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식 May 09. 2018

공간을 선물하는 사람과 시간을 선물하는 사람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의 리뷰입니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 입에 넣는 순간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함은 씹을수록 그만 씁쓸해져 버린다. 분명 행복하기만 했는데, 어쩌다 우린 이렇게 된 걸까. 무심한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다.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이 만든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는 둘의 사랑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보다, 옅어져 가는 사랑의 밀도를 보여준다.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지친 두 인물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데, 세밀한 감정표현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안톤 옐친과 펠리시티 존스의 연기는 박수받을 만하다.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제이콥(안톤 옐친)과 애나(펠리시티 존스)는 미국 대학에서 서로를 만났다. 이후 졸업한 애나는 학생비자가 만료되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미국에 남겨진 제이콥과 영국으로 가버린 애나, 둘은 의도치 않게 장거리 연애를 한다. 떨어져있는 둘은 연락이 점점 뜸해지면서, 이윽고 새로운 사람이 서로의 눈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에게로 흔들리지만, 진정한 사랑은 역시 제이콥과 애나 서로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 둘은 결혼을 한다. 이제 고단한 날을 뒤로하고, 부부가 된 둘은 그토록 앙망하던 서로와 함께 낭만을 누리며 살아갈까.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의 오프닝에서 애나는 발제 중에 이런 말을 한다. “인터넷 시대로 오면서, 가상공간이 생기며 그곳은 은밀한 개인 공간(My Space)이 되어버린다." 현대시대가 아무리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개인주의라 할지라도,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함께 하는 사랑을 할 때다. 사랑하는 순간, ‘나의 공간’은 ‘너의 공간’이 된다.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그러니까,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상대방과 공유하는 것이다. 나의 시간과 공간을 나누지 않는 감정은 아무리 차올라도, 사랑이란 명예를 획득할 수 없다.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에서는 제이콥(안톤 옐친)과 애나(펠리시티 존스)의 각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서로에게 공유하게 되는지를 드러낸다. 둘이 처음 데이트를 한 날, 애나가 자신의 집으로 제이콥을 초대한 것은 실은 자신의 공간에 제이콥을 들인 것이다. 집 앞, 투명한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없이 서로를 눈빛과 손짓으로 애타게 갈망하던 장면은 구분되어있던 상대의 시간과 공간이 서로에게 틈입하려는 욕망을 표출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결정적으로, 제이콥이 애나에게 의자를 선물해주는 것은 공간을 선물해주는 것이다. 한편, 애나는 제이콥에게 다른 것을 선물한다. 바로 둘만의 추억을 기록한 ‘우리의 1년을 책으로 남길 수 있다면’이라는 책. 이것은 다름 아닌 시간을 선물로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이콥은 공간을 선물해주는 사람이고, 애나는 시간을 선물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제이콥은 미국에서 영국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간다. (공간) 한편 애나는 영국의 풍경을 시간의 책에 빠짐없이 기록해둔다. (시간) 사랑은 그렇게, 자신의 공간에 상대방을 초대하고, 나의 시간 속에 상대방이 머물기를 앙망하는 신비롭고 은밀한 감정이다.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영국으로 건너간 제이콥은 애나의 가족과 함께 식사한다. 그런데 이유모를 불편함이 식사 자리에 감돌고, 애나의 아버지는 갑자기 이렇게 말한다. “둘이 결혼하면 되겠네”. 이때 쇼트는 곧바로 ‘헛소리 게임’이라는 보드게임의 타이틀을 비춘다. 이것은 그 둘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는 암시가 아닐까. 처음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미소가, 무슨 말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오던 농밀한 사랑은 어떻게 옅어지게 된 걸까. “졸업하면, LA를 떠날 거야?”라는 제이콥의 질문에 “난 안떠날거야. 약속해”라고 대답하던 애나의 자신만만한 사랑의 다짐은 어디로 간 걸까. 이처럼 사랑은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월 앞에, 무모한 약속과 다짐을 하고서야 만족한다. 


제이콥은 식사 자리에서 애나 덕분에 위스키를 많이 배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위스키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사실 제이콥은 처음부터 애나의 영역으로 전부 들어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것은 애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카탈리나로 둘이 여름휴가를 떠난 날, 배에 앉을 때 부터 둘은 사이에 공간을 두고 떨어짐으로써 서로의 영역을 구분한다. 카탈리나에 도착해, 애나는 난간에 걸터앉아 책을 읽을 때, 제이콥은 가벼운 농담을 건넨다. 그러나 애나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책 읽는 중이잖아”. 그 순간 제이콥은 “사랑해”라는 말로 서늘한 상황을 아늑하게 감싸 안는다. 애나는 “미안해”라고 대답한다.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엇갈린 사랑의 근원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사랑해”라는 고백에는 ‘미안해’가 아니라, “나도 사랑해"가 나와야 한다. 엇갈린 둘의 대답은 처음부터 각자의 영역으로 온전히 들어가지 않았던 둘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끊임없이 엇갈리던 둘은, 결국 사랑의 대상마저 엇갈리게 된다. 제이콥은 사만다(제니퍼 로렌스)에게, 애나는 사이먼(찰리 뷰리)에게로. 애나가 새로 사귄 사이먼은 그녀의 눈을 가리고 준비한 선물로 데려간다. 애나는 눈이 감긴 채 “어디가?"라고 묻자, 사이먼은 “우주로!"라고 대답한다.(여기서 ‘우주’는 공간으로도 변역할 수 있는 “Space”다.) 그리고 준비한 의자를 애나에게 선물한다. 사이먼 역시 애나에게 공간을 선물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애나의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 애나가 즐겨하던 위스키를 아예 먹지 못하게 한다) 


사랑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무모한 세월을 견디다, 결국 자신의 몸을 뉘일 수 있는 안식처로 다시 돌아간다. 비자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애나는 드디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위스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던 제이콥은 위스키의 이름을 기억한다. 이제, 애나는 제이콥의 공간으로, 제이콥은 애나의 영역으로 완전히 들어간 걸까.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맞으며, 내 앞에 마주 서있는 그와 그녀의 품은 내가 영원토록 편히 머물 수 있는 안식처가 될까. 


아마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미 그 둘은 흘러내리는 물줄기로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서로에게 주었고, 특히나 애나는 시간을 기록해두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배신했던 시간) 하지만, 그 순간 애나와 제이콥이 떠올린 것은 서로가 서로를 갈망하던 시간과 공간, 그 속에 있는 나와 너였다. 그러니까, 연인은 식어버린 사랑을 서늘해하면서, 추억의 내용까지 바꾸면서까지 기어코 감정을 되살려낸다. 공간을 선물하는 사람과 시간을 선물하는 사람의 미친듯한(Like Crazy) 사랑은 결국 서로가 함께 공유했던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되어 간다.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증오의 끝맺음은 '살인'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