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결벽증

황정은, 『작은 일기』(창비, 2025)

by 이정식

황정은의 『작은 일기』(창비, 2025)를 읽었다. 일어난 일을 해명할 사유와 낱말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허둥대는 동안, 감각과 언어의 의미망이 벼려진 동시대 작가가 쓴 문장을 읽는 것이 축복이라 느껴졌다. 이것이 우리들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단상을 적으며 그는 영화 속 소년의 결벽을 알아차렸다. 세상을 만들고 붕괴를 막아온 신적 존재가 자신의 후계자로 소년을 지목하자 자격이 없다며 그는 거절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사업을 했는데, 자신이 나고 자란 배경이 전쟁이라는 자명한 악과 무관할 수 없으므로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소년의 선택이 아예 납득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황정은은 반문한다. 이렇게.


그러나 더러움은 세상의 조건이 될 수 없나.

그걸 품고도 아름다울 방법은 없나.


새하얀 순면의 천에 엎질러진 와인의 얼룩 같은, 희고 얼룩진 그것은 영영 아름다움을 훼손당한 것인가. 그렇게 묻는다, 황정은은. 그럴 수 없다는 눈빛을 빈 여백에 감춰두고서.


그러나 내가 아는 황정은은 그 자신부터 결벽을 앓는 사람이다. 작가란 본디 보고 듣고 만지고 맡은 것을 쓰는 존재이므로 관찰자의 시각으로 팽목항을 볼까 봐 사고가 일어난 그해 진도에 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에게도 소년과 비슷한 결벽증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지 않나. 그도 그래서 “결벽이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180쪽)며 방어적인 문장을 적는 것 아니겠나.


누군가에게 유난으로 보이겠지만, 내게는 결코 과장된 예민함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해 10월 발간된 세월호 추모 에세이집에서 그녀가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 경우 4월 16일 이후로 말이 부러지고 있습니다. 말을 하든 문장을 쓰든 마침에 당도하기가 어렵고 특히 술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문장을 맺어본 적이 오래되었다. (…) 이대로는 내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88~89쪽.


같은 책에서 소설가 김애란도 비슷한 문장을 적었다.


한때 크고 좋은 말들을 가져다 아무 때고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약탈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안산에서 이제는 말 몇 개가 아닌 문법 자체가 파괴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와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

-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같은 책, 14쪽.


언어의 불능상태에 빠진 작가들의 이 고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회의 일각을 무너뜨린 재난과 슬픔에 관통당한 이들을 향해 한 번 더 퍼부어지는 폭력 앞에 그들도 어딘가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2014년 진도와 2021년 이태원, 2024년 용산과 무안에서의 죽음과 사건은 남겨진 자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 수치와 죄책감에 꿰뚫린 작가들은 더 이상 무엇인가를 쓰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어코 적었다. 부스러기 같은 낱말과 술어가 잘 호응되지 않는 문장으로.

그리하여 간신히 말하고 쓸 수 있는 아름다움이란, 망가진 문법더미의 단어들.

잔해와 형해의 흔적으로만 남은 것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것.


관찰자의 시선에 설령 주체의 욕망이 섞이더라도, 그렇다고 응시 자체를 포기해 버린다면 언어불능의 사태는 끝내 사건 자체의 부재가 되고 말 것이니. 일어난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기록으로 남기는 그들의 고유한 감각과 통찰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아렌트가 취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악의 진부성(악의 무사유)이라는 빛나는 통찰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마운 것이다. 오염된 자신의 자격을 묻는 의혹과 슬픔에 연루되느라 함께 아픔을 느낀 통각을 뚫고 끝내 적힌 이 문장들이. (2025.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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