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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Jan 13. 2019

'철조망'을 뛰어넘는 용기

영화 <언더독>

‘주류가 아닌, 강자가 아닌, 소외된, 궁지에 몰린, 약한, 도움이 필요한’. 모두 ‘언더독’을 지칭하는 단어다. 나열된 단어는 이 영화가 초점 맞추는 대상이기도 한데, 이 대상은 강아지보다 분명 사람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강아지 이야기가 아니다. 우화(寓話) 형식으로 풀어낸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다.



영화 <언더독>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 뭉치(목소리: 도경수)는 유기견 무리를 만난다. 그들은 뭉치보다 먼저 주인에게 버림받고 그 산 언저리에서 떠돌고 있었다. 짱아(목소리: 박철민)가 대장인 그 무리로 뭉치는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이곳저곳을 떠돌던 뭉치는 우연히 산 위에서 사는 강아지 밤이(목소리: 박소담) 가족을 만나고, 야생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훈장을 단 그들을 뭉치는 신기해한다. 한편, 짱아 무리 중 하나인 봉지가 사냥꾼에게 잡히게 되고, 다급함을 느낀 짱아 무리는 산 위로 도망가려 한다. 그러나, 다급한 상황은 산 위도 마찬가지. 결국, 산 아래의 짱아 무리와 산 위의 밤이 가족 무리는 연대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보금자리를 찾는 그들의 여정은 무사할까.


“산 아래엔 누가 살아?”라고 산 위(야생)에서 살던 아리(목소리: 전숙경)는 누나 밤이에게 질문한다. 밤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괴물이 살지.” 영화는 신분에 따른 구별 짓기를 강아지의 세계에도 적용한다. 영화는 그것을 ‘철조망’으로 표현하는데, 철조망은 산 위(야생, 자연의 영역)와 산 아래(인간의 영역)를 구분한다. 이것은 성(거룩)과 속(세속)을 구분하는 태도와 비슷한데, 이 태도를 강아지의 세계에 적용시키면 야생일수록 ‘거룩한 강아지’고, 인간의 손을 탈수록 ‘세속적인 강아지’라는 식이다. 뭉치는 ‘성’(거룩)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철조망’을 넘는다. 한편, ‘거룩한 강아지’인 밤이 가족은 인간의 손을 탄 강아지인 뭉치를 무시한다. 무시받던 뭉치는 이렇게 대꾸한다. “나도 달리는 거 좋아해”. 밤이는 그에게 대답한다. “달리는 건 놀이가 아니야. 목숨이 달려있는 거야” 밤이의 대사 이후, 영화는 갑자기 쇼트를 확 바꿔 산 아래의 봉지를 비춘다. 거기에서 봉지는 사냥꾼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껏 달리고 있었다. 야생의 강아지(밤이)가 달리기를 할 때 목숨을 건다면, 산 아래의 강아지(봉지) 역시 목숨을 걸고 달린다.


영화 <언더독>



영화는 이런 식으로 그 둘(성과 속)을 구분하는 경계인 ‘철조망’을 허문다. 이것을 우리 사람의 영역에 적용시키면, 어떨까. 어떤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타인을 무시하는 태도.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각자 세워둔 ‘철조망’이 아닐까. 영화 설정 상, 야생 강아지는 자신이 더 ‘진짜 강아지’에 가깝다고 믿기 때문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러지 못한 강아지는 ‘진짜 강아지’가 아니라고 (혹은 덜 가깝다고, 그리고 인간의 손을 탔다고) 생각하기에 무시한다. 사실 소외되거나 궁지에 몰린다는 ‘언더독’은 ‘기준’이라는 철조망을 세운 순간, 생겨나버린 결과가 아닌가.


