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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Oct 25. 2018

신비로운 마음이 흘러나오는 곳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숲은 슬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70여 년이 훨씬 지나 옛 철도길만이 남아있는 그 자리에서, 송이의 춤은 그곳에 머무른 저마다의 슬픔들을 위무하는 몸짓이었다. 비록 마주하지는 못해도, 그 흔적들을 더듬어가며. 간절히, 그리고 간곡히.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생겨났던 전쟁고아들의 아픔을 차분한 호흡으로 추적해 나간다.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서로 형제다’라는 기치 아래, 김일성은 북한의 어린이들을 세계 각지의 사회주의 동맹국가로 보냈다. 그중, 폴란드로는 1,500여 명의 아이들이 건너갔다. 거기에서도 건강이 악화된 몇 백명의 아이들이 다시 프와코비치 양육원이라는 곳으로 보내져 생활하게 됐다.


우연히, 그곳에 모인 아이들은 북한 아이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교사들이 발견하게 됐다. 그곳 아이들은 북한, 남한 한반도 전역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전쟁 초반, 전선이 부산까지 내려옴으로써 자연스럽게 북한군 점령지에 속한 아이들은 그 기준으로는 북한 어린이가 된 셈이다.) 그러니까,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자녀들이었다. 우리 자녀들이 그 낯선 땅에서 생활했던 것을 70여 년이 지난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이유 모를 미안함이 맴돌았다. 낯선 곳에서, 자신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이방인들 속에서 그 아이들의 얼굴은 천진난만함과 짓궂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연약한 미소가 반짝거렸다.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닐 그분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으로 힘겨운 시절을 보낸 감독은 우연히 한 영상을 봤다. 그 영상에는 북한 꽃제비가 먹을 음식을 찾으러 산을 헤매고 있었다. 추상미 감독은 그 영상을 보며, ‘저 아이의 부모는 어디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아마, 그때 그녀가 느낀 감정은 동정이라기보다, 또 다른 자녀를 둔 부모로서의 죄책감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그곳에, 그런 환경에서 삶을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리고, 앓는 아이들을 보며, 생명을 시작하게 만들어준 부모로서의 미안함, 죄책감.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어딘가 툭 건드렸고,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든 게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건, 인간은 누구나 고결하고 깨끗한 내면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당시 아이들을 돌봐주었던 양육원의 교사들 역시 고아였거나, 편부모 가정이었거나, 굶주린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상처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들 역시 한국 아이들을 우리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추상미 감독이 영상 속 북한 꽃제비를 보며 그 마음을 가졌던 것처럼. ‘저 사람도 나처럼 아팠겠구나. 힘들겠구나.’ 부정감과 우울감으로 시작된 상처는 시선을 타인에게 돌리게 되는 순간, 그건 고결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폴란드로 건너간 추상미 감독과 이송은 이제 거대한 슬픔이 머물러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통역해주던 분은 이런 말을 했다. 바르샤바 봉기 후, 잡혀온 수많은 폴란드 어린이들에게(부모와 헤어져야만 했던) 유대인 중년 여성은 이렇게 말을 했다고. ‘네 엄마는 무사할 거야. 괜찮을 거야. 내가 장담한다.’ 유대인인 그녀 역시, 폴란드 어린이가 도저히 남 같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곡진하게 묻는다. 유대인 엄마가 폴란드 어린이를 그렇게 하듯, 폴란드 교사가 한국 어린이를 그렇게 하듯, 이걸 보는 우리는, 당신은, 나는 어떤 마음이냐고. 이 영화를 본 뒤, 한강 작가가 2013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물며 썼던 글이 떠올랐다.



흰 도시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을 보았다. 도시 동쪽에 지어진 기념관 이층의 영사실에서였다.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 이 도시의 95퍼센트가 파괴되었다고 그 필름의 자막은 말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이 도시를, 1944년 9월 한 달 동안 극적으로 독일군을 몰아냈고 시민 자치가 이뤄졌던 이 도시를, 히틀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깨끗이, 본보기로서 쓸어버리라고 명령했다. 


(중략)


그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래전 성이 있었다는 공원에서 내렸다. 제법 넓은 공원 숲을 가로질러 한참 걸으니 옛 병원 건물이 나왔다.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병원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뒤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종달새와 흡사한 높은 음조로 새들이 우는, 울창한 나무들이 무수히 팔과 팔을 맞댄 소로를 따라 걸어 나오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번 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길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이 모두.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호숫가 여름 별장은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간혹 어떤 기둥이나 벽들의 아랫부분이 살나암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 벽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 한강, <흰>, "흰 도시" 


영화의 마지막, 추상미 감독은 양육원의 교사에게 차마 눈물을 삼키지 못하고 말한다. ‘부모들이 감당하지 못한 사랑을 대신 고아들에게 쏟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 또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겐 한강 작가가 썼던 표현처럼 저마다의 ‘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서 남 같지 않은 감정을 느꼈다면, 그래서 이유모를 죄책감과 연민으로 마음 어딘가가 일렁였다면, 당신 역시 고결하고 깨끗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신비로운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일까. 조용히, 그리고 고요히.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의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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