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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Sep 03. 2020

<경주>와 풍경

<경주>와 풍경




 2년 전 경주에서 거대한 무덤 곁을 걸었던 것을 기억한다. 무덤 앞에서 어떤 커플들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도 하고 온몸을 움직이면서 허공으로 웃음을 던지는 아이들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누르는 부모들도 있었다. 그 모든 삶의 활기를 뿜어내던 곳이 바로 무덤 앞이라는 것이 내게는 생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생명과 죽음이 기묘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경주 고유의 독특한 정취를 풍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덤 앞의 풍경을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한다.





   풍경에 대해서라면 벤야민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그는 풍경의 독특한 특징을 이렇게 포착한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재현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미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습관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시작하면 그 풍경은, 마치 우리가 어떤 집을 들어설 때 그 집의 전면이 사라지듯이 일순간 증발해버린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사유 이미지”, 김영옥 외 역, 길, 2007, 120쪽)  벤야민의 생각을 따르면 우리가 어떤 도시의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은 ‘멂과 가까움’이 희미하게 공명하는 순간인데, 이 문장에서 멂과 가까움을 낯섦과 낯익음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풍경은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이 희미하게 공명하고 있는 곳에서 발생한다는 것. 낯선 것만 있어서도 안되고, 낯익은 것만 있어서도 안된다. 공명해야 한다. 내가 경주에서 바라봤던 풍경이 풍경일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에서 낯선 것(무덤, 죽음)과 낯익은 것(어린아이, 생명)이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경에 대해 조금 더 말하자면 문학평론가 서영채의 문장을 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풍경 속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의 이행과정을 대비하면서 두 종류의 풍경이 있다고 했다. 낯선 것에서 낯익은 것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우리가 대체로 경험하는 류의 풍경이라면, 낯익은 것이 오히려 낯선 것으로 바뀌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가 ‘두 번째 풍경’이 발생하는 순간이라고 그는 말한다. 첫 번째 풍경보다 두 번째 풍경이 좀 더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첫 번째 풍경은 관조적인 것일 수 있으되 두 번째 풍경은 관조적이기 어렵다. 두 번째 풍경 속에는 그 안에 주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풍경은 그 자체가 관조적 거리가 확보되는 순간에만 생겨난다. 그렇지만 ‘두 번째 풍경’은 그 관조적 거리를 다시 주체의 자기관계의 형태로 대상 속에 투입해 넣음으로써 만들어진다. 요컨대 ‘두 번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주체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셈인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기에서 풍경의 주체는 ‘자기를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고 해야 한다.

_서영채, “절대 공간으로서의 풍경”, 한국현대문학연구, 41쪽.


   그러니까 주체가 풍경을 바라보면서, 대상과 자신의 관계성을 떠올리는 것이 ‘두 번째 풍경’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주체는 풍경을 보면서 동시에 풍경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영화 <경주>



   풍경에 대해 길고 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것은, 영화 <경주>에서 ‘두 번째 풍경’적이라 할 만한 순간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북경대에서 강의하던 최현(박해일)은 친한 형 창희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한국으로 건너왔다. 장례식장에서 그는 또 다른 친한 형인 춘원을 만났는데, 문득 7년 전 셋이서 경주를 방문했을 때 찻집 벽에 걸려있던 춘화를 떠올린다. 그리고 돌연 그는 경주로 내려간다. 춘화를 보기 위해서다. 그의 경주행이 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라는 점, 그리고 그가 방문한 찻집 아리솔에서 춘화는 사라졌고 남은 흔적만을 목격하는 점(새로 찻집을 인수한 주인인 공윤희가 춘화를 벽 안으로 묻었다고 말한다.)에서 그는 ‘두 번째 풍경’적인 순간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낯익은 것이 낯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풍경’에서 중요한 것은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으로의 단순한 이행과정이 아니라, 주체와 풍경의 관계라고 위에서 이미 말했다. 주체가 낯선 것과 맺는 관계성(이전에 낯익은 것과 매개된 자신의 기억, 그리고 낯선 것과 새롭게 연결될 지금의 자신, 그 과거와 현재의 차이)이 떠오르는 순간이 주체가 두 번째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인데, 그렇다면 최현은 경주에서 두 번째 풍경을 보면서 자신의 어떤 면을 새롭게 느꼈을까.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망이나 미처 깨닫지 못한 자기 자신의 결여 같은 것을 그는 경주에서 발견할 수 있던 걸까. 그래서 그는 두 번째 풍경을 마주하고 ‘존재론적 변화’를 겪는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게 되는 걸까. 나는 영화 <경주>의 기획이 바로 여기에 있는 줄 알았는데(영화의 초점인물 최현이 경주에서 바라보는 ‘두 번째 풍경’),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내 예단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방인 최현은 경주에서 두 번째 풍경을 마주하지 않는다.



