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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Oct 18. 2018

'물이 되는 꿈', 삶이라는 순환

영화 <펭귄 하이웨이>

그 일은 스파르타인 ‘불멸’이 마당에 초를 켜면서 와인을 한 잔 더 따라주고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한 뒤에 시작되었어요. 불멸은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피곤함이 휴식을 가져다줘요, 쉬세요.” 
헤라클레이토스식 저녁 인사였어요 … 행복할 때 불행이 올 것을 모르고 기쁠 때 슬픔이 올 것을 모르고 건강할 때 아픔을 모르고 젊을 때 나이 듦을 모르고 배부를 때 배고픔을 모르지만 시간은 우리를 그 반대편으로 데리고 가지요. 

불멸이 말했듯이, 그곳에서 피곤은 휴식으로 이어지고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을 따라가 본다면 가장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꿀 수 있어요.

그렇게 되도록 애써볼 수 있어요. 저는 이제 수묵화처럼 변해버린 검은 바다를 응시했어요. 

- 정혜윤, “인생의 일요일들”, 179-180.





11살인 아오야마는 호기심이 왕성하다. 무엇인가 알려고 하는 의욕이 강해, 이것저것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어른이 되기까지 3888일이 남은 이 소년은 치과에서 일하는 간호사 누나를 좋아한다. 어느 날, 수 십 마리의 펭귄이 공터에 있는 것을 아오야마는 발견한다. 그리고 곧바로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이른 바, "펭귄 프로젝트". 조사 중, 그는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펭귄이 좋아하는 간호사 누나과 어떤 연관이 있음을 발견하고, 거기다 같은 반 친구인 하마모토에게서 숲 속에 둥근 '바다'(구 형태로 된)라는 존재를 듣는다. 이제, 아오야마는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선다. 아오야마는 이 사건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을까.


<펭귄 하이웨이>는 사실 젠더 감수성이 풍부한 편은 아닌 영화다. (아무리 영화적 장치 혹은 설정이 있다고 해도)  몇몇 장면에서 언급된 여성의 신체 특정 부위는 약간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 역시 선연하다. 그건 아마도 튼튼하고도 자유로운 상상력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통해 분출되는 힘에 있지 않을까. (몇 개월 전 모리미 도리히코의 소설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영화 편도 내내 유쾌하면서도 자유분방한 판타지 소설이 영화로 되었을 때 얼마나 매력 있는지를 보여준 적 있다) 



영화 <펭귄 하이웨이>


펭귄의 귀여움과 아이의 성장 스토리를 외피로 뒤집어쓴 줄로 알았던 이 영화는, 사실 벗겨보면 좀 더 근원적인 지점까지 가닿는다. 영화에서는 여러 차례 ‘원’(O)의 이미지를 이용한다. (실제 겉모양이 원처럼 생긴 것이 있고, 속성이 원형인 것도 있다) 아오야마가 말하는 여성의 가슴이 원형이고, 아오야마와 친구가 찾는 냇가의 전경 역시 ‘원’이다. (아오야마와 친구는 처음 냇가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를 찾았지만, 나중에 그 냇가는 시작과 끝이 없는 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처음과 끝이 계속 이어져있는 ‘순환’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반대로 직선(ㅡ)은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 콜라캔이 변하여 펭귄이 되고, 다시 펭귄이 콜라캔으로 변한다는 설정은 바로, 이 같은 순환의 속성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인식체계와도 연관이 있다. 인간은 한계가 있으므로, 어떤 대상이나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체계화, 구조화하는 방법을 즐겨 택한다. (그중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건 ‘이분법’이다. “A는 C고, B는 D다.”) 이렇게 하면, 각각의 특성이 명료하게 구분되어 분명히 이해하기엔 쉽다. 그러나 A와 B, 각각의 속성 중에서 서로 겹쳐지는 지점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선형적인 세계관은 이처럼 각각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갖고있는 본질적인 부분을 놓칠 때가 있다. 그러나, 원형적인 세계관은 그것을 포괄한다. 



영화 <펭귄 하이웨이>



이 같은 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의 ‘형상’(본질, 이데아)은 저 멀리 외부에 있는 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사물 안에 있다(본질은 함께 있다)고 한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진리(알레테이아)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우리 밖(외부)이 아니라, 우리 안(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깊은 밤, 갑자기 동생이 방으로 찾아오더니 ‘엄마 죽으면 어떡해’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아오야마는 엄마에게 갑자기 큰일이 생겼나 놀랐지만,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되자 안심하며 동생을 위로한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언젠가는 죽어.” 죽음보다 삶에 더 가까운 고작 11살인 아오야마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생명과 죽음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생명은 죽음을 안고 있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아오야마가 11살이라는 설정도 생각해볼 만한 부분이다.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인 이 아이는 생각과 행동이 어른처럼 조숙하다. (물론 좋아하는 누나 앞에서는 영락없이 부끄러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왜 주인공은 11살일까. 그건 어린이에게도 아이같은 모습과 어른같은 모습이 공존해있다는 점을 말하는 게 아닐까. (이건 어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콜라가 펭귄이 되고, 펭귄이 콜라가 되는 것. 어른이 되더라도, 여전히 아이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것. 반대로 아이일 때도, 어른 같은 모습이 있다는 것. 직선이 아니라, 순환.



