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으로만 견딜 수 있는 어떤 삶에 대해 | 영화 <살아남은 사람들>
거짓으로만 견딜 수 있는 어떤 삶에 대해 | 영화 <살아남은 사람들>(버르버나시 토트, Those Who Remained, 2019)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에서 존경하는 비평가는 이런 글을 덧붙였다. “내가 주인공이지만 내가 쓸 수만은 없는 나의 이야기, 그것이 인생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내가 내 인생의 비평가가 되어 그것을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일, 그럼으로써 그것이 다시 쓰이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얀 마텔, <파이 이야기>, 추천사) 내 삶은 나만이 아니라, 타인과 상황이 함께 쓰는 이를테면 공동저자 같은 것인데, 그렇다면 내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인생을 해석하는 일, 비평하는 일, 다시 쓰이도록 만드는 일일 것이다. 이런 글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가 2005년 케니언대학교에서 했던 졸업식 축사에서 학생들에게 충고했던 내용, 이른바 ‘자신의 선택으로 만드는 삶의 의미’ 같은 것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는 삶이란 그 자체로 가치 있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있다고 말한다.)
내 삶에 적용할법한 의미 있는 훌륭한 통찰이라고 호들갑 떨 수도 있지만, 이런 언명의 외곽에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자 조심스러워졌다. 애써봐도 내 삶에 일어난 일을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사람들. 어떤 언어로도 그 고통의 총량을 모두 담기에 불가능한 삶의 거대한 사건을 겪은 사람에게는 ‘선택’이라는 것이나, ‘해석’이라는 것이나, ‘삶의 의미’라는 단어가 공허한 의미로 느껴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말이다. 영화 <살아남은 사람들>의 인물들, 부모가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것을 여전히 외면하려는 클라라(아비겔 소크)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알도(카를리 하이덕)의 삶을 위로한답시고 그런 말들을 운운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에서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게 아니라, 뒤에서 그들이 걷는 삶을 고요히 따라가 보는 일일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삶 앞에서 보이는 태도, 지어 보이는 표정 같은 것을 이해해보려 했다. 그것은 거짓이다.
그러니까 거짓의 태도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면서 의사 알도에게 인간적 호감을 느낀 클라라는 그를 다시 찾아와 호감을 표현하는데 거리낌 없다. 집까지 배웅한 클라라의 호의를 외면할 수 없던 알도는 그녀를 집 안으로 들이고 차를 대접한다. 이때 클라라는 그에게 묻는다. “왜 절 보내려고 했어요?” 그러자 그는 대답한다. “혼자인 게 좋아.”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클라라는 눈치챈다. “그거 거짓말이죠?” 그는 말한다. “늘 거짓말이지.” 이런 도식의 대화는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등장하는데, 거대한 비극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여섯 명(클라라와 알도를 포함한)이 모인 올기(마리 나기)의 생일잔치 자리에서 알도는 불현듯 자리를 비우고 화장실로 간다. 클라라는 걱정됐는지, 화장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이윽고 문을 열고 나온 그에게 묻는다. “괜찮으세요?” 알도는 대답한다. “그래.” 그러나 이번에도 클라라는 알도의 대답이 거짓임을 눈치챈다. “방금도 거짓말이었죠?” “늘 거짓말이지.”
이것을 삶에 대한 거짓의 윤리라고 할 수 있을까. 알도는 클라라에게 거짓말을 하지만, 그건 그녀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삶의 태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을 겨우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방법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거대한 비극이 알도의 가정을 덮치기 전, 사랑하는 아내, 아들과 나눴던 행복의 기억을 자물쇠로 단단히 잠근 서랍 안에 봉인해놓은 이유가. 보관해두면서도 끝내 그 사진들을 다시 들춰보지 않으려는, 영원히 외면하려는 굳은 결심의 이유가 거기에 있던 걸까. 이런 태도는 클라라도 마찬가지인데, 그녀는 전쟁이 끝났는데도 부모가 수용소에서 돌아오지 않는 점을 의아해 하지 않으면서 아직도 그들이 수용소에 갇혀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부모에게 답장을 받을 수 없는 편지를 보낸다.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려는 듯, 알도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전쟁이 끝나도 아직 수용소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면서요?’ 진실을 외면하면서 클라라는 기꺼이 거짓 안에 머무르기를 선택한 셈이다. 거짓에 지탱해서야만 겨우 버틸 수 있는 삶이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히 있다. 다시 말해볼까. 거짓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진실의 윤곽 같은 것이 누군가의 삶에는 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윤리는 진실같은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외면하는 것이, 거짓이 더욱 필요한 게 아닐까. 이점에서 나는 한강의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 수록된 “회복하는 인간”이라는 단편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는데, 거기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화자인 당신과 언니가 나눈 대화에서 당신이 이렇게 말문을 연다.
“난 잘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그런 화자의 말에 언니의 얼굴이 설핏 어두워졌다가 거울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건너다보면서 이렇게 대꾸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삶의 의미’나 ‘삶의 진실’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을 외면하는 일이, 간절히 거짓으로 자신을 속이는 일이 더욱 유용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들은 거짓으로 자기 삶에 대해 진실한 것이다. 라캉이 이렇게 말했던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바꿔말하면, 자신에게 속는 나만이 방황하지 않는다. 벤야민이 말했던 희망 없는 이에게 희망이 있다는 말도 그 의미가 라캉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클라라와 알도가, 그들만 아니라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 어떤 거대한 비극을 겪은 이들 모두가,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닥쳐온 삶의 진실에 대해 모르기를, 나는 진실로 바란다. (2021. 2. 1.)
보론
얼마 전 극장에서 봤던 영화 <소울>이 이 글의 결론과 희미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삶의 의미는 '목적'나 '영혼'처럼 내면 깊숙한 곳보다는, 어쩌면 표면과 더 가깝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