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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y 18. 2018

당신이 써야 할 이야기

영화 <버닝>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굳건히 닫혀있는 문, 그리고 그 옆에서 야트막하게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종수(유아인)는 단단히 닫혀있는 문 옆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카메라는 종수가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준다. 이윽고 종수는 큰 짐을 어깨에 메고 어디론가 향하는데, 카메라는 종수의 발걸음을 뒤따라가며 그의 뒷모습을 화면 한가운데에 놓는다. 저 무거운 짐을 두 어깨에 이고 고단한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저 뒷모습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는 어떤 사람일까. 영화 <버닝>은 그래서, 그의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

자그마치 8년 만에 신작 <버닝>으로 돌아온 이창동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청춘들을 위로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그만의 위로법은 결코 ‘따뜻함’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서늘함’에 가까운 위로법이다. 그리고 그 서늘함은 이창동 감독이 이 거대한 세계에 던지는 ‘질문’으로부터 기인한다. 인간은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로서 필연적인 실존적 불안, 태생적인 인식론적 한계를 갖고 있는 무력한 존재이므로 그가 ‘주체성’을 유일하게 발휘할 수 있는 건 ‘무력한 분노’밖에 없지 않냐고.

 

영화 <버닝>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인식론적 한계와 실존적 불안을 겪는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는다고. 그런 면에서 영화 <버닝>은 <곡성>의 이창동 버전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창동 감독은 이 거대한 질문을 청춘과 함께 어떻게 풀어나갈까.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하는 종수는 작가 지망생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에 대해 대답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늘 수수께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같이 미스터리 투성이다. 여러 번 걸려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전화는 무엇인가. 보일이라는 고양이는 무엇인가. 또 해미가 빠졌다는 우물은 진짜 있었던가 없었던가, 결정적으로 사라진 해미는 어떻게 된 걸까. 그리고 해미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벤이 맞는가.


영화 <버닝>



영화 <버닝>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속 시원하게 하지 않은 이유는, 결국 ‘삶’에서 중요한 것은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겪는 사람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종수는 해미에게 ‘무슨 문제인지 안 물어보네’라고 하자, 해미는 ‘문제야 늘 우리 곁에 있지’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종수라는 인물이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인물 설정과 맞닿아있다. 소설가는 허구를 통해, 세상을 축조하고 구성하며 지어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종수는 수수께끼로 둘러싸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까. 


사실 해미는 종수에게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성형 수술을 했다던 해미는 종수에게 "너 기억나? 나 못생겼다고 한 거"라고 묻는다. 종수는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지만, 해미는 이어 대답하기를 요청한다. "자,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 다소 우스꽝스러운 대화지만, 이 대화는 다분히 철학적이다. 해미의 얼굴이 원형(성형 전)과 원형에서 수정된 것(성형 후)이 함께 있다는 점에서 해미의 질문은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진실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해석에 대한 요청’인 셈이다. 그런 요청이 다름 아닌, 종수에게 주어진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니까, 종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상에 대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종수는 아직 대답을 쉽게 할 수 없다.

아마도 종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 대한 환멸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아버지와 집을 나간 엄마에게서 종수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왜 나는 이들에게서 태어난 걸까. 어쩌면 그에게 부모는, 자기 존재의 의문까지 던져주는 셈이다. 그 의문에 대해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 못하는 부모는 의문투성이며, 동시에 환멸적인 존재가 된다.


영화 <버닝>



종수는 벤에게 왜 적대감을 표출했던 걸까. 벤 역시 종수에게 거대한 수수께끼를 던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종수가 창고에서 아버지가 숨겨둔 칼을 발견하는 쇼트과 벤의 집에서 (종수의 생각으로) 의아하게 여겨지는 메이크업 박스, 여성들의 팔찌, 손목시계 등을 발견하는 쇼트를 비슷하게 구성함으로써 종수가 그들에 대한 감정이 비슷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해미는 어떻게 된 걸까. 종수의 핸드폰으로 전화하고는 아무 말없이 웅성거림만 남겨놓고 끊어진 전화는, 그녀에게 지금 심각한 일이 생겼다는 신호가 아닐까. 집을 정리하지 않던 그녀의 집은 왜 이리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걸까. 집 안에 살던 고양이 보일이는 어디로 간 걸까.

