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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Oct 26. 2018

고요의 바다로

영화 <퍼스트맨>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서 선연한 것이 음악이었다면, <퍼스트맨>에서 명료한 것은 정적이었다. 그 세계를 비추는 건 황홀한 조명 대신, 아득한 어둠으로 조심스레 스며드는 달빛이었다. 누구나 탄성을 내지를 만큼 위대한 인류의 성취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는 한 인간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하늘 높이 떠있는 달을 향해 솟아오르면서도, 자기 자신의 내면 아래로 깊숙히 침잠한다. 그래서, 영화 <퍼스트맨>은 처연하고도 쓸쓸하다. 


영화 <퍼스트맨>


NASA에서 제미니 프로젝트(Gemini Project, 달 착륙을 위한 유인 우주비행계획)를 위해 우주인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은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하고 우주인이 되기 위한 본격적인 훈련을 받는다. 훈련은 고되지만, 동료들과 함께 그 시간을 견딘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동료들이 하나둘씩 목숨을 잃을 때 마다 닐은 불안해한다. ‘그럼에도 닐은 극심한 불안과 시련을 의연하게 견뎌내 결국 인류 최초로 달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닐의 생애를 이렇게 이해했다면, 이 영화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닐 암스트롱이 성취해낸 화려한 업적이 아니라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내면 깊은 곳을 조명하는 영화다.


이번에도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이 상당 부분 기여를 했다. <위플래쉬>를 통해 채찍질을 휘두르는 듯한 음악으로 관객의 혼을 쏙 빼놓았다면, <라라랜드>를 통해 흡사 마법처럼 감미로운 음악으로 시공간을 시종 황홀하게 했다. 이번 <퍼스트맨>에서 그의 진가는 앞서 두 작과는 조금 다른 부분에서 보인다. 그건, 소리가 아니라 적막이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한 뒤, 처음으로 달과 마주하는 장면에서 모든 소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정적만이 명료했다. 긴장감을 높일 때는 우주선의 경고음으로, 우주를 바라볼 때는 감미로운 왈츠로, (<라라랜드>에서 세바스찬과 미아가 하늘을 날아 우주에서 왈츠를 출 때의 음악과 비슷하다) 달에 도착할 때는 정적으로 가득 채운 그의 음악은 확실히 더없이 훌륭했다. 



영화 <퍼스트맨>


데미안 셔젤 감독은 전작을 활용한 유머코드도 사용하는 것 같다. <위플래쉬>에서 악독하기 짝이 없는 재즈 전공 플래쳐 교수를 연기한 J.K. 시몬스는 <라라랜드>에서 레스토랑의 매니저로 등장해, 전속 피아니스트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에게 “우리 가게에서 재즈는 절대 안 돼”라고 한다. 이번 영화 <퍼스트맨> 역시, 영화 <라라랜드>와 관련된 유머코드가 있다. 영화 초반, 닐의 가족과 동료 훈련생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의 부인은 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희 남편은 대학시절 뮤지컬을 하기도 했어요. 피아노를 굉장히 잘쳤어요.”(<라라랜드>는 뮤지컬 영화이자, 라이언 고슬링은 재즈 피아니스트로 나온다.) 결정적으로 아내에 의하면, 남편이 쓴 뮤지컬 대본의 이름은 “에젤록의 땅”(Egelloc Land)이었다고. (‘에젤록’은 대학College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실제로 닐 암스트롱이 대학시절에 쓴 뮤지컬 대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라라랜드>의 패러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내는 ‘Egelloc Land’라고 말한다)  


