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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Oct 30. 2018

에릭 로메르가 그려낸 겨울의 풍경화

영화 <겨울 이야기>

"나는 날씨 변화에 맞추면서 촬영해요. 내 영화들은 날씨의 노예입니다. 나는 날씨를 속이지 않는 데다 거기에서 영감마저 받으며, 나 스스로 날씨의 남자가 되어야만 하죠. 내가 끌리는 것은 완벽한 예술품이자 자연의 경이로서의 우주입니다."

《에리크 로메르》 이수원 역, 2017, 마음산책, p157




그 시작은 여름이었다. 부서지는 햇살 아래, 푸른빛이 일렁이는 해변가에서 단둘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서로에게 솔직하며 감정에 충실했다. 단 한 번 이루어진 그와의 만남은 강렬했고, 이별은 잔상이 길었다. 남은 것은 평면 사진 위에 새겨진 그와의 추억과 그를 닮은 어린 생명. 여행하는 동안 꿈을 꿨지만, 돌아온 현실은 앙상했다. 그때는 낮이 충만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빛보다 어둠이 더 짙었다.




펠리시는 5년 전, 바캉스를 즐기러 간 곳에서 샤를과 사랑에 빠진다. 계획했던 여행 일정이 끝나, 파리로 돌아오게 되는 펠리시는 샤를에게 자신의 집 주소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 주소는 (그녀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자신의 집이 아닌, 다른 주소였다. 그렇게 샤를과 연락이 끊어지고, 시간이 지나 펠리시는 새 남자친구인 루이의 집에서 동거한다. 그러면서 가끔씩 샤를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앨리스를 돌보며 미용사로 일한다. 그녀가 일하는 미용실에는 또 다른 남자친구인 맥상스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둘 곳은 샤를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영화 <겨울 이야기>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둘의 대화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그리고 남녀 간의 미묘하게 엇갈리는 감정의 지점을 짚어내는 것과 특징적인 클로즈업 쇼트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홍상수 감독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 속에서 온갖 철학자들의 주장들을 레퍼런스로 삼아 말하는 것과 장면 장면마다 그만의 디테일한 요소(영화 초반, 펠리시는 미용실을 향하다가 거리에서 누군가를 인상 깊게 바라본다. 그러나 카메라는 펠리시가 마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펠리시가 끝내 샤를과 재회하는 순간, 둘 너머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청소부를 초점이 맞지 않는 채로 쇼트 안에 두기도 한다.)는 어김없이 발휘되고 있다.



펠리시는 파스칼과 플라톤을 마구 인용하는 지적인 남자인 루이에게도 갈 수 있었고, 또 미용실을 운영함으로써 사업 수완과 경제력을 갖춘 맥상스와도 누베르에서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단순히 이성으로서의 남자친구만을 의미한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 두 가지 남성의 모습은 어쩌면 펠리시에게 놓인 삶의 방식이었다. 루이처럼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철학에 의지할 수 있었고, 맥상스처럼 생활력을 강하게 가질 수도 있었다. 펠리시 역시, 처음에는 둘의 관계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러나, 끝내 샤를을 기다리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 그 둘의 관계를 정리하는 결정은 바로 펠리시 본인에게서 나온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한 여성의 주체성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겨울 이야기>



“난 내가 되고 싶어”. 펠리시는 루이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펠리시가 애타게 기다리는 샤를은 (맥상스와 루이와는 달리) 그녀를 그녀답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일까. 루이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희곡 (영화와 동명이기도 한) <겨울 이야기>를 보며, 그녀는 숨죽이며 흐느낀다. 조각상이 되어버린 왕비가 다시 생명을 얻어 남편과 가족에게 나타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무엇을 발견했던 걸까. 펠리시는 왕비가 다시 살아난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루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왕비를 움직인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샤를을 끝까지 기다리는 것과 그녀를 그녀답게 만들어주는 믿음을 조금씩 두텁게 쌓아간다.



영화 <겨울 이야기>




그 겨울, 눈이 온 거리를 새하얗게 표백해주는 것 같은 그 계절을 통과하며 펠리시의 믿음은 더욱 단단해졌던 걸까. 그 믿음 끝에 마주한 것은 결국 펠리시를 만족시켜 주었을까. 환희는 예상하지 못할 때 더욱 폭발한다. 파리 시내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샤를과 펠리시. 그 둘이 재회한 날이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12월 31일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그 둘이 마주하는 새해는 또 어떤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갈까. 아직 그들은 겨울을 전부 통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종 빛보다 어둠이 짙은 겨울을 낭만적으로 그려낸 ‘에릭 로메르’임을 생각한다면, 그 혹독했던 겨울도, 함께하기 때문에 가장 따뜻한 계절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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