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식 Oct 26. 2020

이름은 하나의 징후다

영화 <마틴 에덴>, 이상과 페소아의 길

이름은 하나의 징후다

마틴 에덴 앞에 놓인 이상과 페소아의 길



로마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연설을 할 때 어떤 자가 황제의 문법 오류를 지적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로마의 황제다. 당연히 나는 문법보다 더 높다.” 그날 이후로 역사는 그를 지기스문트 슈퍼 그라마티캄super grammaticam으로 불렀다. 얼마나 대단한 상징인가! 그러므로 자신이 말하는 바를 말할 줄 아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로마의 황제인 것이다. 그런 칭호가 기분 나쁠 것은 없다. 정신의 존재는 곧 그 자신의 존재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텍스트 84, 봄날의 책.



   <마틴 에덴>을 다 보고서 나는 문득 ‘이상’과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이름을 떠올렸는데, 마틴이 그들과 어떤 면에서 겹치는지, 또 어떤 지점에서 벌어지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영화를 관통해나가는 하나의 경로가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내가 본 마틴(루카 마리넬리)은 마틴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마틴 자신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던 사람이다. 이상이 ‘김해경’(이상의 본명)으로부터 떠나고 싶던 것처럼, 페소아가 작품에 자신의 목소리를 제각기 담은 수많은 헤테로님 heteronym을 창조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니면서 자신이기를 꿈꾸던 슈퍼 그라마티캄, 즉 어떤 규범과 규칙, 사회적 통념으로도 포획될 수 없는 ‘로마의 황제’가 되기를 꿈꾸던 인물이다.


    마틴의 삶과 이상을 도식적으로 구분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한가운데에는 (극의 초반, 마틴의 현재 위치이기도 한)‘프롤레타리아트’의 삶이 있다. 마틴의 오른쪽에는 상류층인 부르주아지의 삶이 있고, 반대로 마틴의 왼쪽에는 ‘사회주의자’의 삶이 있다. 흥미롭게도 세 영역의 삶은 세 명의 인물로 마틴에게 현상하는데, 오른쪽 부르주아지에는 (마틴이 첫눈에 반한) ‘엘레나(제시카 크레시)’가 있고, 왼쪽 사회주의자에는 (마틴이 스승으로 모신) 루스(칼로 세치)’가 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는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의 마르게리타가 있고. 요컨대 그의 앞에는 세 가지의 삶이 놓여있던 셈이다.



영화 <마틴 에덴>


   마틴은 마틴이기를 싫어했으므로 오른쪽의 삶에 금방 매혹되었다. 어휘나 문법은커녕 기초적인 정규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마틴은 자신에게 학문과 지식을 가르쳐준 엘레나에게 푹 빠졌는데, 그녀에게 그가 한 말은 곱씹을수록 징후적이다. “전 당신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싶어요.” 마틴이 정말 사랑한 것은 그녀였는지, 혹은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그녀의) 삶의 영역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여하튼 마틴은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급격하게 자기 삶을 우회전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결정적인 행로는 아니었다. 사회주의자 루스를 만나고 그는 자신의 작품에 정치적인 메시지, 사회 변혁적인 의미들을 담으면서 그는 삶을 왼쪽으로 틀어버린다.


   흥미롭게도 마틴은 결국 세 가지의 삶을 모두 거부했다는 점. 보기에 따라서는 프롤레타리아트 출신의 마틴이 부르주아지로 올라서는 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좌절된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적어도 내 눈에는 마틴 자신이 그 길을 거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오른쪽 길과 왼쪽 길 입구에서 각 영역의 구성원들과 열띤 토론을 한다. 루스와 함께 간 사회주의자들의 집회에서 그는 그들의 ‘비이성적인 집단성과 집단화의 몰개인주의’를 신랄하게 꼬집었고, 반대로 엘레나의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부르주아지들에게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라며 치를 떨었다. 마틴은 마틴이기를 견디지 못해 우왕좌왕했지만, 결국 마틴은 마틴이 되기를 선택하고 다시 마르게리타가 있는 가운데의 삶으로 돌아온다.