종수는 아무도 없는 해미의 집에서 햇빛이 비추는 햇살을 향해 앉아 노트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방 안에서 글쓰는 종수를 창문 밖에서 비추는 카메라는 서서히 뒤로 빠진다. 마치 이 세상 전체를 담는 듯, 타닥타닥 붙어사는 수많은 집을 보여준다. 자, 이제 종수는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인가.



영화 <버닝>



영화 상으로만 보자면, 벤이 해미를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종수가 판단하는 근거는 그의 아리송한 말뿐이다. 2개월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 취미라는 그의 말. 아리송한 그의 말로 해석해야만 하는 종수에게 진실은 마치 불투명한 비닐하우스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불확실하고 모호하며, 진실로 가는 길은 자동차 창문 너머로 간신히 벤을 보는 것처럼 제한적이고 협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수는 소설을 써 내려가야 한다. 왜냐하면 종수는 해석에 대한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하고 모호할지라도, 이야기는 이야기되어야 한다. 사실 구원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다. 해미는 이미 종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는 것.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귤의 존재를 애써 상상하는 것이라면, 귤이 없다는 것을 잊는 것은 귤의 존재를 아예 '전제'해 버리는 셈이다. 전자보다 후자의 경우가 '믿음'에 훨씬 가깝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존재나 사실이 아니라,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제, 고양이의 존재 여부와 아무 말하지 않는 전화, 해미가 빠졌다는 우물, 수수께끼같은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제 그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축조할 것인가. 즉, 종수는 어떤 이야기(소설)를 만들어낼 것인가.


영화 <버닝>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종수는 해미가 말한 우물이 진짜 있던 건지,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광적으로 노력한다. 종수는 왜 그렇게 우물의 존재 여부에 대해 집착했을까. 그건 어쩌면 종수는 해미가 빠졌다는 우물 이야기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했던 것이아닐까. '사방이 어둠에 쌓인 채로 오로지 동그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던 그녀에게서 종수는 현재 자신이 처한 무력한 상황을 발견했던 것이다. (종수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종수가 그렇게 햇살을 갈망하던 모습이 관련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야말로 구원이 필요하다고, 누군가 나를 이 깊은 어둠의 골짜기에서 꺼내달라고.


해미의 엄마는 해미를 가리켜 "걔는 원래 이야기를 잘 지어내"라고 한다. 이것은 해미의 말이 ‘소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종수는 해미라는 소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해미가 했던 말의 대부분이 ‘이야기’라는 사실은 -리틀/그레이트 헝거 이야기, 우물에 빠졌던 이야기, 종수가 자신을 못생겼다고 한 이야기- 예사롭지 않은 설정이다)


벤은 정말 해미를 죽였을까. 종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해석의 요청(‘진실을 말해봐’)에 결국 벤을 죽임으로써 이야기(소설)를 완성한다. 그런데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의 방법(칼)과 벤의 방법(석유를 붓고 불을 지름)으로 벤을 살인한, 그의 아이러니는 대체 무엇일까. 결국 수수께끼같은 세상을 애써 해석해 낼지라도, 이미 지은 같은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아득한 무력감을 표현하는 걸까. 그래서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고,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일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가 떠나던 날, 어머니의 옷을 태움으로써 그 존재까지 부정했던 종수는 벤과 차를 불태울 그곳에 자신의 옷을 집어넣는다. 그것은 철저히 무력한 자신의 존재까지 부정한다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보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없는 이 현실에서 결국 같은 방법으로 파국에 이르게 되는 나약하고 환멸스러운 존재. 빠져나갈 수 없는 폐곡선에 갇힌 아득한 무력감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영화 <버닝>



어쩌면 영화 <버닝>은 거대한 삶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 그 자체가 아닐까.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불친절한 세상, 나를 향해 시시각각 닥쳐오는 고통의 원인과 인과관계 조차 알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세상. (아득히 펼쳐진 거대한 세상에 맞서는 해미의 춤은 벌거벗었음에도 야하지 않고, 처연하고 처절하기까지 하다) "메타포가 뭐야?"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 말 없던 종수는 자신의 소설의 결론으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해미는 춤으로 그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수수께끼같은 삶으로부터 소설은 쓰여지고, 예술은 완성된다.


종수는 자신의 소설을 마치고, 벌거벗은 채로 트럭을 운전해 길을 나선다. 그의 뒤로 벤의 차가 불타고 있다. 카메라는 그 장면을 꽤 오랫동안 비춘다. 이제 종수에게 주어졌던 질문은 고스란히 관객에게로 돌아온다.


자, 이제 당신이 써 내려가야 할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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