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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r 15. 2018

시간이 지우지 못한 이야기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의 리뷰입니다


 

이 영화의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먼저 떠올린 것은 십여 년 전 일본 원작 영화를 봤을 때 느꼈던 나의 감정이다.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슬픈 이야기는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남아 메아리쳤고, 엄마를, 그리고 아내를 떠나보낸 아들과 남편은 이제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이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한동안 남아있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때와 같은 감정이 들까, 아닐까. 이장훈 감독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숙제는 관객들의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는 원작 영화의 감정을 어떤 식으로 체화해내는가에 있을 것이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한국 멜로영화의 얼굴이기도 한 손예진과 소지섭은 애초에 감독이 원했던 이미지 캐스팅대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시간이 갈수록 완숙해 가는 손예진의 연기는 멜로라는 장르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애달프고 애절한 사랑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해준다. 2년 전 <덕혜옹주>에서도 손예진은 이미 인생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녀의 감정은 더 풍성해지고 여유로워지는 느낌이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이야기는 수아가 쓴 동화에서 시작된다. 구름나라로 떠난 엄마 펭귄은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이 쌓여갈 무렵, 장마가 시작되고 엄마 펭귄은 빗방울 열차를 타고 세상에 내려온다. 장마가 끝나는 날, 엄마 펭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그곳에서 아들 펭귄을 지켜본다는 동화 이야기. 이 동화는 결국 수아(손예진)의 자기실현이 되었다. 어떤 시절만 되면, 필연적으로 숲 속으로, 풀 속으로, 세상으로 스미는 빗방울을 수아는 동경했던 걸까. 수아는 장마 기간 동안에만 현실의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시간은 균질하게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가혹한 물결이어서 어떤 시간은 머물며 맴을 그리고, 또 어떤 시간은 때로 역류하기도 한다. 우진과 지호가 그토록 흠모했을 6주의 장마는 깊은 호수처럼 넉넉히 고여있었다. 장마가 그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애써 잊은 채 말이다. 6주라는 시간은  길고 긴 삶에서 고작 스쳐갔을 찰나에 불과하지만, 지루한 영원은 폭발하는 찰나를 영원히 동경한다. 


지호(김지환)는 비가 그치지 않기를 소망하며, 네 잎 클로버를 창문에 붙인다. 처음 창에 붙어져 있던 네잎클로버는 7개에서 8개가 되었다. (장마기간이 보통 6주라는 것을 생각하면, 네잎클로버가  7개, 그리고 8개로 늘어난 것은 장마기간을 한주, 두 주 더 늘리려는 소망이다)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수아가 하나를 더 붙여 네잎클로버는 9개가 되었다. 사랑은 시간을 애타게 흠모하지만, 시간은 무덤덤하게 제갈길을 갈 뿐이다. 시간을 멈춰 세우려거나, 늘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창가에 네잎클로버를 붙이는 것, 심장에 무리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을 위해 달리는 것, 이처럼 사랑은 무심한 세월과 차가운 운명에 나약하게, 그리고 무모하게 맞서곤 한다. 아마도 맞서게 만드는 사랑의 동력은 간절함일 것이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그러니까, 간절함이다. 처음 수아를 봤을 때, 우진(소지섭)이 말을 걸게 된 것도, 꽤 많은 시간이 흘러 군대를 전역해서도 수아에게 수아에게 전화할 때 여전히 가슴 떨려하는 것도, 수아가 펜을 돌려주겠다고 수아를 만나러 간 것도, 서울로 올라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우진이 수아를 기다린 것도, 다가올 운명의 비극을 알면서도 수아는 주저 없이 한달음에 시골길로 내려오는 것도, 떠나는 수아를 찾아 땀이 뒤범벅이 되도록 달리고 또 달려서 넘어지고, 피가 흘러도 다시 일어나 달려 ‘지금 만나러 가는 것’도. 이처럼 영화 속 수아와, 우진, 그리고 지호를 움직인 힘은 간절함이었다. 사랑은 도도한 세월과 운명 앞에 때론 무릎 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간절함으로 되살아나 그 모든 운명과 시간을 압도한다.  


 

수아는 다시 떠났지만, 여전히 집에는 수아의 흔적이 곳곳에 남겨져있다. 기억은 흐릿해지지만, 흔적은 지울 수 없다. 한순간 섬광같이 반짝였던 감정은 빛을 잃을 수 있지만, 그 찰나에 서렸던 감정은 끝끝내 사라지지 않고 흔적을 여기저기 남긴다. 수아가 남긴 흔적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고, 이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그곳에서 영원히 되풀이되며 불멸할 것이다. 시간은 끝내 이야기를 지우지 못하고, 사랑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영원히 맴을 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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