한편, 영화 <언더독>은 우리에게 ‘주체적인 삶’이라는 귀중한 가치를 가벼운 유머에 담아 전달하기도 한다. 짱아는 하루 종일 집 밖을 돌아다니다 온 뭉치에게 꾸짖는다. “던져진 대로 살면 돼. 지가 뭐라고 생각한 대로 살려고 그래” 짱아는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뭉치는 다르다. 파주 들판에서 사냥꾼이 풀어둔 전투견과 마주쳤을 때, 두려워하는 강아지 무리에게 뭉치는 말한다. “쟤네들과 우리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 쟤네들은 이 싸움의 동기가 뭔지 몰라. 그저 주인들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이 대사는 자연스럽게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의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명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강한 힘이라는 것.



영화 <언더독>



이 영화는 ‘강아지가 자신의 낙원으로 되돌아간다’(복락원)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장소가 다름 아닌 비무장지대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무장을 해제한 곳. 그래서 어떤 폭력도, 무력도, 무기도, 살육도, 편견도, 비난도, 손가락질도, 아픔도, 눈물도 없는 곳. 그곳을 어떻게 강아지만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귀중한 메세지와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담은 이 소중한 영화에서 비극은 없을 것 같지만, 그것 없는 삶이 없듯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가기 위해 도합 8차선인 자유로를 건너야 한다. 혹시라도 자동차에 치일까 봐 다들 망설이는데, 밤이의 아버지는 한 걸음 내딛는다. 그리고 무섭게 달려드는 자동차를 두 눈 부릅뜨고 마주 본다. 가까스로 자동차는 멈춘다. 두 번째는 밤이의 차례다. 밤이 역시 2차선으로 건너가서 달려오는 자동차와 두 눈을 마주한다. 이 부분에서 잠시나마 내 마음이 일렁인 것은, 두려운 세상을 두 눈 부릅뜨고 마주할 용기를 이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영화 <언더독>



아리는 밤이 누나를 따라 하려다가, 차에 치일뻔한다. 그때, 엄마 강아지가 대신 치이고 만다. 아빠 강아지는 쓰러진 아내를 일으켜 부축하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때, 그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에게 또 한 번 치이고 만다. 카메라는 죽어가는 아빠 강아지의 시선으로 자리를 옮긴다. 피 흘리며 쓰러진 아내 강아지, 사랑하는 딸 밤이, 아리, 그리고 이 비극을 어쩔 줄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굴리는 강아지들을 아빠 강아지는 죽어가면서 기어이 응시한다. 이 비극적인 쇼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순간 힘겨울지라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두려워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도 눈을 떠라, 끝까지 눈을 떠라. 핏발 선 두 눈으로 두려움을, 슬픔을 기어코 마주 봐라.


마침내 그들은 비무장지대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 앞에는 촘촘한 철조망이, 그리고 경계근무 중인 군인들이 가로막고 있다. 잠깐 경계근무가 소홀한 틈을 타 다른 강아지들은 무사히 건너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뭉치는 건너지 못했다. 군인에게 잡힐 위기에 처한다. ‘언더독’, 뭉치는 또다시 궁지에 몰렸다.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철조망을 훌쩍 뛰어넘는 것. 뭉치는 저 높디높은 철조망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쓸데없는 걱정마시라. 뭉치는 이전에 이미 산 위와 산 아래의 ‘철조망’을 넘어본 적 있지 않은가. 영화는 사랑스러운 상상력을 더해 뭉치가 뛰어넘는 것을 도와준다.



영화 <언더독>




그러니까, ‘철조망’을 뛰어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옳고 그름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었던 철조망, 누군가와의 연대가 아닌, 스스로의 고립을 초래하던 철조망. 나와 생각, 성별, 가치관,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철조망을 쳐놓고 그 안에서 남을 비난하던 2019년 우리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 영화 <언더독>은 강압적이지 않고 사랑스럽게, 뭉치의 넉넉한 점프를 보여준다. 따뜻하고, 관용적이며, 주체적이고, 용기가 잔뜩 묻어있는 그 점프를. 영화는 흩뿌린 개나리로 그를 축복한다. 뭉치의 그 점프에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그리고 가장 귀중한 가치가 모두 넉넉하게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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