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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Jan 15. 2018

'삶의 한계'를 통과해 나가는 이들에게

영화 <원더>

어기스트는 우주와 과학을 좋아한다. 스타워즈를 좋아하고 컴퓨터,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보통 11살의 어린이다. 하지만 그에게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얼굴이 태어났을 때부터 기형이라는 것이다. 어기스트는 늘 나사(NASA) 로고가 붙여진 우주복 헬멧을 쓰고 다닌다. 언젠가는 달을 다녀와서 모두에게 환영받는 자신을 꿈꾸며.


영화 <원더>


보통 이런 영화는 주인공의 결핍을 이야기의 주동력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상황과 주변인물은 주인공의 결핍과 만났을 때, 어떤 갈등이 일어날지, 그 갈등으로 인해 주인공은 얼마나 좌절하는지 등을 보여준다. 그러면 주인공의 내면을 향한 공감은 농밀해지지만, 상대적으로 주변인물과 상황은 도구화되기 쉽다. '주인공-악역'의 단순한 이분법적인 구도가 대표적이다. 당연히 도구화된 주변인물들은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고, 전형적이고 평면적이게 된다.



그러나 <원더>는 인물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인물 한 명, 한 명에게 이야기를 불어넣고, 그들의 내면과 상황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진전시키는 것보다, 다소 느리더라도 인물 한 명, 한 명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감으로써 이야기의 폭을 넓게 만든다. 그럴 때, <원더>의 인물들은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사람’이 된다. 무조건 악한 행동만 하는 악한 사람과 그 반대의 선한 사람도 없듯, <원더>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동기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내면은 어떠한지까지 담아낼 줄 안다. 이 점이 사람에 대한 사려 깊은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원더>


아무리 힘들었어도 어린 시절이라면, 막연히 아름다운 색으로 우리는 채색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 그때의 아이가 겪은 갈등은 쉽지만은 않다. 나이가 어려도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너무나 가혹하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주로 '관계'라는 테두리 속에서 자신의 한계와 상처를 경험하고, 그로인해 절망하며 몇몇은 그것을 넘어서기도 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 시기에 겪어야 할 상처는 어른 못지 않게 아프다. <원더>는 등장하는 모든 아이에게 자기만의 '삶의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따뜻한 이유는 '삶의 한계'가 있는 아이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직면하고, 그 한계 너머로 위태롭지만 뚜벅뚜벅 걷는 걸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챕터의 타이틀을 어른이 아닌 아이들의 이름을 넣음으로써, 이 영화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병아리가 스스로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와야하는 것처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그 아이만의 숙제인가.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같다. <원더>는 한계를 겪는 아이들을 고립시키지 않는다. 아이가 한계에 부딪혀 좌절할 때마다, 끊임없이 가족과 어른, 그리고 친구를 통해 다시 일어나게 한다. 물론 상처는 아프고, 흉터가 남아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자신의 '삶의 한계'를 다시 직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삶의 한계를 겪고 통과해온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다.


 

영화 <원더>



<원더>는 모든 사람에겐 ‘삶의 한계’라는 것이 있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 과정을 통과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을 직면하고,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언제 또다시 쓰러져 좌절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한계를 향해 한 발을 허공에 내디뎌 걸어가야 한다. 딱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이 방법밖에는 없기에.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해 나아가는 한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놀라운 기적 Wonder이다.




 

영화 <원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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