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저녁, 이제 끝난 식사를 정리하려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교회 성도님이거나 주차 차량 때문이거나 스팸전화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받았는데 전화기 너머로 약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외삼쵼”이라는 목소리가 건너왔다. 지호였다. 스피커폰이었는지 엄마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지호 핸드폰이에요” 오늘 유치원을 졸업한 지호에게 세미와 지호아빠가 선물로 핸드폰을 사줬다고. 그 핸드폰으로 전화할만한 사람들에게 전화하고 있다고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 선물을 약속해두고는 아직 구입도 못한 데다가 졸업 선물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뭘 갖고 싶은지 물었다. 지호는 음… 하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얼른 말해. 외삼촌 기다리잖아.’라는 제 엄마의 다그침에 드디어 입을 뗐다. “저는 갖고 싶은 거 없어요. 핸드폰이 있잖아요.” 갖고 싶다는 게 없다는 지호의 말이 나는 서운해서 어떻게 하면 선물을 줄 수 있을지, 가능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럼 먹고 싶은 건?”
“없어요.”
“갖고 싶은 거 정말 없어?”
“네.”
참다못한 내가 ‘그럼 레고는 안 필요해?’라 물으니, 그제야 지호는 “그건 좀… 필요한 것 같아요.”라 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룽설이 ‘이제 지호에게 레고는 안 사주기로 했잖아요.’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는데, 엄마도 마침 ‘이제 레고는 그만 사줘라’고 해서 선물 고르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결국 다음에 언제 한번 피자를 시켜주는 걸로 우리는 지난한 합의를 마쳤다. 이쯤 되면 선물은 받는 지호보다 주는 나를 위한 것이라 할 만하다.
엊그제 토요일 밤 지호는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면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새예요.’
사진에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제 몸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는 새가 한 마리 있었다. 나는 문득 지호의 모습을 상상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눈에 맞추고, 새가 놀라 날아가지 않도록 고요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피사체에게 다가갔을, 그렇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하고서 셔터를 눌렀을 그 모습을. 잠깐 머물렀다가 날아갔을 그 새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처럼 만족스러웠을 거라 짐작하면서.
그리고 나는, 자신의 선물을 내게도 보내는 그 마음을 생각한다. 자신의 소박한 낙천을 누군가와 기필코 나누겠다는 귀여운 의지에 대해. ‘선물은 받는 사람만 아니라 주는 사람을 위해서도’라는 표현이 이 경우 앞에선 더는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창밖에 가느다란 눈이 성글게 내려온다. 하강하는 속도가 느려 유심히 보면 눈송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창문을 여니 눈송이 몇이 실내로 넘실거리며 들어왔다. 사진을 찍어야겠다, 고 나는 생각했다. (2022.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