데미안 셔젤은 <위플래쉬>에서 ‘꿈’에 미친 한 인간의 독선과 광기를 (<위플래쉬>는 꿈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꿈에 미친 한 인간이 스스로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로 보인다), <라라랜드>에서 ‘꿈’과 사랑은 함께 양립할 수 없다는 처연한 관계를 보여줬다면, 이번 <퍼스트맨>에서는 꿈을 성취한 사람이 상처를 마주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인간이 달에 간다는 것은 닐 암스트롱 개인의 꿈이자, 인류의 원대한 꿈이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그 꿈을 성취했다. 그러나, 그 꿈을 성취한 인간은 영광으로만 가득 차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박수와 갈채를 쏟아내지만, 그는 누구보다 상처로 아파하고 있는 사람이다. <퍼스트맨>은 이러한 인물의 특징을 음영 효과로 보여준다. NASA의 제미니 프로젝트에 선발돼 처음 출근한 그는, 하루 일과를 마친 뒤 집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가벼운 춤을 춘다. 이때, 이 둘의 모습은 실내 스탠드에 비추는 부분은 빛에 드러나고, 나머지 부분은 어둠에 잠겨있는데, 이것은 닐의 내면을 은유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실내조명 외에 달빛으로도 이런 효과를 자주 사용한다.) 


영화 <퍼스트맨>


꿈을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소중하다면, 머뭇거릴지언정 내면의 아픔을 마주하는 것 역시 귀중하다. 닐은 늘 남몰래 앓았다. 딸의 장례식 때도 그는 슬픔을 내색하지 않다가, 방으로 들어가 빛을 모두 막은 뒤 어둠 속에서 홀로 눈물 흘렸다. 어떤 슬픔은 입 밖으로 꺼내놓는 것조차 버거운 걸까. 동료 훈련생에게도, 심지어 아내에게도 결코 딸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그는, 달빛 아래에서 비로소 딸의 이름을 처음 꺼낸다. “날 사랑하던 달빛이 네게도 비추기를”. 어둠 속에서 유난히 명징한 달을 보고 있던 닐은, 거기에서 딸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퍼스트맨>



고요의 바다, 달에 이르러 닐은 몇 발자국 걷다가 어둠에 잠긴 달의 구덩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딸의 유품을 꺼낸다. 닐은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유품을 미련 없이 던진다. 천천히, 허공에 멈추려는 것처럼 팔찌는 느릿느릿 회전하며 떨어진다. 이때, 닐이 겉 헬멧을 벗고 속 헬멧인 투명마스크만 쓰고 있다는 장면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우주복의 겉 헬멧은 태양광으로부터 시력을 보호해주기 위한 마스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닐은 자신의 아픔을 온전히 마주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빛을 전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암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도킹’ 같은 것이라고 하면 될까. 서로 다른 운동에너지로 교차하며 진행하던 물체가 서로 가깝게 접근한 뒤, 서로의 상대속도가 0이 되는 순간 도킹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꿈과 상처는 한 개인의 내면과 외피를 서로 멀어지게 만들며 상처를 벌어지게 하지만, 그 두 가지가 끝내 상대속도 0이 되어 만나게 될 때, 그 내면 속에서 빛은 비로소 어둠을 몰아낼 것이다. 



영화 <퍼스트맨>



영화는 의미심장하게 마무리된다. 닐이 달에서 지구로 무사히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 자넷은 당장 NASA로 달려와 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닐은 그녀의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 자넷을 바라본다. 둘의 눈길이 허공에서 만난다. 자넷과 닐은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만, 그 사이에는 투명한 유리창으로 막혀있다. (우주에 다녀온 닐은 검역을 위해 격리되어야 하므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둘은 아무 말 없다. 그저, 많은 말이 담긴 눈길을 주고받을 뿐. 꿈을 좇아가는 닐 암스트롱의 강력한 자장으로, 가족은 그를 중심으로 자전, 공전할 수 밖에 없다. (자넷은 평범하게 사는게 꿈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넷의 모든 삶은 닐의 꿈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꿈(이상)과 일상(현실)은 영원히 유리될 수 밖에 없는걸까. 꿈을 성취한 닐은, 그리고 꿈을 성취한 남편을 둔 아내는 이제 서로 도킹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여전히, 유리창이 가로막아, 소통은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는데. 


다시 고요의 바다로.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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