영화 <펭귄 하이웨이>


영화 <펭귄 하이웨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펭귄과 누나는 사실 여러면에서 관련이 있다. 첫째, 펭귄은 누나에게서 나온다는 점. 둘째, '바다'에게서 멀어지면 사라진다는 점. 영화 초반, 공터에서 발견된 펭귄은 잡으러온 관계자들에게 잡힌다. 그 중, 한 마리 펭귄은 탈출에 성공해 마을을 떠돈다. 그 장면 이후, 펭귄은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아오야마의 같은 반 친구의 집에서 발견된다. 누나 역시, 비오는 날 아오야마와 함께했던 날 이후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다시 마을 축제날 누나는 나타난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뭘까'라는 누나의 말처럼, 그녀는 어떤 존재일까. 펭귄과 함께 사라졌다가 펭귄과 같이 나타난 그 누나는 대체 누굴까. 극 중에서 아오야마는 누나에게서만 이름이 아닌, '소년'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소년'은 익명이자, '이름없음'이라고 할 수 있다. 누나 역시, 영화 안에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설정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그러니까, 아오야마가 그 시절 좋아했던 그 익명의 존재는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이 점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한다. 영화 초반, 아오야마와 펭귄은 마치 거울을 보듯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데, 아오야마의 두 눈엔 펭귄 한 마리가 담겼지만 펭귄의 한 쪽 눈엔 아오야마가, 다른 눈엔 누나가 담겨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있고, 순환된다는 사실.



영화 <펭귄 하이웨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오야마는 단순히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판단하려는 노력은 사실 '인간' 전반의 특성이다. '바다' 역시 단순히 신비한 구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구는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물방울이지만, 그 속으로 아득히 빠짐으로써 '바다'이기도 하고, 또 하늘처럼 보이기도 하고, 땅이기도 하고, 심지어 '지구'처럼 보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면, 지구처럼 그 안의 세상이 존재한다.) '세상의 찢어진 부분'이라는 바다가 무엇보다 지구(세상)를 닮아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국, 순환은 이처럼 모순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이 세상이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이 모순을 이해하려는 아오야마의 모습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순된 작동방식과 존재 양식을 이성적으로 알아내려고 발버둥치는 인간 일반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빠는 아오야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계의 끝은 멀어서, 접혀있어서 안쪽으로 말려들어가 있을 수도 있어. 주머니 속에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만약 이 주머니를 뒤집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세계 안에 주머니가 있지.” 주머니 안에 세계가 있고, 반대로 세계 안에 주머니가 있는 것. 이 모순적인 대화는 아오야마에게 숲 안에 있던 ‘바다’의 정체가 ‘세상의 끝’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모순은 또 있다. 누나는 펭귄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재버워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펭귄은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바다’를 터뜨리며 세상의 ‘빈틈’, ‘찢긴 지점’을 수리하며 메우는데, 재버워크는 그런 펭귄을 잡아먹는다.) 그러니까, 누나는 세상의 빈틈을 빠짐없이 메우면서 동시에, 세상의 빈틈을 벌리는 모순. 


세상의 순환과 모순을 주된 테마로 삼고 달려나가다, 영화는 기어이 그 화살을 아오야마 자신에게로 돌린다.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뭘까. 나는 왜 태어나게 됐을까.” <펭귄 하이웨이>의 작화와 색채는 참 따스하지만, 영화가 담고있는 말은 결코 아늑하지 않다. 결국, 나라는 모순. 삶이라는 역설. 




영화 <펭귄 하이웨이>



혼란스러워하는 아오야마에게 누나는 말한다. “가엾어라. 힘든가 보구나. 울지 마 소년.”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뭐든 만들어내.” (나 때문에 누나가 재버워크를 만들게 됐다고 자책하는 소년에게)


영화를 본 후, 떠오른 노래가 있다. 그건, [루시드 폴 - “물이 되는 꿈”]이다.  


물, 물이 되는 꿈
물이 되는 꿈, 물이 되는 꿈. 
꽃, 꽃이 되는 꿈 
씨가 되는 꿈, 풀이 되는 꿈. 
강, 강이 되는 꿈 
빛이 되는 꿈, 소금이 되는 꿈 
바다, 바다가 되는 꿈 
파도가 되는 꿈, 물이 되는 꿈


"여름방학이 다 끝나가네." 아오야마는 대답한다. "아무리 즐거워도 뭐든 다 끝나는 법이죠." 누나는 다시 말한다. "그게 바로 진리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이 세상은 끊김 없이 이어진다고 말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혹시라도 삶이라는 순환과 역설이 혼란스러워 삶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다시, 정혜윤 작가의 글을 통해 약간이라도 위로를 받기를.





“피곤함이 휴식을 가져다줘요, 쉬세요.”

… 그곳에서 피곤은 휴식으로 이어지고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을 따라가 본다면 가장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꿀 수 있어요.

그렇게 되도록 애써볼 수 있어요. 저는 이제 수묵화처럼 변해버린 검은 바다를 응시했어요.


정혜윤, "인생의 일요일들", 179-180.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의 리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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