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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Feb 17. 2018

사랑을 전하는 건, 언제나 말이 아니라 '손'이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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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그것도 남자 인어라니. 인어의 기괴한 겉모습과 예상치 못한 설정에 적잖은 사람들이 경계를 쉽게 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것도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아무리 판타지나 동화라 할지라도, 특유의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로 만드는 게 특기였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 영화는 이 감독의 만든 영화 중 어느 것보다 따뜻하고 애절하며, 애틋하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만든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1960년대 미국 우주 항공연구 센터의 청소부였던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를 쫓아가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언어장애를 가진 엘라이자는 누구보다 밝고 활기찬 생활을 한다. 이런 그녀의 성격은 아마도 곁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 - 회사에서는 젤다(옥타비아 스펜서)와 그리고 집에서는 자일스(리처드 젠킨스) - 덕분이지 않을까. 


그녀는 '시간'에 철저한 사람이다. 그녀는 늘 같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을 듣고 기상하며, 간단한 세면과 샤워, 모든 삶의 패턴을 같은 시간에 맞게 해낸다. 출근 시간까지 정확하다.  (너무 정확하다 보니, 젤다의 입장에서는 엘라이자가 '더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반복되는 시간과 일상은 한치의 오차 없이 균질하고, 반듯하여 그 어떤 돌을 던져도 깊은 강처럼 평안하던 그녀의 일상에 일렁임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인어를 본 순간, 깊은 웅덩이처럼 깊숙하고 단단하게 고여있던 그녀의 일상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여러 부분에서는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많이 떠올리게 되게 만드는 설정(아마도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고 추측되는)이 있기도 하다. 인어공주가 왕자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것, 사랑의 대상인 왕자(사람)와 같은 존재(사람)가 된 것, 그 댓가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까지. 그렇다면, 이 영화는 동화 '인어공주'의 남녀의 설정만을(여자-인어공주, 남자-사람) 바꿔 각색한 영화인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 영화가 담고있는 메시지가 훨씬 독특하고 선명하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인가. 그것은 자신의 '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이때, 사용된 손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의 행동이자, 그 사람의 '정체'다. 엘라이자는 목소리로 말하지 못하는 대신, 손으로 사람들과 소통한다. 엘라이자에게  손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한편 자일스의 손은 어떤가. 그는 화가였지만, 그가 그린 그림은 애석하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가치있던 순간은 인어를 구해내는 작전을 수행할 때, 손으로 핸들을 잡았던 순간이다. 결정적으로, 인어의 손은 어떤가. 인어의 손은 닿는 곳마다 상처와 병들이 치유되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사랑을 전하는 것은 언제나 말이 아니라 ‘손’이고, 움직이는 ‘행동'이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인어와 엘라이자의 사랑이 그토록 아름답고 애틋한 이유는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휘발되는 말의 사랑(언어)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 손의 사랑(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의 손은 그 자체로 폭력과 증오를 보여준다. 그는 인어를 고문할 때 손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죽일 때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그의 손가락이 잘리고,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로 죽게되는 설정은, 행동과 말에 사랑이 아닌, 증오와 폭력을 담은 자의 최후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사실 스트릭랜드가 인어에게 유달리 증오와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일면 그런 면이 보이기도 하지만) 왜냐하면, 관객 대부분 역시 기괴하게 생긴 인어를 보며 ‘저 생명체는 다른 사람을 공격할 위험한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라이자가 아무런 부대낌없이 인어에게 다가가 호감을 표하는 장면을 보며, '저러다가 인어가 엘라이자를 공격하지 아닐까'라는 경계 또한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관객 대부분 또한 인어를 대할 때, 스트릭랜드와 비슷한 '편견'을 인어에게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아마 감독의 의도였을 것이다. (인어가 스트릭랜드의 손가락을 자른 사건의 전후 맥락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밝혀진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인어는 괴물이 아니다. 단지, 우리와 다른 모습일 뿐. 혹시 그가 폭력적으로 행동했다면, 그건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라기 보다 그 이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타인을 대하는 소통의 기본인 '이해'이자, '공감'이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철저히 '편견'에 갇혀 다른 사람들을 상대했다. 타인과의 공감은 커녕 자신만의 편견의 세상에 갇혀, 편견의 철장 속으로 스스로 고립시킨 채, 바깥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 보이는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괴물’이 아닐까. 


영화의 시작 부분에 낮게 깔린 내레이션(아마도 자일스의 목소리일 것이다)이 했던 말, “이 영화는 사랑과 상실을 파괴하려던 괴물에 관한 이야기” 라고 말하며 시작했던 이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괴물의 정체를 다시금 환기시켜 준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그러니까, 사람의 정체는 입이 아니라 손에 있고, 말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 그래서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입 보다 손을 봐야하고, 말 보다 행동을 봐야 한다. 그 손과 행동이 무얼 하는지를. 확실히, 사랑은 명사보다 동사에 더 가깝다.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의 형태는 대체 무엇이길래. 아니, 그 사랑은 무엇으로도 형태를 이룰 수 없기에 영원히 동사로서 존재하는 것일까. 수증기가 낮게 깔리고, 시종 어둡고 침침하며 습기 찬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서, 사랑의 형태는 아무 모양없이 다만 붉게 물들어 빛깔 고운 자태를 의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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