영화 <마틴 에덴>



   묘한 부분은 마틴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가운데의 삶에 있으면서 성공과 몰락을 모두 경험했다는 점. 그동안 잡지사와 언론사에 수차례에 걸쳐 기고했던 글들이 그제야 주목을 받으며 인정받는다. 그토록 원하던 작가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가, 했는데 역설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마틴의 눈에는 점점 총기가 없어지던 것. 약에 손을 대면서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가 싶을 정도로 스스로와 불화하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그는 삶에서 무엇을 가장 원하는 걸까? 어쩌면 이 질문들은 우리보다 마틴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자신도 그 대답을 찾지 못해서 계속 약에 취해 있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가해함때문에 그는 명료성보다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과 의도적으로 불화를 추구한 사람이라면 이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인공적 삶’을 추구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날개>의 문장에서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데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와 “자신을 위조하는 것”을 권하는 대목. 표준적인 삶은 따분하고, 부르주아지의 따분한 삶에 침을 뱉기 위해서는 반항적인 행동이건, 인공적인 삶이건 행하겠다는 것. 그래서 이상은 김해경이라는 이름을 치우고 이상으로 살기를 선택했지만, 안타깝게도 마틴에게는 마틴 에덴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없었다. 자기 자신과 불화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 중에서 이상은, ‘이렇게나 명료하게 다른 삶도 있다’며 자신있게 보여준 하나의 전범이지만, 마틴은 이상처럼 자기 삶을 가장할 수도, 인공적으로 꾸며낼 수도 없었다. 적어도 마틴에게는 ‘모호함’만이 명료했다.



영화 <마틴 에덴>



   이상의 길이 아니더라도 그가 선택할  있는  하나의 길이 있다고, 나는 마틴에게 제안하고 싶다. 바로 ‘페르난두 페소아 길이다. 페소아를 지칭할  가장 우선적인 수식은 ‘헤테로님(Heteronym), 명의 작가라는 것이다. 페소아는 평생 사용한 헤테로님이 모두 일흔 가지가 넘을 정도라고 하는데, <불안의 > 번역한 배수아 소설가에 의하면, 그녀가 여섯    ‘셰발리에르  파스라는 가상의 인물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고도 했다. 그렇게 창조된 헤테로님들은 몹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는데, “포르투갈어뿐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작가, 소설가, 시인, 번역가, 철학자, 비평가, 점성술사, 그리고 자살한 귀족이며 심지어 불구인 여성이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관점과 세계관을 갖고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불안의 >, ‘옮긴의 ’, 794.)


   배수아는 페소아의 이런 기획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경우네는 페소아가 ‘의도적으로’ 헤테로님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강박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헤테로님으로 분열해버린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가 남긴 편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생략) 모종의 사로잡힘의 산물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같은 책, 794쪽) 페소아는 이상처럼 의도적으로 삶을 가장하지 않고도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요컨대 페소아는 페소아가 아닌 방식으로, 페소아답게 살았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마틴에게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건네주고 싶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마틴은 어렴풋이 자신의 환영을 보고는 따라간다. 환영을 따라간 곳은 망망한 바다가 펼쳐진 곳. 마틴은 자기 자신을 좇아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그는 끝까지 자기 자신과 그만큼 떨어져 있었고, 또 그래서 자기 자신이 되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처럼 느껴져서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랬던 그의 생애였으므로,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은 영화의 제목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틴 에덴>. 배수아 소설가의 표현을 빌려 마지막 문장을 맺고 싶다. 노멘 에스트 오멘Nomen est omen, 이 영화의 이름은 하나의 징후다.



“나는 내 안에서 여러 개성을 창조해냈다. 나는 계속해서 다양한 개성들을 창조하고 있다. 내가 꿈을 꿀 때마다 모든 꿈이 하나하나 육신을 입고 서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꿈들은 나를 대신하여 계속해서 꿈을 꾼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텍스트 299’.

매거진의 이전글 <경주>와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