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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Apr 12. 2018

증오의 끝맺음은 '살인'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다.

영화 <몬태나>

❁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의 리뷰입니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광활한 들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리고 집 한 채. 고즈넉한 그곳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엄마는 딸 둘에게 부사의 용법(부사는 동사를 수식한다)을 설명한다. 잘 이해한지 보기 위해, 문장을 말해보라는 엄마의 요청에 두 딸은 예문을 든다. '음악이 조용히 흘렀다'의 ‘조용히’와 ‘말에서 빨리 내렸다’의 ‘빨리’. 두 딸의 입에서 나온 ‘조용히’와 ‘빨리’는 불과 오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인디언의 참혹한 공격 앞에 엄마의 생존을 기원하는 주문(呪文)이 되고 말았다. ‘빨리, 그리고 조용히 숨으세요'


영화 <몬태나>의 시간은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미국은 서부 쪽으로 지배권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인디언 원주민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미국 내부에서 인디언의 생존권을 빼앗는 전투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고, 점차 원주민과의 공존을 고민하던 정부는 1892년, 옐로우 호크 추장을 (그들의 성지이기도 한) 고향 몬태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문제는 이들을 호송할 책임자인 조셉 블로커 대위(크리스천 베일)가 인디언을 치가 떨릴 정도로 증오한다는 데 있다.



영화 <몬태나>


‘미국 영혼의 본질은 억세고 고독하며 초연하고 살의에 찼다. 그건 지금까지 그대로 뭉쳐있다’. 영국 소설가 D.H. 로렌스의 구절로 시작하는 영화 <몬태나>는 인디언에 맞선 블로커의 증오는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 당시 공통된 시대정신임을 보여준다. 백인은 인디언에게, 반대로 인디언은 백인에게 살의를 충만하게 표출하던 때다. (영화의 원제인 ‘Hostile’은 이러한 양상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인디언을 증오하는 블로커가 (역시 백인을 증오할) 옐로우 호크 추장을 몬태나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는 임무를 맡은 영화 <몬태나>는 상반되는 그 둘을 묶어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려는 걸까.


영화 <몬태나>의 이야기의 겉은 성경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 같다. 먼저 멕시코시티 요새에서 인디언의 성지인 몬태나를 향해 간다는 설정은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간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숨을 거둔 것처럼, 옐로 호크 추장 역시 몬태나 땅을 목전에 두고 숨을 거둔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했지만 그곳에서 이미 거주하던 원주민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야 했던 것처럼(여리고성, 아이성 전투), 인디언 역시 몬태나에 이미 정착해있던 백인들에게서 공격을 받게 된다.



영화 <몬태나>



한편, 영화 <몬태나>는 형식미가 빛을 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속 대칭되는 여러 요소들이 명징한데, 먼저 영화의 초반과 후반이 쌍을 이룬다. 영화의 초반은 인디언(코만치족)이 퀘이드 부인(로자먼드 파이크)의 집을 공격해 남편과 자녀를 몰살하는 쇼트다. 한편, 영화의 후반에선 반대로 몬태나의 백인이 그곳으로 온 옐로우 호크족 인디언을 공격하는 쇼트다.


상반되는 대칭은 그들이 몬태나로 가는 길에서도 나온다. 이들은 가는 길에서 외부로부터 총 두차례에 공격을 받는데, 처음 이들을 공격해온 무리는 인디언 코만치 족이었다. 두 번째 이들을 공격해온 쪽은 백인이었다. 첫 번째 인디언의 공격에서는 블로커 부대의 이등병 드잘딘(티모시 샬라메)이 죽었고, 흑인 병사가 치명상을 입었다. 두 번째 백인의 공격에선 퀘이드 부인과 인디언 부인이 겁탈당했다. 서로를 향한 증오와 폭력, 그리고 무자비한 살육은 빠져나갈 곳 없는 폐곡선처럼 영원히 되풀이되는 걸까. 서로를 향한 끝없는 폭력과 살육의 마침표는 죽음이라는 방점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끝이 나는 걸까.


상대를 향한 증오의 끝은 살인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다. 이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 블로커와 퀘이드 부인, 그리고 옐로우 호크족 추장의 손자가 한 가족이 될 것이라고 암시하며 끝나는 쇼트는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왜 가족을 이루는 사람은 이 셋일까. 이들은 각각 상대편의 공격때문에 생긴 ‘가족의 부재’를 겪었다. 아내가 될 퀘이드 부인은 인디언의 공격으로 남편과 자식을 잃었다. 자녀가 될 옐로우 호크족 추장의 손자는 반대로, 백인의 공격으로 부모님을 잃었다. 아버지가 될 블로커 대위 역시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인디언의 공격에 의해 아내와 자녀를 잃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옐로우 호크족 추장에게, 인디언의 공격에 희생당한 친구의 이름을 나열하다가-빌리 딕슨, 털 리 맥클레인. 에드윈 테이트- 마지막에는 이름을 말하지 않고 끝내 삼킨다) 그러니까 상처받은 그들이 상처를 준 사람을 대신하여 가족의 부재를 메워야 한다. 



영화 <몬태나>



이러한 새로운 가족의 형태는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새로운 관계의 상징처럼 보인다. 상대의 공격으로 잃은 가족은 결국 그들 자신이 각각의 대표자가 되어 부재를 메워야 한다. 그러니까, 백인과 인디언 모두가 ‘주체자’여야 한다. 사죄의 주체자는 용서의 주체자여야 하고, 속죄의 주체자는 자비의 주체자여야 한다. 다시 말해, (피해자에게) 사죄를 말하는 사람이 (가해자를) 용서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피해자로부터) 속죄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가해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야만 사죄와 속죄, 그리고 용서와 자비의 주어인 그들이 ‘동사’로서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퀘이드 부인은 ‘부사’의 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부사는 동사를 수식하며 동사의 기능을 더욱 강화한다'. 이런 설명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러니까, 그녀 자신이 ‘부사’가 되어서 백인(블로커 대위)과 인디언(옐로우 호크족 추장)이 서로에게 해야하는 '동사'인 사죄와 용서, 그리고 자비를 강화한다. 한편, 퀘이드 부인과 비슷한 사람은 옐로우 호크족 추장의 손자다. 처음 블로커 대위가 퀘이드 부인을 구해냈을 때, 인디언은 그녀를 향해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한편, 손자는 산속에서 작은 버섯을 가져와 할아버지(옐로우 호크족 추장)에게 주면서 "할아버지께 선물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때, 손자가 건넨 선물은 그의 마음이라는 면에서 그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각각 상대방의 편에게 ‘선물’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선물'은 각각의 위치(백인-인디언)에서 동사를 강화하는 '부사'같은 기능을 한다.



영화 <몬태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상대를 향한 증오는 그 자체로 무한히 반복되는 영겁회귀적인 특성이 있다. 빠져나갈 곳 없어 아득한, 증오의 폐곡선을 탈출하려면 ‘죽어야만’ 가능한 걸까. 영화 <몬태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빨리’ 사죄하세요, 그리고 ‘조용히’ 용서하세요.


그러니까, 증오의 끝맺음은 사죄, 용서, 그리고 자비를 베푸는 데 있다. 상반되는 대칭(백인-인디언)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았던 영화는 엔딩 장면에서 두 대립을 지워버린다. 이제, 블로커와 퀘이드 부인, 그리고 인디언 손자는 ‘한 가족’으로 봉합되었다.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그들 가족 앞에, 증오는 더 이상 갈 길 찾지 못해 허공 속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영화 <몬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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