영화 <경주>



    물론 희미한 사태는 있다. 존재론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지만, 조짐이라 할 만한 순간은 영화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경주의 이방인인 최현 대신 경주에 사는 공윤희(신민아)에게서 나온다. 공윤희는 최현이 찻집 ‘아리솔’에 들어왔을 때,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아는 사람을 닮았어요.” 낯선 사람에게서 낯익은 것을 그녀는 처음 발견한 셈이다. 이후 그날 밤 최현을 집으로 데려온 그녀는 그에게 묻는다. “귀 한번 만져봐도 돼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 대해 간접적으로 밝힌다. “귀가 죽은 남편을 닮았어요. 얼굴은 안 닮았는데.”(이제껏 싱글인 줄 알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기혼자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어둑한 집에서 연한 조명이 서서히 번지는 동안 그녀는 최현의 두 귀를 만지면서 둘 사이의 성적인 결합이 이루어지는가 했는데, 영화는 정반대의 길을 걸음을 옮긴다. 만져보니 다르다는 것이다. 한순간 성애적 분위기는 사라지고 최현은 거실에서, 윤희는 자신의 방에서 각자 잠을 청한다. 그녀의 심정을 전부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짐작해보자면, 그녀는 낯선 최현에게 낯익은 자신의 남편을 떠올리며 호감을 느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낯익은 모습을 가까이해보니 사실은 전혀 다른 낯선 모습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실망한 것. 이런 순간들은 그녀가 최현을 통해 ‘두 번째 풍경’적인 순간을 마주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이에게서 낯익음을 발견하고, 낯익은 그에게서 다시 생경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녀는 자기 삶의 결여와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최현을 통해 다시 마주한 것이다.


   공윤희의 경우는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두 번째 풍경’을 누구의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의도조차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하자. 영화에서 어느 누구도 ‘두 번째 풍경’을 마주하고 존재론적으로 변화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것은 <경주>라는 서사의 목적지가 아닌 것 같다. 영화의 초점인물인 최현도, 공윤희도, 최현과 깊은 사연이 있던 여정(윤진서)과 윤희를 짝사랑하던 영민(김태훈)도 경주에서 ‘두 번째 풍경’을 마주하지 않는다. '두 번째 풍경'을 마주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 너머에 있다. 요컨대 두 번째 풍경은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스크린 밖 관객을 마주본다. 어쩌면 최현을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은 '두 번째 풍경'의 맥거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시작은 경주라는 공간과 그곳의 여러 인물 군상을 최현의 시선으로 구축하는 것 같았으나(말하자면 '최현의 풍경'), 영화의 끝에 이르러 정작 최현은 갑자기 괄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스크린에서 그가 소거된 다음 남은 장면은 7년 전 경주의 찻집 아리솔에서 최현을 비롯한 셋과 함께 주인이 함께 춘화의 곁에서 나누는 대화의 쇼트다. 그 형형한 기억의 주체는 누구일까? 영화는 기억의 소유를 어떤 이의 것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탈소유화 해버린다.



영화 <경주>


   말하자면 그 기억은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본 관객 모두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 장면은, 어쩌면 관객에게 ‘두 번째 풍경’이 아닐까. 어째서 그런가. 우리는 낯선 그 장면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낀다. 내내 인물들이 춘화와 찻집 아리솔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을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스크린을 보면서 그 장면을 보는 우리 자신을 본다. 우리는 최현이 왜 그토록 춘화를 보고 싶어 했는지, 그 동기 속에 숨은 무의식적 욕망이 얼마나 깊은 비중을 갖고 있는지 모두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감한 선택을 한 적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안다. 최현은 7년 전의 저 춘화를 보기 위해 오늘 경주에 왔고, 우리는 우리의 욕망(또는 결여)을 채우기 위해 내일 어딘가로 향할 것임을 안다. 힘들게 찾아간 그곳이 우리가 원하던 ‘두 번째 풍경’을 설령 보여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떤 곳에서 풍경을 발견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영화를 여행한다. (202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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