시티인 ‘무진’처럼, “밤사이에 진군해온 적군들”이나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 같은 안개가 도처에 깔려있어서 그곳에 있기만 해도 어떤 무드가 형성된다거나, 저절로 뮤즈가 떠오르는 곳은 아니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미 내 마음에도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같은 뿌연 안개가 짙게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계획처럼 되지 않았던 어제의 일과 계획만으로는 될 수 없을 내일의 일을 나는 기다릴 뿐이다. 어떤 기대도, 후회도 없이. ‘기대가 없다’라는 것이 꼭 나쁜 상황일 때만 쓰는 표현이 아니라는 걸, 그 순간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내일 가져갈 짐을 또 챙길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그냥 잠을 청하려다가 문득 일어나서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우황청심환을 꺼내서 책상에 놓았다. 아마 당분간 그걸 마실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우황청심환을 먹지 않고도 먹은 것처럼 모처럼 깊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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